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노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깨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지성을 제대로 움직이게 할 만큼 깨어 있는 사람은 백만 명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하다.
시와 같은 인생, 신성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1억 명에 한 사람 있을 정도 일 것이다.
깨어 있는 것이야말로 진짜로 살아 있는 것일 텐데.
나는 예나 지금이나 진정으로 깨어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하물며 그러한 사람의 얼굴을 직접 눈으로 보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의식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생을 끌어올릴 능력을 갖춘 존재라는 사실처럼
우리를 고취시키는 일도 없다.
무엇인가 특정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상을 만들어 아름다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도 확실히 훌륭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분위기나 매체 그 자체를 조각하거나
그리는 일은 더욱 훌륭하다.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의 덕성이다.
그날 하루의 생활을 질적으로 높이는 일이야 말로 바로 최고의 예술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활에서 세부적인 부분까지 자기 정신이
가장 고양되고 잘 닦여진 순간을 관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런 사소한 교훈을 거부하거나 싫증 낸다면
신의 계시가 그러한 삶의 방식을 확실하게 알려줄 것이다.
내가 숲으로 간 이유는 사려 갚은 삶을 살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에만 직면하고,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과연 배울 수 있는지 확인하고싶었기 때문이다.
죽을 때가 되어서 자신이 진정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통곡하는 꼴이 되고 싶지 않았고, 인생이라 부를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산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일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깊이 살아서 인생의 정수를 남김없이 쭉 빨아들이고 싶었고,
스파르타인처럼 씩씩하게 살면서 인생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죄다 파멸시키고,
폭 넓게 인생의 뿌리까지 잡아 뽑으며 생활을 구석구석 뒤쫒고 밑바닥까지 바짝 다가서고 싶었다.
설령 인생이 별 볼일 없음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 진정한 별 볼일 없음을 완전히 손에 넣어 세상에 알리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또 만약 인생이 엄숙한 것이라면 몸소 그것을 체험하고,
다음 여행기에 있는 그대로를 기록할 생각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 월든- 살았던 곳과 그 목적 부분
엷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뒤에 호수 저편이 아련해지는 혼화한 9월의 오후,
호수 동쪽 끝에 있는 완만한 모래사장에 서면
'거울과 같은 수면'이라는 표현을 실감할 수 있다.
고개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엿보면 수면은 계곡에 걸쳐진 한 줄기 가느다란 거미줄처럼 보이고,
그것이 먼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반짝이면서 대기층과 물을 반으로 가르고 있다.
그렇게 보고 있노라면 젖지 않고 호수 저편 언덕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수면을 스쳐 나는 제비도 그 위에서 날개를 쉬어 가지 않을까.
사실 제비는 무심코 선 아래로 숨어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착각을 깨닫는 것이다.
햇빛의 온기가 참으로 고맙게 느껴지는 쾌청한 가을날,
약간 높은 언덕의 그루터기에 걸터 앉아 호수를 내려다보면서 수면에 비치는 하늘이나,
나무들 사이로 잔잔히 이어지는 파문을 보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파문마저 없다면 수면이라고 상상이나 할까)
화병의 물을 흔들면 떨리는 파문이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다시 고요해지듯이,
이 넓디 넓은 수면에서는 어떤 소동이 일어나도 곧바로 진정되고 만다.
수면위로 한 마리 물고기가 뛰어오르고 한 마리 곤충이 떨어져도
그것이 마치 샘의 끊임없는 용출,
그 생명의 부드러운 맥동,
그 가슴의 고동처럼 원을 그리는 아름다운 곡선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환희의 전율과 고통의 떨림은 구별할 수가 없다.
이 호수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얼마나 평화에 가득 차 있는지,
덕분에 인간의 행위까지도 봄을 만난 것 처럼 빛이 나고 있다.
그렇다 , 온갖 나뭇잎이나 작은 가지들,
조약돌이나 거미줄이 지금 이 환한 대낮에 마치 봄의 아침이슬을 흠뻑 머금은 듯이
빛나고 있지 않은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다.
9월과 10월에 이러한 날이 돌아오면 월든은
진기한 보석으로 둘레를 장식한 찬란한 숲의 거울이 된다.
호수처럼 크고 아름답고 순수한 것이 이 지상에 또 있을까.
하늘의 샘물, 그곳엔 울타리가 필요없다.
수많은 민족이 왔다가 사라져갔지만 결코 호수를 더럽히는 법은 업다.
그것은 돌을 던져도 부서지지 않고 뒷면의 수은도 벗겨지지 않는,
자연의 손길이 끊임없이 금박을 손보아 주는 한장의 거울이다.
세찬 바람도 모래 먼지도 신선한 그 표면을 그늘지게 할 수는 없다.
거울에 들러 붙으려는 온갖 불순물은
아지랑이-이것이야말로 윤을 내는 빛의 솔이라 할 수 있으니-에 닦여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 앉고 만다. 거울은 숨결을 토해내도 김이 서리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토해 내는 숨결이 높이 올라 구름이 되어
그 조용한 가슴속에 비추이고 있다.
넓은 호수는 대기 속을 떠다니는 정령의 존재를 밝혀준다.
그것은 위로부터 끝도없이 새로운 생명과 활력을 얻고 있다.
호수는 대지와 하늘의 중간 성격을 띤다. 지상에서는 풀과 나무만이 흔들이지만,
여기에서는 호수 전체가 바람에 따라 물결을 일으킨다.
빛의 줄기나 광채를 보면 바람이 어디를 건너가는지 알 수 있다.
수면을 내려다본다는 건 참으로 신비한 경험이다.
--
한 줄의 시를 장식하기 위해
꿈을 꾼 것은 아니다.
월든 호수에 살고 있으면
천국에, 그리고 신의 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니,
나는 자갈이 구르는 호숫가,
혹은 물 위를 스쳐 지나는 산들바람,
나의 손바닥 안에는
윌든의 물과 모래가 ,
내 사상의 높은 곳에는
그심오한 안식처가 있다.
호수는 숲 속의 은자와도 같이 소박하고 엄준한 참을성을
오래오래 지켜감으로써 비로소 이러한 순수함을 얻었을 것이니.....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호수 부분
소로는 2년 2개월 동안 <월든>호수를 배경으로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집필에 전념,
월든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소로의 오두막에 다녀온 법정스님의 글을 읽고 궁금했던 책이었건만 게으름이 병이다.
좋은 작품을 흐린 집중력으로 읽다가 덮어두고, 읽다가 덮어두고 며칠을 지냈다.
월든! 제대로 소화를 못한 책이지만 '호수'예찬 부분이 정겨운 아침이다.
'책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을 얻는 기술 - 레일 라운즈 (0) | 2009.09.22 |
---|---|
수필문학(허구성 수용을 위한 수필의 장르론적 반성) (0) | 2009.09.10 |
산중일기 - 최인호 선답 에세이 (0) | 2009.08.21 |
설렘 - 우리 시대 대표 소설가들의 리얼 러브스토리 (0) | 2009.08.14 |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 공지영 에세이 (0) | 2009.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