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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근은 떠났지만

구름뜰 2009. 6. 4. 13:17

김수근은 떠났지만 그의 ‘공간’은 살아있다 [중앙일보]

1966년 11월 창간, 7월호로 통권 500호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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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 보답의 뜻으로 나는 이렇게 결의를 표합니다. 설사 등사판을 가지고 손수 긁는 일이 있더라도 ‘공간’은 계속 발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공간그룹 대표로 ‘공간’지를 창간한 건축가 고 김수근(1931~86)선생. 잡지를 창간했을 때 그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공간’지와 더불어 서울 원서동 공간사옥에 자리한 소극장 ‘공간사랑’과 미술관 ‘공간화랑’은 70~80년대 문화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75년 월간지 ‘공간(空間)’ 100호를 냈을 때 발행인인 건축가 김수근(1931~86)이 한 말이다. 1966년 11월 창간해 75년 9월 100호에 이르기까지 이미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지만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잡지를 만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진 것이다. 김수근은 세상을 떠났지만 잡지는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60~70년대에 건축·미술·춤·음악을 다루는 독특한 종합문화예술잡지로 당대 문화 담론 흐름에 주도적 역할을 한 ‘공간’이 7월 500호를 맞는다. 나이로는 마흔네 살이다.

현재 ‘공간’은 건축에 초점을 맞춘 전문지로 발간되고 있지만 지난 40여 년 한국 문화사에서 차지한 자리는 결코 작지 않다. 건축에 대한 관심을 넘어 전통문화에 대한 가치를 재발견하고 미래 지향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장(場)’으로서 큰 역할을 제공해 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공간 탐구’에서 ‘종합예술’까지= ‘공간’ 창간호를 펼쳐보면 44년이란 세월이 무색할 정도다. 첫 기획으로 게재한 글은 ‘서울 도시 기본계획’(글 박병주)이었다. 최근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도시 공간’이라는 주제에 일찍이 천착한 흔적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전통 탐구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시각 자료에 남다른 공을 들여 17쪽에 걸쳐 사진을 싣고 한글과 영어를 병기해 ‘종묘’를 집중조명한 것도 눈에 띈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건축행정을 비판하는 드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건축적 관점에서 비판했고, 서울 시청앞 신축 호텔이 광장 남쪽 햇빛을 막았을 때에는 ‘햇빛을 들게하라’는 제언을 하기도 했다.  

1966년에 발행된 ‘공간’ 창간호(左)와 올 6월호로 발간된 499호.
◆‘통섭’을 키운 문화사랑방=‘공간’은 각 예술분야를 폭넓게 수용하는 데도 앞장섰다. 72년에 문을 연 미술관 ‘공간화랑’, 79년에 설립된 소극장 ‘공간사랑’은 잡지와 호흡을 맞춘 ‘문화 동반자’였다. 김수근은 84년 2월 200호 기념사에서 “건축과 회화, 음악, 미술과 연극, 그리고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은 오늘 한국문화를 형성하는데 피와 살 같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73년 8월호에 명창 김소희와 유기룡(민속 음악학자)의 대담을 싣고, 75년 10월 문화계에 큰 충격을 던져준 황병기·홍신자의 ‘미궁’ 공연을 기획하고 자세히 소개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74년 공간사랑에서 비디오 아트를 상연했으며, 잡지는 82년 7월호에서 ‘백남준 비디오 아트 20년’을 특집기사로 다뤘다. 이 밖에 ‘김덕수 사물놀이’, 공옥진의 ‘병신춤’이 ‘공간’을 통해 처음 소개되고 주목받았다.

한편 ‘공간’을 거쳐간 문화인들도 적잖다. 오광수(71)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67~73년 근무하며 편집장을 역임했고, 유홍준(60) 전 문화재청장도 70년대 중반에 기자로 일했다. 최순우(1916~84) 전 국립박물관장은 편집주간으로, 이경성(90)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운영위원으로 참여했다.

‘공간’의 전 편집위원인 박길룡 국민대 건축학과 교수는 “지금은 장르간 경계허물기에 대한 인식이 보편적이지만 ‘공간’이 보여준 통섭적 태도는 당시에 ‘의외’로 느껴질 정도로 참신하고 진보적인 것이었다” 며 “그런 역할을 누가 다시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SPACE’ 시대= ‘공간’은 97년 11월 건축전문지로 정체성을 바꿨다. 영문제호 ‘SPACE’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상림 공간그룹 대표는 “아무도 하지 않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게 더 의미있다고 판단해 전문지로 방향을 선회했다”며 “지금은 글로벌 무대에 한국 건축계와 건축가를 알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한쪽에는 이같은 변화를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광수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는 “‘공간’이야말로 ‘매체’와 문화공간이라는 ‘장소’가 긴밀하게 연결되던 특별한 곳이었다”며 “글로벌한 건축전문지로서의 도약이 반가우면서도 이 잡지가 주도해온 담론 형성의 역할이 단절된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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