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산중일기 - 최인호 선답 에세이

구름뜰 2009. 8. 21. 11:30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더 가까워진다.

눈에서 멀어진다고  해서 마음도 멀어지는 것은 참사랑이 아니다.

참사랑이라면 눈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은 그 만큼 더 가까워져야 할 것이다.

눈에서 멀어졌다고 마음까지 멀어지는 것은 참우정이 아니다.

참우정이라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그 만큼 더 가까워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산중일기 -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더 가까워지는 법이다.- 부분

 

 

'참사랑, 참우정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더 가까워지는 것'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마음으로 볼 때라야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 

세상 많고 많은 사람중에 다들 비슷 비슷한 모습으로들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으로 맺어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은 그것이 우정이든 사랑이든

그 참됨에는 거리도 만남도 중요하지 않다.

 

존재자체로 반가운 사람이 분명 있다. 

그런 이가 있다는 것, 그것을 서로가 알아본다는 것은 축복이다.

내 마음으로 그(or그녀)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도 나도 자유로워서 

성숙한 영혼만이 품을 수 있는 이 참됨은 하늘이 주는 선물같은 것 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서로의 인격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아닐까. 

 

말수도 적고 무뚝뚝해서 얼핏 보면 차갑게 보이는 친구가 있다.

그렇지만 그녀의 속은 여리고 보드라워서

그 말랑말랑함이 잘 익은 복숭아 맛보다 더 달콤한 친구다.

어느날 문득 그녀가 그랬다.

우리가 만난 것은 수많은 사람중에 서로를 알아보는 것 같은 것이라고.

하늘에  수 많은 별 중에 나만의 별을 가지는 것과 같다고...

 

캬~아! 

역시 나보다는 어른스런 그녀가 내게 ' 별' 이야기를 했을 때

친구도 이미 내 별이 되어 있었노라고 나는 맘껏 애정표현!을 했다.

비오는 날이나,  누군가 사람이 그리운날, 

함께 차를 마시며 맛있는 수다를 나누고 싶은날

지란지교의 그녀에게 달려갈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내게 에너지 충전이 필요할 때면 충전소가 되어주는 친구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소중한 별'이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별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중에 그 별하나를 쳐다본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만나랴

 

친구의 별이야기를 듣다가  김광섭의  <저녁에>라는 詩가 문득 떠 올랐다.

    살아가면서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

그리고 그 별을 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은밀하고 행복한 일 인가!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어느 것 하나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없다.

나쁜 말 한마디도 그대로 사라지는 법 없이 어디론가 날아가

어디엔가 씨앗으로 떨어져 나쁜 결과를 맺으며,

좋은 인연도 그대로 사라지는 법 없이 어디엔가 씨앗으로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작품이 만들어준 두개의 인연 - 부분

 

 

인연! 

어느것 하나도 그저 일어나는 것이 없는 우리의 삶!

매순간 인연속에 살고 있으며 인연을 만들어 가는 삶,

 

 

 

지난 일월 말, 날씨가 따뜻한 토요일이었다.

주말은 평소보다 등산객이 많아 자연 등산로는 사람들로 붐비기 마련인데.

매봉을 올라 정상에서 하산하여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내 눈에

한 무리의 등산객 모습이 들어왔다.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차려입은 남녀 한 무리의 등산객이었다.

막연히 무슨 등산회에서 회원들끼리 친목 삼아 산행을 나선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엇다. 어딘지 부자연 스럽고 행동이 어색하였다.

흥미를 느낀 나는 그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 순가 나는 그들이 시각 장애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은 한결같이 멋진 등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흔히 길거리에서 보는 길잡이를 앞세워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런 남루한 모습의 장님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멋진 모자와 멋진 등산복을 차려입고 있었으며 거침이 없었다.

한 사람은 큰 소리로 야호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고,

약수터에서 더듬거림 없이 차가운 약수를 서로 나눠 마시기도 하였다.

나는 몹시 흥미가 있었다. 줄 잡아 30여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시각 장애 등산객들.

그 중에 대여섯 명은 그들을 위해 도와주는 봉사자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기 위해서 저렇게 산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저 눈 덮인 계곡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저 나무도 숲도 산정 아래도 펼쳐지는 서울의 원경도 눈으로 바랄볼 수 없다.

 

순간 나는 언젠가 들었던 한 가지 이야기를 떠올렸다.

LA에 살고 있는 K군은 여행객을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로 학비를 충당하곤 했는데,

어느 날 그는 새로운 단체 여행객을 안내 하기 위해서 공항으로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손님들이 모두 시각 장애인들이었다. 

그런데 놀란 K군에게 그 여행객의 수장인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절대로 우리를 장님으로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요. 보통 사람들에게 하듯 있는 그대로 우리를 안내  

   해 주십시요."

K군은 버스에 타자마자 여행객들에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평소처럼 안내할까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벌떡 일어나서 마이크를 들고 방송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저 푸른 바다는 태평양입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저 산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할리우드입니다. 언덕 위에 쓰인 영자 간판이 보이시죠? 할리우드. 그렇습니다. 저곳은 저 유명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의 본고장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K군의 안내대로 차장의 오른쪽을 , 차창의 왼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손가락질하면서 차창밖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때의 충격을 K군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때 그들이 장님이 아니라 장님을 일부러 흉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태평양의 푸른 바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의 여행을 끝내고 헤어질 무렵,

장님 여행객들 모두가 다가와서 K군과 악수를 나누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덕분에 정말 좋은 관광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루하루가 사막인 날들에 대하여 - 부분

 

 

어찌보면 우리는 대상을 내 관점으로, 내가 보고 싶은 것들만 보기때문에 

대상의 진면목을 못보는지도 모른다.

장님 여행객들에게 K군의 안내는 차별을 두지 않았기에 

 "선생님 덕분에 정말 좋은 관광을 했습니다"라는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편견이 그분들에겐 더 큰 장애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내 편견이 내 뜻과는 상관없이

 상대에겐 상처가 될 수 있음도 짐작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게 와 닿는 일이 내 의도와 달라졌을 때

혹시 내게 잘못이나 실수가 없었는지 한번 더 돌아볼 일이다.

물론, 나도 잘 안되는 부분이라서 엄청 용쓰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부분 이런 문제들은 생각이 짧았거나 마음의 여유 없음으로 인한 문제들이다.

마음의 여유는 그 사람 품성의 여유인 것 같은데

나는 아직도 그것이 잘 안된다.

이것이다 싶으면 바로 실행하는 편이라서 천천히 조금더 여유롭게가 잘 안된다.

그래서 그런 융통성 부재로 인해서 고집이 세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고집은 어찌보면 융통성 부재다.

 

 

 

우리는 모두 눈으로 사물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쩌면 모두 눈 뜬 장님들 인지도  모른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다, 마음의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면 눈은 감고 있어도 좋다 - 부분

 

 

마음의 눈은 상대에 대한 마음과 관심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이를 먹어 갈수록 더 몸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그건 몸을 방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몸으로 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어서이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하는 건 육체의 헐벗음이 아니라 영혼이 메말라 가는 일이다.

육신은 영혼을 그리워하고

영혼은 끊임없이 육신을 찾아 떠도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육신은 영혼을 그리워하고 영혼은 육신을 찾다 떠돈다 - 부분

 

영혼의 메마름!

육신은 영혼을 그리워하고 영혼은 육신을 찾아 떠돈다

 

이 세상을 사바세계(참고 견디어야 하는 세계)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세상살이가 마음먹은 대로 잘 굴러간다면 

인간은 또 얼마나 안이해지며 타락하기 쉬울까.

물론 쉽게 쉽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리 가치있는 삶은 아닐터이다.

인간은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기본 적인 욕망이 있고

 그 가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는게 아닐까.

그래서  참고 견딜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인간은 더욱 성숙해지고 삶의 묘미를 알아가며 더욱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너무나 좋은 풍경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 공연히 눈물이 나온다.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두려워서 죄지은 사람처럼

빨리빨리 도망쳐 나오기도 한다. 그들은 그곳에 있다.

우리가 이속에서 싸우고 증오하고 죽이고, 악수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그곳에 있다.

어느 절, 어느 풍경, 어느 나무, 어느 돌들도 신화의 이야기에서 출발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가 바람에 잠시 일어났다 눕는 풀처럼 짧은 목숨에 아우성치고 있는 동안에도,

그곳엔 천 년 전부터의 바람이 불고 있고, 천 년 전의 물이 계곡을 타고 흘러 내려오고 있다.

 

물속에 발을 담그고 아무 돌이나 집어 보아라.

물에 젖은 돌에 새겨져 있는 천년의 신화를 읽을 수 있다.

잠시 숲에 가 보아라. 길이 없으면 칼날과 같은 풀을 밟고 길을 만들어 가 보아라.

그곳엔 바람이 있다.

신라 천 년의 바람이 아직까지 불어오고 있다.

백제 천 년의 바람이 아직도 불어오고 있다.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바람에 불려 떨어지는 나뭇잎 한 조각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무엇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감히 누구의 눈을 빌려 타인의 죄를 보고,

우리가 감히 누구의 입을 빌려 그것을 범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초개에도 미치치 못한다.

우리가 세속의 질곡에 갇혀 작은 것 하나 더 쥐려고 아우성거리고 있는 동안에

천 년 내내 불어오는 바람이 사찰의 풍경 소리를 흔들고 간다.

 사찰에 부는 천년의 바람 - 부분

 

절은 절마다의 풍경을 지니고 있다.

어느 산, 어느 나무, 어느 돌 하나 같은 게 있으련마는 절은 이상하게도 어느 산,

어느 숲을 배경으로 숨어 있어도 절만이 가진 유일한 풍경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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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가면 마음이 맑게 씻어 진다.

그 어려운 먼 길 뒤에 찾아간 절에서도 스님은 보려야 볼 수도 없다.

무엇이 부끄러운지 숨바꼭질 하듯 꼬옥꼬옥 숨어서 기침 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마음대로 보려면 보시오' 하고 절 문도 활짝 열어 놓고 대웅전도 활짝 열려져 있고

마당 뜨락엔 피 토하듯 붉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건만,

정작 스님들은 그 넓은 절 어디엔가 꼬옥꼬옥 숨어들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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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모두 알아서 하라는 듯 부처님은 연신 웃고만 있다.

울든지 웃든지 술을 마시든지. 실례되는 비유이지만 법당에 오줌을 싸든지 그저

네가 네 맘대로 알아서 하라는 듯 부처님은 웃고만 있고 스님들은 행방불명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얼굴은 할아버지 보다 더 인자하게 보인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마음먹기에 따라 사물이 달라 보이고, 삶이 달라지고, 생의 희망은 거듭

다시 우리를 찾아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스님들이 행방불명된 고즈넉한 사원의 뜰에 앉아 인자한 할아버지의 미소를 띠고

그저 바람에 풀잎이 흔들리는 걸 바라보고 있는 부처님의 눈빛에 오래 눈을 맞추다

어둑해질 무렵 총총히 산문을 나섰다.

절은 절만의 풍경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절만의 풍경속으로 세속에 지친 우리가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도록..

절은 절마다의 풍경과 함께 늙어간다 - 부분

 

 

처음으로 <절>에 가게 된 인연은 대구 봉덕동 서봉사 수요법회였다.

장 선배언니가  어느날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따라나선 것이 불교와의 인연이 되었다.

 

어둠이 막 내리기 시작하는 어스름 저녁 무렵이었다.

지금도 또렷이 생각나는 서봉사 풍경은 호흡소리마저도 신경쓰야 할 만큼 고요했다.

대웅전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삼배라는 것을 배웠고,.

 처음 본 부처님(불상)은 금빛 불상이 너무 크다는 것과

 그리 친근감이 들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서봉사는 대웅전 앞을 지나 좌측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가면 지하공간에 법당이 있었는데

 법당엘 들어섰을 때 7-80 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있었고 찬불가가 불려지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것은 청법가(법문을 청하는 노래) 였는데

법사스님이 단상에 서시면 청년 불자들이 모두 일어서서 합장을 하고 청법가를 불렀는데

그 의식(서로 마주선 상태에서 노래하는 )이 너무 독특해서 조금 멋쩍을 정도였다.

 

법사스님은 서봉사에 상주하고 계신 스님이 아니셨고 청년회법회를 위해

수요일마다 서봉사로 오시는 스님이셨다.

그날 강의는 <초발심자경문> 강의 중 연기법(인연생기)에 관한 강의였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하나의 존재는 홀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관계지어져 있다는 것

세상 모든 일이 어떤 절대자가 창조 해  놓은 것도 아니며

자체의 힘만으로 있는 것도 아니며 

인과 연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하여 결과를 이룬다는 것,

그리고 영원한 존재는 없기 때문(무상)에

어디에도 집착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그런 법문이었다.

 

그 법문는 내게 '바로 이것 이구나!' 하는 느낌으로 확  와 닿았고 

듣자 마자 이해하게 된 그 인연법은 지금생각해도

내 삶의 나침반 역할을 해준 이론이 되었다.

 

 지금 내 모습이 내가 만든(업)것이며

또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내일의 내 인이 되기도 하지만,

과거 나의 연이기도 하다는 것.  그래서  어떤 상황이든,

내가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내 상황은 내가 만든 것이라는 것.

그래서 오지 않은 미래의 화나 복을 늘일 수도 줄일수도 있으므로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어 내가 만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를 성찰 할 수 있게끔 해준

 연기법 강의는 내게 긍정과 희망의 메세지를 주는 이론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 와서 살면서 이런 것이 있음을 알고 있어야 겠구나.

삶이 이런 것이었구나. 

살아가는 일에 대한 답,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며

 늘 개운치 않았던 물음 들이 연기법으로 이해가 되었고

 '불경(불교교리)속에 내가 모르고 살아왔던 지혜의 등불 같은 것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초발심자가 되었다.

몰라서 답답했던 마음이 걷힌건 아니지만, 밝음이 어떤 것이라고 느껴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스님은 공부하신 것(불법)을 쉽게 풀어서 청년 불자들의 수준에 맞게 알려주셨는데

그 법문은 미혹한 내겐 등불 같았고,  나는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불교 교리를 접했다.

그 시절 그 기쁨 그 반가움이 얼마나 컸는지

 웬만한 불교 서적들 특히 초심자들을 위한 교리 안내서 같은 것들을 틈나는 대로 읽었다.

 그 시절 불교서적은 내게 새로운 인생관 정립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스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그날,

또 그 연기법 강의까지. 내게 준 알음에 대한 반가움 

그리고 그 스님의 맑고 투명한 얼굴빛까지 

 친견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그런 모습, 

'스님들은 다 저란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맑고 정적인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내가 처음 보게 되어 더욱 인상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로 많은 스님들을 만나 뵈었고 법문을 들었지만 

그 스님처럼 그렇게 가슴을 울리며 설법해 주시는 스님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 스님과의 연기법 강의를 들을수 있었던 것도

시절인연이 도래해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세상을  좀 더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해준

그 반가운 인연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각설하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삶에 대한 만족도(행복수치)가 높은 것은

대부분 이런 연기법에 기인한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정신세계는 풍요로우며 긍적적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침묵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침묵보다 말을 하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깊은 산속에 숨어 있는 것보다 사람들 속에서

함께 어울리되 물들지 않음이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깊은 산속에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이 번잡하다면 그는 비록 산속에 있으나 

실은 장터에 앉아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침묵 수행이란 단순히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가득 한 말을 비우는 일이다.

아무런 욕망의 말도 남겨 두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마음의 무엇인가를 무작정 비우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채워서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침묵을 채워 마음을 비우는 일 - 부분

 

 

 

 

'말과 침묵'이라는 법정 스님의 책이 있다.

스님은 책머리에서

<침묵을 배경으로 한 귀한 말씀을 듣고 싶어 불타 석가모니의 설법과

조사들의 어록을 읽으면서 그때 그때 메모해 두었던 것을 정리하여

책을 엮은 것이 이 말과 침묵이다.

내 눈으로 읽어서 확인하고 가려서 뽑은 말들이므로 얼마쯤 주관적인 경항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70년대에 불교성전을 편찬했던 경험을 살려 작은 지면이지만

불교사상의 핵심을 잡으려고 생각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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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침묵은 하나의 틀을 이룬다.

뜻을 담은 말은 침묵을 배경으로 발음 될 수 있고,

말끝에 오는 침묵은 새로운 뜻을 담은 말을 잉태한다.

음과 음 사이에 침묵이 깔리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이루어질 수 없듯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이 말과 침묵의 의미를 거듭 다져서

온갖 소음에 매몰되어 시들어가는 인간의 뜰을 다시 소생시키기를 빈다.>

 

1982년에 출간한 책인데 역시 그 시절에  접한 책이다.

책속에는 숫타니파아타나 법구경, 금강경 등

여러  경전들의 글을 인용하여 불자들이 불교교리를 실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며 살아야 하는지,

스님말씀처럼 불교사상의 핵심들을 안내한 책이다.

지금도 출간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스님 책중에 '말과 침묵'은 '무소유'와 함게 가장 인상깊은 책이었다.

 

 

 

나는 나무 잎사귀 하나라도 의미 없이는 뜯지 않는다.

한 오리의 들꽃도 꺽지 않는다.

벌레도 밟지 않도록 조심한다.

여름 밤 램프 밑에서 일할 때,

많은 날벌레들이 날개가 타서 책상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창문을 닫고 무더운 공기를 호흡한다.

 법정 - 말과 침묵 - 고기는 내 부모의 살 -  부분 

 

불일암 전경 

 

우정에 관해 우리가 이야기할 때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곳에 우정은 존재한다.

또한 우정은 반드시 선 속에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악한 사람들 속에서도 우정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이익이라도 얻을 수 있을 때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서로가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우정을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좋은 친구를 얻기 위해서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내가 먼저 사랑을 베푸는 좋은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벗을 사귀고 또한 남에게 봉사한다.

오늘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은 그런 벗은 만나기 어렵다.

자신의 이익만을 아는 사람은 추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네가 평생을 통해 단 한사람의 친구를 사귈 수 있다면

네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산중일기- 최인호-

  

 

 내겐 자주 만나지 못하는 별도 있다.

  만나지 못해도 그 본향이 한결같아서 

그 마음이 짐작되고 느껴지며 내 마음같은 사람.

세월이 흘렀어도 시간이 아무리 지났어도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사람 

삶의 든든한 응원군 같은 별, 그런 별이 둘이나 더 있다.

한 분은 나를 절에 데리고 갔던 그 직장선배 언니이고,

또 한분은 그 언니를 통해서 알게 된 청년회 법회 회원이었던 언니의 친구다.

 

 언니 친구분이 나와 한동네 살고 있는 것을 알고 귀가길에 함께 하게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부모님들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다.

역시 나보다는 10살이나 많았지만 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우리 둘은 하늘의 별처럼 꼬박 밤을 밝히며 이야기 하고 싶을 만큼 잘 통했다.

오다 보면 우리집이 먼저 나왔는데, 집앞까지 와서도  얘기가 끝나지 않아서

집 앞에서 얘기를 하다가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헤어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얘기란 것이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었고, 여러 살아가는 이야기,

 그 나이쯤에 생기는 의문이나 고민등 뚜렷한 주제도 없었지만 그렇게 죽이 잘 맞았다.

어쩌면 내가 어렸으니까 그 언니가 내게 조력자 역할을 잘 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오래 있어도 지루 한 줄을 몰랐고,

증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그런 시간들이었다.

그 즈음, 언니는 내게 떠날것을 염두에 둔 사람처럼 "나는 갈 곳이 따로 있다"는

말을  자주 했었는데  그것이 '출가'를 염두에 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었지만

언니가 그렇게 어느날 훌쩍 떠날 줄은 몰랐고 그렇게 우리는 한 동안 만날 수 없었다.

 

지금 그 언니는 비구니스님이 되어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진 모습이다.

 가끔,  아주 가끔씩 구미에 오면 제일 먼저 내게 전화를 한다.

스님의 지인이 작은 찻집과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언제든 그곳으로 오시고

도착하면 내게  바로 전화를 하는 것이다.

  5년만에 만나기도 하고 3년만 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만날 때마다

그때 그시절 처럼, 어젯밤 늦도록  얘기 하고 헤어진 사람처럼

그렇게 시공을 초월한 반가움과 정겨움을 느낀다.

지금은 그 때처럼 하고 싶은 말 하는 것보다, 얼굴 마주보는 일이 더 좋고,

그냥 손 잡고 함께 있는 공간을 가지는 것으로도 좋을 만큼 함께 있는시간이 많지 않지만

만나서 좋은 그 마음에는 하나도 변함이 없다.

만날 때는 그렇게 만나서 반갑고,  못만나도 서로 잘 지내는 것으로도 좋은

세월의 무상함을 전혀 못느끼게 해주는 그런 소중한 별이다.

 

그런 별들과의 만남은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수다스럽지 않아서 좋고,  그 마음이 내 마음같아서 좋다.

언제나 한결 같아서 편안하고 내 마음처럼 비춰지는 상대에 대한 신뢰감,

만남이 주는 기쁨도 크지만  그들이 내 안에서 나 만의  별로 있다는 것

그 별들의 존재자체가 내게는 행복인 것이다.

  

 

 

진실로 살다 가는 것이 진리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의미이다.

삶은 진리가 아니라 진실속에서 살다 가는 것이다 - 부분

 

소 치는 사람이 채찍으로 소를 몰아 목장으로 돌아간다네

늙음과 죽음도 또한 그러하네

사람의 목숨을 끊임없이 몰고 가네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끝이 없이 타고 있는데

그대들은 어둠 속에 덮여 있구나

그런데도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

 

죽음에 둘러싸인 삶 속에서 우리의 등불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하겠는가

죽음은 곁에 있고 등불은 아직 먼 곳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어저면 등불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보다 더 환한 무엇이 우리의 삶 속에 있다.

우리의 사랑 속에 있다.

산중일기-죽음보다 더 강한 등불 - 부분

 

남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받은 사람으로 부터 되갚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복덕을 지은 것이다.

남에게 자비를 메푼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셈이다.

따라서 남에게 베푼 자비는 베푼 순간 잊어버려야 한다.

심지어 부모들도 자기 아이를 키운 은혜를 잊어야 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집착은 가족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남에게 베푼 보시에 집착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남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보이지 않는 이웃으로부터 베풀어지는 은총이 살아 있는 현장이다.

주위의 보살핌과 이웃의 은덕이 없다면 우리는 단 한 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일이다.

남에게 베푸는 자비가 결국 자기에게 베푸는 자비이며

남에게 고마워하는 감사의 마음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고마워하는

애기(愛己)의 정신을 기르는 것이다.

산중일기 -  2008년 4월에 초판 발행

 

 

벗나무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그 속엔 벚꽃이 없네.

그러나 보라. 봄이 되면

얼마나 많은

벚꽃이 피는가.

산중일기 -  벚나무 가지엔 벚꽃이 살지 않는다 - 부분

 

종교는 어쩌면 봄 같은 것이 아닐까.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피우고자 하는 것이 꽃이라면

장미는 장미꽃을 피울테고 개나리 진달래는 또 그만의 꽃을 피우는 것처럼,

봄은 만물을 소생케하는 에너지 원이지만,

그 것 자체로 그들만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러므로 종교는 봄 같은 것이 아닐까!

 

 

산중일기는 작가 최인호씨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일상과 삶의 고백을 담은 산문집이다.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늘 승려들과 교우하며 불경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사람

이 글들은 최인호의 전 생애가 담긴 일기이며 삶이라는 가장 숭고한 종교에 바치는 찬가이다.

-책 말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