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수필문학(허구성 수용을 위한 수필의 장르론적 반성)

구름뜰 2009. 9. 10. 09:48

 

 

 

 

월간 수필문학을 정기 구독하면서

나름 독서량을 의도적으로 늘려 보려 했건만

월간지는 정확하게 때맞춰 찾아주는 만큼

차곡 차곡 순서대로 꽂아두는 것으로 다음을 기약하기에 좋은 책이기도 하다.

 책꽃이 책들중에 제일 많이 꽂힌 책이다.

너무 깨끗해서 신간을 무색케 할 정도다.

이 책도 나온지 벌서 4년이 넘었건만(2005년 5월호)  손자국하나  없다.

꽂혀 있어 더 깨끗한 건지.. ㅎㅎ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제라도 손때를 묻혀보려 요즘 용쓰는 중이다.

 

월간 '수필문학'은 수필 쓰는 사람들에겐 가장 많이 지침서가 되어 주는 책이다.

입문서로 좋고 수필장르가 주는 편안하며 진솔한 메세지가

다른 월간서들 보다 읽을거리가 많다.

표지에 보이는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 잡지> 로 당연 손색이 없는 

월간지로서는 격이 있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문학의 3대 장르라고 할 때 '시, 소설, 희곡'을 말한다

그런데 이 세 장르는 얼핏 내용이나 형식상 유사성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어째서 함께 묶었을까? 그 이유는 장르를 좀더 확대하여 '4대 장르'또는

'5대 장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4대 장르라고 할 때 수필이, 그리고 5대 장르라고할 때에는

평론이 말해지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 사이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자.

 

먼저 문학의 3대 장르, 이 장르의 공통적 특성은 '허구성'의 발현이라 할 수가 있다.

소설이 허구라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요.

희곡도 형식만 다를뿐 소설적 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에 대한 논증은 생략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시'다.

시가 허구적 장르라는 말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도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야말로 허구 중의 허구로 이루어지는 장르일 것이다.

동의하기 힘들다면 다음의 예를 보자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소월의 진달래꽃이다.

그런데 이시는 분명히 허구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시인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따져보자.

시구 중의 '가실 때에는'의 '가실'에는 미래시형 'ㄹ'이 사용되어 있지를 않은가?

그렇다면 이 시는 현재 임과 이별을 하면서 그때의 심정을 읊은 시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이별('가실 때')을 상정하고(가정하고),

그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고 했다.

아직은 '역겨운' 상태가 아닌 것, 그런데 언젠가 '역겨워'내 곁을 떠날 때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한번 눙쳐보는 수작이다.

 

이렇게 눙쳐보는 수작을 부리는 임이 있다면

나도 한번 그런 눙을 쳐보고 싶다.

ㅎㅎ 재밌는 표현과 과감한 언어의 사용,  미문이다.

 

현재로서는 임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너무나 즐겁고 감격스러워 혹시라도

'역겨워 가실 때'까지 생각해 보면서, 그 때가 되어도 앙탈 부리지 않고

'고이 보내 드리겠다'고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듯한 언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만큼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니까

당신은 구구로 내곁에 계속 있어주어야 하겠다는 은근한 협박(?)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말 때문에 떠나고 싶은 생각 자체가  무화(無化)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님이 있다면 생각자체가 당연 무화되고 말것 같다.

그는 이미 어쩔수 없음을 표현했으니

나또한 그런 그를 보면서 이미 어쩔수 없어지는 것

그래서 아무것도 소용치 않은것

 함께하는 것 외에는..

 

게다가 '진달래꽃'지은이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서정적 자아는

분명히 여성으로 인식된다는 점도 소월시의 허구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는 근복적으로 허구적 장르요,

따라서 문학의 3대 장르는 모두가 허구적인 장르임에 틀림이 없다.

 

이에 비해 그 5대 장르에 들어가는 평론의 성격을 따져 보자,

평론은 분명 허구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다른 문학 장르 및 그 구체적 작품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일을 주 업무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가 어떤 세계를 내보여주는 문학의 장르가 아니라

다른 장르(때에 따라서는 같은 평론까지를 대상으로 하여)에 대한 평가가 그 주된 업무인 것이다.

평가에서 허구가 개입된다면 그것은 객관성을 생명으로 삼는 평가와는

한참 거리가 먼일이 되는 일이 아니가?

 

이제 수필이 처해 있는 4대  장르를 말할 때가 되었다.

3대 장르의 허구성과 5대 장르에서 언급되는 평론의 비허구성,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4대 장르에서 말해지는는 수필이라는 점은

수필의 장르적 성격을 아주 간명하고도 극명하게 밝혀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허구와 허구가 아닌 장르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수필, 그러니까 수필은

그 양쪽을 포괄할 수 있다는 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겠다.

혹자는 수필에는 허구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수필의 장르적 특성을 모르는 말일 수밖에 없다.

수필은 사실을 바탕에 두지만 허구를 수용할 수 있는 장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말이라는 뜻이다.

있는 얘기만을 써서는 사실기록으로만 그치기 때문에 흥미성이 약화될 수도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 허구성을 슬쩍 가미할 때

그  글은 저절로 재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앞서 인용했던 소월의 '진달래꽃'을 다음처럼 변형시켜 보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시는 님은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그 얼마나 멋없는 글인 것인가?

수필, 허구를 '부분적으로' 허용할 수 있어야지만 그 수필은 흥미성을 지니게 되고,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윤재천님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맺기로 한다.

 

'소설을 의식해 허구의 수용을 주저하고,

시와의 변별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참신한 묘사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배려에 지나지 않은다. 때로는 거짓이 진실보다 나을 때가 있다.'

 

이웅재- 재미없는 수필 이대로 둘 것이가? --부분  

 

 

이글은 재미없는 수필,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주제로 

 수필이 허구성을 수용해야 만 문학장르의 반열에서

더욱 더 든든한 입지를 가질 수 있다는 논단의 글이다.

 

이웅재 선생님이 소월 詩의 허구성을 파헤친 부분이 재미있어 올려 본다.

 예를 든 詩를 읽으면서 허구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깨달았다면 

속보이는 아부일지도 모르지만 좋았다.

이런 글을 만나면 참 반갑다.

 

책읽는 재미는 이런 거다.

 작가의 기질이나 역량,  진솔하고 성숙한 인격을 만나게 되는 반가움,

책은 보석찾기이며 행복찾기다.

손으로 만져지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을 채워주는 양식 같은..

그러고 보니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표어가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ㅎㅎㅎ.

 

아름다운 詩 한편을 읽고 나면 잔잔한 기쁨이 번진다.

시를 쓰는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다.

詩는 시인의 마음이며 사랑이 아닐까. 그러기에  맘껏 공감하는  시를 읽는 일이란 행복이다.

소월 시가, 소월이 쓴게 아니라 소월의 임이 쓴것 같고 

어느 시인의 사랑시가 내마음인 것 같고, 내 님의 마음인것 같다면

내가 깨어있고 내 감성이 그래도 무디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일은, 공감이 가는 시를 읽은 일은 행복한 일이다.

 

이 아침 시가 좋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내 마음이 환해진다.

때로는 거짓이 진실보다 낫다는 말은  

허구가 가진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수필이야기 하다가  시 때문에 또 삼천포로 빠졌다.

결론은 수필도 허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