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이 곡우(穀雨)였다. 곡식에 비가 내린다는 뜻으로 농경국가의 생활력인 24절기의 하나다. 우리나라가 더 이상 농경국가가 아닌 까닭에 24절기 대부분이 무심코 지나가지만 곡우는 사정이 다르다. 차(茶) 때문이다.
세간에서 으뜸으로 치는 차 중에 우전(雨前)이란 게 있다. 곡우 전에 찻잎을 딴 차다. 그럼 곡우 전에 딴 차가 왜 좋을까. 그건, 첫 잎이어서다. 첫물차로도 불린다. 찻잎이 참새의 혓바닥을 닮았다 해서 작설차(雀舌茶)라고도 하고, 잎이 가늘어 세작(細雀)이라고도 한다.
결국 작고 여리고 가는 찻잎이 좋다는 얘기다. 곡우 뒤 닷새까지 딴 차를 곡우차라 하는데, 이는 값이 우전차의 3분의 1정도로 뚝 떨어진다. 이처럼 차는 며칠 상관으로 맛과 값이 달라지는 오묘한 이치를 보인다. 이 때문에 남도의 차밭에선 우전을 수확하려 무던히 애를 쓴다. 이른 봄 전국의 이름난 대형 다원에 들어가 차 고랑 사이를 걸어보면 그 안간힘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정말로 우전차가 차 중의 으뜸일까. 초의(艸衣)선사란 분이 계셨다.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집대성한 19세기 스님이다. 여기서 잠깐. 다도는 일본의 차문화고 우리는 다례(茶禮)라 했다는 의견이 있다. 복잡하고 성가신 다도는 일본의 것이란 주장이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만, 드러내놓고 찬성하진 못한다. 차에 관한 한 전문가연하는 분이 워낙 많으셔서.
아무튼 초의선사가 남긴 『다신전(茶神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우리 차는 곡우 전후는 너무 이르고 입하 전후가 적당한 때다’. 차 재배가 기원했던 중국 남부의 온난한 기후가 차를 따는 시기의 기준이 됐으므로 우리마저 따뜻한 남쪽 나라의 법도를 따를 까닭이 없다는 말씀이다.
오현이란 스님이 계시다. 강원도 신흥사 회주로, 법명은 무산이지만 속명 조오현에서 이름만 따 오현 스님이라 불린다. 시조시단의 큰 어르신이지만, 술·담배 가리지 않는 기행으로도 유명하다. 그 스님의 곡차를 얻어 마신 적 있다. 한데 주도가 영 별났다. 발우에 한가득 술을 따른 뒤 단번에 들이켜고, 다음엔 발우에 차를 채운 뒤 죽 들이켰다. 뒤이은 스님의 한 말씀. “이게 차곡차곡이네. 법도는 무슨.”
차에 관한 가장 유명한 화두는 ‘끽다거(喫茶去)’다. 선(禪)을 묻는 대중사부의 물음에 옛 중국의 고승이 시큰둥하게 뱉었다는 말이다.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
이런 선인들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차를 마신다는 게 절기 따지고 법도 따지는 가위 눌리는 일은 아닌 듯하다. 그저 내 입에 맛있는 차 한잔 마시면 될 일이다.
손민호 기자
세간에서 으뜸으로 치는 차 중에 우전(雨前)이란 게 있다. 곡우 전에 찻잎을 딴 차다. 그럼 곡우 전에 딴 차가 왜 좋을까. 그건, 첫 잎이어서다. 첫물차로도 불린다. 찻잎이 참새의 혓바닥을 닮았다 해서 작설차(雀舌茶)라고도 하고, 잎이 가늘어 세작(細雀)이라고도 한다.
결국 작고 여리고 가는 찻잎이 좋다는 얘기다. 곡우 뒤 닷새까지 딴 차를 곡우차라 하는데, 이는 값이 우전차의 3분의 1정도로 뚝 떨어진다. 이처럼 차는 며칠 상관으로 맛과 값이 달라지는 오묘한 이치를 보인다. 이 때문에 남도의 차밭에선 우전을 수확하려 무던히 애를 쓴다. 이른 봄 전국의 이름난 대형 다원에 들어가 차 고랑 사이를 걸어보면 그 안간힘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정말로 우전차가 차 중의 으뜸일까. 초의(艸衣)선사란 분이 계셨다. 우리나라 다도(茶道)를 집대성한 19세기 스님이다. 여기서 잠깐. 다도는 일본의 차문화고 우리는 다례(茶禮)라 했다는 의견이 있다. 복잡하고 성가신 다도는 일본의 것이란 주장이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만, 드러내놓고 찬성하진 못한다. 차에 관한 한 전문가연하는 분이 워낙 많으셔서.
아무튼 초의선사가 남긴 『다신전(茶神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우리 차는 곡우 전후는 너무 이르고 입하 전후가 적당한 때다’. 차 재배가 기원했던 중국 남부의 온난한 기후가 차를 따는 시기의 기준이 됐으므로 우리마저 따뜻한 남쪽 나라의 법도를 따를 까닭이 없다는 말씀이다.
오현이란 스님이 계시다. 강원도 신흥사 회주로, 법명은 무산이지만 속명 조오현에서 이름만 따 오현 스님이라 불린다. 시조시단의 큰 어르신이지만, 술·담배 가리지 않는 기행으로도 유명하다. 그 스님의 곡차를 얻어 마신 적 있다. 한데 주도가 영 별났다. 발우에 한가득 술을 따른 뒤 단번에 들이켜고, 다음엔 발우에 차를 채운 뒤 죽 들이켰다. 뒤이은 스님의 한 말씀. “이게 차곡차곡이네. 법도는 무슨.”
차에 관한 가장 유명한 화두는 ‘끽다거(喫茶去)’다. 선(禪)을 묻는 대중사부의 물음에 옛 중국의 고승이 시큰둥하게 뱉었다는 말이다.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
이런 선인들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차를 마신다는 게 절기 따지고 법도 따지는 가위 눌리는 일은 아닌 듯하다. 그저 내 입에 맛있는 차 한잔 마시면 될 일이다.
손민호 기자
동아일보 5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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