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구름뜰 2009. 6. 5. 11:16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집- 박경리

 

   

작년에 박경리 선생님이 미륵산에 묻힌 다음날 통영에 갈 일이 생겼었다

통영은 초행길이었는데

단체 관광을 계획하던 차에

그러니까 선생이 돌아가시기 훨씬 전에

통영엘 한번 가보자고 계획한 것이

가는 날이 선생의 장례식 다음날이었던 것이다

통영의 풍경은 곳곳에 고인을 애도하는 만장같은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고

<김약국의 딸들>이 생각나는 오밀 조밀한 어촌 풍경이 초행이어도 정겨운 모습이었다.

책속에서 익숙하게 읽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하동 평사리도 갔을때도 그런 느낌인건 매 한가지였다.

선생은 생전에 하동에 친척집인가 친구집이 있어 우연히 딱 한번 왔었고 

그 딱 한번 넓은 악양들판을 본것이 

<토지>라는 작품을 탄생시킨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평사리에는 최참판댁뿐 아니라

용이네 집을 비롯 물레방앗간 등

 책속 평사리가 실제로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최참판댁 마루에 서면 악양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토지가 다 최참판댁 소유였으니 얼마나 복일까 마는..

서희의 박복한듯하면서도 ..

운명을 개척해가는 삶의 여정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는

서희 처소도 그렇게 마당한가운데 작은 연못까지  재현되어 있다.

 

책덕분에 다시 태어난 평사리!

평사리라는 지명을 선생은 지도로만  보고 썼다는

허구가 만들어낸 실제처럼 평사리는 토지 덕분에  다시 살아난 마을이다. 

다녀온지가 6~7년 정도 되었는데 그때도 관광객들이 꾀나 많았으니.

문학의 힘이란 참 놀라운 것이다. 

 

선생의 마지막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혼자서 영주씨를 데리고 살아온 삶을

 나이만큼 편안하게 관조한 모습들이 녹아있다.

혼자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그 무서운 설움. 살기위해서 썼다는 쓸수밖에

그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는 고인은..이렇게 말했다.

<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 모른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모진 세월이 가고>

 홀가분하게 떠날 준비가 된 마음은 애처럽다.

편안하다고, 홀가분하다고...

암선고를 받고도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고

 원주에서 농사일과 집필만을 하셨던

고인의 삶은 담백했다.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문밖에서 여우와 늑대가

까치 독사 하이에나까지

<짐승들이 으르렁 거렸다>라고 표현한 삶은 

또 얼마나 팍팍했을까..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후함으로 하여

삶이 풍성해지고

인색함으로 하여

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

생명들은 어쨌거나

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

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

길가에 굴러 있는

한낱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더러 보아 왔다.

심성이 후하여

넉넉하고 생기에 찬

인생도 더러 보아 왔다.

 

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

후함은 낭비가 아니다

인색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

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

인색한 사람은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사람의 됨됨이 박경리

 

이 시집 한권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접어놓았던 페이지다.

 부자와 가난, 후함과 인색함에 대한 

선생의 소견이 삶의 지혜처럼 녹아있는 시다.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는 말이 나를 울렸다..

 

 

 

 작년에 선생이 작고(5월 5일)하시고 다음달인  6월에 초판이 발행된.

유고시집<버리고 갈것만..>엔 김덕용화가의 그림(삽화)이 함께 실려 있다.

 표지의 박경리선생 초상도 김덕용화가의 그림이다.

김덕용선생은 박경리선생을 생전에 본 적이 없었는데

출판사에서 유고시집을 내면서 시와 어울리는 그림을 찾던중 김덕용선생을 생각해냈고 

출판사의 권유로  유고시를 접하고 영감을 받아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지난달 5월  24일까지 선생 1주기를 맞아서 갤러리 현대에서

시집(책)에 실렸던 작품들과 최근작까지 포함  전시회를 가졌었다.

꼭가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았었다. 

 

한데 어제 선생의 작품 한점이 예술회관 1전시실에 걸려 있는 것이다.

깜짝 놀라서 보니 김덕용 맞다. 

신기한 일이다.

 보고싶어 한 것  알고 내게 찾아와 준 것처럼 반가웠다. 

이런 반가울데가.

구미 연극제 기간 동안  <구미국제 현대 미술제>가  열리는데

 그곳에  혼자서 들렀다가 만난 반가움이다.

원래 촬영 금지인데 가금씩 허락해 주기도 하는 상황을 알기에

해도 되냐고 물어볼려고 했더니 아무도 없었다.

내게 요런 기회까지  제공해 주다니.

 얼른 한 컷 찍어온 추억의 사진을 찾아낸 것 같은 기쁨이란..  

 

 

김덕용(48), 화가는 서울대 미대회화과와 동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한국의 대표적 작가다.

그는 자연의 숨결이 살아있는 나무판을 캔버스삼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나뭇결에 우리의 어머니, 누나, 동생같은

인물을 매우 정겹게 묘사하고

아련한 추억을 간직한 우리의 고풍스러운 정물을 따뜻하게 표현한다.

'그림은 손재주나 머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하는 화가다..

 

 

나무가 물감을 흡수해서 나타내는 색과

그 결이 독특한 질감과 분위기를 주는 그림이다.

이 그림도 제작한 연대가 2008년이지만  고졸한 느낌이 나는 게 특색이다.

사진으로만 봐 왔지 실물로 보는건 처음인데 사진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또렷하지 않아서 더 추억같은 

옛정서까지 느겨지는 여성들의 그림들에서는 애틋한 마음이 드는.. ,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렸다면 이 느낌이 날리가 없을 터다!

 

자기영역을 찾은 화가들의 작품세계는 보는이에게도 감동을  준다. 

박경리 선생님책 <버리고 갈 것만..>덕분에 알게된 화가지만

 직접 그림을 보니 더욱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