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아름다운 그늘- 신경숙

구름뜰 2009. 5. 15. 11:30

어렸을 때 나는 사랑하는 것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아주 깊은 속에 있는 아주 내밀한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서로에게 옮겨주듯 말해주는 것, 비밀을 나눠 갖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그는 알아듣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러나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나는 힘겹게 내 마음을 말하면 그는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버렸다.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좀더 자라 나를 지켜줄 사람을 갖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원히 나를 지켜줄 사람을 갖는다는 것은 약한 나의 존재를 얼마나 안정시켜줄 것인가.

새벽에 혼자 깨어날 때, 길을 걸을 때, 문득 코가 찡할 때,

밤바람처럼 밀려와 나를 지켜주는 얼굴.

만날 수 없어 비록 그를 향해 혼잣말을 해야 한다 해도

초생달같이 그려지는 얼굴.

그러나 일방적인 이 마음은 상처였다.

내가 지켜주고 싶은 그는 나를 지켜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자신을 지켜줄 사람을 갖고 싶은 꿈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랑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거기다 우리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사랑은 영원해도 대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했을 때,

사랑이란 것이 하찮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영원을 향한 시선과 몸짓들이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난 듯이 사라져버리다니, 멀어져버리다니.


사랑은 점점 그리움이 되어갔다.

바로 옆에 있는 것,

손만 뻗으면 닿는 것을 그리워하진 않는다.

다가갈 수 없는 것,

금지된 것,

이제는 지나가버린 것,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향해 그리움은 솟아나는 법이다.

사랑을 오래 그리워하다보니 세상 일의 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성과 소멸이 따로따로가 아님을,

아름다움과 추함이 같은 자리에 있음을,

해와 달이, 바깥과 안이, 산과 바다가, 행복과 불행이.

그리움과 친해지다 보니 이제 그리움이 사랑 같다.


사랑이 와서, 우리들 삶 속으로 사랑이 와서,

그리움이 되었다.

사랑이 와서 내 존재의 안쪽을 변화시켰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사라지고 멀어져버리는데도 사람들은 사랑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은건

사랑의 잘못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의 위력이다.

시간의 위력 앞에 휘둘리면서도 사람들은 끈질기게

우리들의 내부에 사랑이 숨어살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아이였을 적이나 사춘기였을 때나 장년이었을 때나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을 관통해 지나간 이름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부분)

 

                        

사랑이라는 것이 와서 내 존재의 안쪽을 변화시켰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사리지고 멀어져버리는 데도 사람들은 사랑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불교용어로 무상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도 사람도 변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음'이 이 세상의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그런줄 알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내 안에 삶에 대한 애착과 사랑 그리고 그리움 같은 것들이 

 내 의식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 들도록 항상 내버려 두면서 살아온것 같다.

따뜻한, 가장 인간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쉬움 같은 것이었을까 

마음붙이지 못한 현실을 사는 것도 아닌데...

아름다운 추억이 그리움을 낳듯

사라져 버리고 말 것 같은 것들을 내 안에서만은

영원히 남겨두고 가둬두고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너무 가벼워서 금방 날아가 버린다고 한다 

 하지만 슬픔이나 아픔같은 것들은

가슴 저 밑바닥에 무거운 질량으로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그것들은 수면위로 드러나진 않는다

살다가 문득, 아름다운 것을 본다거나,

 감정이입이 가능한 상황이나 현실에 처하면

소용돌이 치듯 꿈틀대며 일어난다.

그 아름다운 것들은 눈물부터 쏟아내게 했지만

정작은

그 아름다움(눈물)덕분에 나를 위로할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무서워하지 말자. 시간은 잔인하지만 공평하다.

잠들어 있는 것, 깨어 있는 것, 여기에 있는 것, 저기에 있는 것,

모든 것들 위로 흘러간다.


꿈은 오로지 사라지기만 하는 건 아닐 거다.

육체는 오로지 낡아가기만 하는 건 아닐 거다.

사라지고 낡아가면서 남겨놓았을,

생에 새겨놓았을 비밀을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뿐일 거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함부로 살지 않는 일.

그래, 함부로 살지 말자. 할 수 있는데 안 하지는 말자.

이것이 내가 삶에서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적극성이다.


기어이 잊어야만 하는 일을 벌써 갖지 말자.

왔다가 가버린 것, 저기에서 진이 빠져 마침내 숨을 죽인 것,

여기에서 다시 생기를 줘 살게 하자.

시간에 빼앗기기 전까지 아무것도 잊지 말자.

겉도는 주장으로가 아니라, 이 흘러가는 시간의 무상함 속에서...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부분)

 

 

공평한 시간! 

내가 바라는 사랑은 꿈은 상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꿈은 어차피 현실과의 괴리가 동반되지만

 그 것이 현실을 부정한다거나 덜 아름답게 만들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염두에 둔 상상(꿈)이었다. 

그랬기에 그것도 그리 자유로운 상상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랑이든 돈이든 그 무엇에든...비움없이 성숙해질 수 있는게 있을까. 

욕심내며 더 큰걸 바라다가 상처받으며 기대치로 인한 허무만 경험할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에도 간격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꿈이든 현실이든 그것이 아름다울려면..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

늘 인간의 가슴을 관통하는 건 그래도 사랑뿐이다.

 그러기에 순간순간의 사랑에 진실되게 맞서야 하리라.

상처속에서도 우리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인간이기에

 

.

 

새로운 시간은 완전히 다른 시간 속에서 오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의 기쁨과 지금까지의 슬픔을 바탕으로 해서 온다.

아무리 새롭다고 해도 그 바탕 위에서 시작된다.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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