그렇게 붐비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하철 전동차 안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나는 배낭을 벗어서 선반에 올려놨다. 나와 함께 한 무리의 늙은 남자들이 같은 문으로 전동차에 올랐다. 그들은 노약자석으로 갔다. 이미 노약자석은 자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그리고 가서 버티고 섰다.
한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노약자석에 앉아 있었다. 화장을 곱게 한, 몸집이 자그마한 양순해 보이는 여자가 늙은 남자들 옆에 앉아 있었다. 나와 함께 탄 한 무리의 늙은 남자들이 그 젊은 여자 앞에 버티고 서서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말없는 긴장이 그 근처 공기를 짓눌렀다. 나까지 그 젊은 여자를 얼굴이 참 두꺼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 젊고 아름다운 여자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참 용감하다 하고 감탄하다가 다른 생각에 빠져들면서 그 여자를 잊었다.
한참을 그렇게 넋 나간 듯이 서 있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일어선다. 나는 일어서는 그 여자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드디어 양심의 가책을 받았구나! 그 양심은 작동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리는 구나 하고 막 생각하려는데 그 여자가 돌아서서 손잡이를 잡는다. 그때 그 여자의 앞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콱 나면서 나의 짧은 식견이 부끄러워졌다.
그여자의 배가 불러 있었다. 무려 임신 8개월쯤은 되어 보이는 배였다. 앉아 있으니 그런 줄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 젊은 여자가 꼿꼿이 앉아 있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그런데 나까지도 양심, 도덕 운운하면서 그 여자를 낯 두꺼운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젊고 작은 여자가 힘겹게 손잡이에 매달리듯이 그렇게 배를 내밀고 서 있는데도 그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받은 늙은 남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히히덕거리면서 그들만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자세히 그 여자의 얼굴을 보니 눈 밑이 붉다. 뚜렷이 피로가 보인다. 분노가 치솟으면서 이를 어떻게 하나 하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늙은 남자들이 옛날 버릇을 못 버리고 떼를 지어서 소매치기를 했다는 뉴스를 들은 일이 생각났다. 늙어도 나잇값을 못하고 품위는커녕 나쁜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환갑을 갓 넘긴 늙고 건강한 남자와 임신 8개월인 여자 중에 누굴 앉혀야 하는지 인민재판을 해야 한다.
나의 지난날이 떠올랐다. 나의 힘들고 슬프던 임신 시절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더해졌다. 그때 나는 집 나와서 바람난 미혼모였다. 몸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나이든 여자가 주변에 한명도 없었다. 태어나서 그런 사람이,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그 흔하디 흔한 경험을 가진 여자가 그렇게 간절히 필요했던 적이 없었다. 고독했다. 사람을 제 몸속에, 뱃속에 넣고 다니면서도 고독했다. 지구는 아주 넓은 황무지이이고..... 나는 그 속을 끝도 없이 홀로 걸어다니는 것처럼 그렇게 고독했다. 그 이상한 특별한 시기는 아주 강한 느낌으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 아무 때고 자극만 받으면 자동으로 눈물을 동반하고 떠오른다.
나는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정거장에 전동차가 멈출 때마다 고개를 막 휘저으면서 자리를 찾았다. 드디어 어떤 정거장에서 자리가 생겼다. 나는 그 여자의 팔뚝을 덥석 잡고 그리고 끌었다. 그 젊은 여자는 의아해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눈이 마주쳤다. 그 여자는 의아해하는 눈에서 나의 눈물을 보았는지 감응하는 눈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여자를 자리에 앉혔다. 그러고는 내 배낭이 올려져 있는 선반 있는 데로 갔다. 선반에서 배낭을 내려서 어깨에 메었다. 그 여자가 앉아 있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다음 칸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다음 칸에 완전히 들어서고 나서야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김전선의 [점선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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