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고미숙

구름뜰 2010. 4. 29. 08:13

 

 

연암은 서재에 앉아 머리로 사유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길이 글이었고, 삶이 곧 여행이었다. 연암이 지나갈 때마다 중원천지에서 침묵하고 있던 단어들이, 문장들이, 그리고 이야기들이 잠에서 깨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연암은 그것들을 무심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절단, 채취'했다, 걸으면서 쓰고, 쓰기 위해서 다시 걸었던 연암. 그리고 그의 분신이기도 한 <열하일기>. 나는 두번의 여행을 통해 책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열하일기>를 만난 셈이다. 그런 까닭에 내게 있어 <열하일기>는 여전히 가슴벅찬 설렘의 대상이다.

개정판을 내며 -중에서

 

 누군가 내게 대체 왜 이 책을 썼나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작정이다. 연암이 얼마나 '유머의 천재'인지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열하일기>의 웃음을 사방에 전염시키고 싶었다고 그 웃음의 물결이 삶과 사유에 무르녹아 얼마나 열정적인 무늬들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노라고..

책머리에- 중에서  

 

유목은 단순한 편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랑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면서도 머무르는 것이고. 떠돌아다니면서 들러붙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교감하지만, 결코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열하일기>는 바로 유목적 텍스트다. 그것은 여행의 기록이지만, 거기에 담긴 것은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찐한' 접속이고, 침묵하고 있던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견의 현장이며, 새로운 담론이 펼쳐지는 경이의 장이다.

주체도, 대상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강렬한 흐름만이 범람하는 광야 혹은 평원, 게다가 그것이 만들어내는 화음의 다채로움은 또 어떤가. 때론 더할 나위 없이 경쾌한가 하면, 때론 장중하고, 또 때론 한없이 애수에 젖어들게 하는, 말하자면 멜로디의 수많은 변주가 일어나는 텍스트, 그것이 <열하일기>다.

 따라서 열하일기는 일회적이고 분석적인 독서를 허용하지 않은다. 그것은 읽을 때마다 계속 다른 장을 펼쳐보인다. 계속 다르게 사유하도록 독자들을 부추긴다. 그래서 열하일기를 읽을 때마다 내 지적 편력기에는 계속 새로운 이정표들이 그려진다. 나도 이제 편력이 아니라 유목을 하고 싶다. 내 글쓰기도 유목적 지도가 되었으면! 삶과 지식의 경계가 사라져,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노마드(ndmad)가 되기를! 어느덧 내 욕망의 배치는 이렇게 바뀌고 말았다. <열하일기>가 준 가장 큰 선물! 

프롤로그- 여행, 편력 유목 중에서

 

열하일기가 파노라마식 여행기와 다른점은 여행이라는 장을

전혀 다른 배치로 바꾸어 그 안에서 삶과 사유,  말과 행동이 종횡무진 흘러다니게 한다는 점이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라는 책으로 고미숙을 만나고 이번 '열하일기'는 두번째로 접한 책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쓴 작가들이 많지만 고미숙이라는 가교를 통해서 박지원을 만나고 싶었다.

내 능력으로는 해독 불가능!한 고서를 이렇게라도 접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이 책은 열하일기 원문 해석된 글이 단락마다 따로 배치되어 있어서 원전 텍스트의 이해를 도와준다.

 

 

 개정판을 내며, 책머리에,  프롤로그, 등을 통해  열하일기를 읽기 전에 

고미숙이 본 열하의 분위기를 다각도로  표현해 놓아 대체 어떤 내용이 전개될까 읽을수록 궁금해진다.

 쉬운 책은 아니지만, 한번 읽고 두번 읽을수록 맛이 느껴지는 책이다.

고미숙처럼 열하일기의 매력속으로  풍덩 빠져보진 못했지만,

두고두고 틈나는 대로 읽고 또 읽어도 좋은 책인것 같다. 

 

삼월초에 구입해서 읽다가 학과 공부하느라 미뤄두었었는데

시험도 끝났고 다시 보니 역시나 한 달 전 보다는 이해도 쉽고 더 맛이 좋다.

 

아직 열하일기를 접해 보지 못한 분들중에 대체 어떤 책인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이 서평이 열하를 느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되도록 책에 실린 글을 많이 올리고자 한다.

책 내용처럼,  고미숙이 본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주축이 될 것 같고,

 어느부분을 올리면 이해를 도울까 생각하면서 방대한 내용중에 몇가지 내 눈에 띈 사례들만을 택했다.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궁금하신 분들이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한번 읽어보기를

 읽기전에 작가가 식전행사처럼, 간단하게 목차를 두어서 시대적 분위기를 안내해 놓았다.

그 목차는 이렇다.

 

1, 사건스케치

2 문체와 국가 정치

3 대체 소품문이 뭐길래

4, 연암체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재밌을 테고, 관심 없는 분들은 지루 할 수도 있습니다. 역량껏 즐기시기를..  

 

 

1, 사건 스케치

 1792년 정조는 동지정사 박종악과 대사성 김방행을 궁으로 불러들인다. 중국 서적 금지령을 강화하는 정책을 공표하기 위해서다. 패관잡기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까지 모두 수입금지 조처가 내려진다. 문체반정의 서곡이 울린것이다.

 패관잡기란 '시중에 떠도는 까끄라기 같은 글' 이란 뜻으로, 소설, 소품, 기타 잡다한 에세이류가 거기에 해당된다. 요즘으로 치면 베스트셀러 목록을 장식하는 글들에 해당되는데, 당시에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럼 패관잡기는 그렇다치고, 경전과 역사서는 무슨 죄가 있다고? 그건 사대부들이 일생 연마해야 할 지식의 보고 아닌가? 그 명분이 참 희한하다. 중국판은 종이가 얇고 글씨가 작아 누워서 보기에 편하기 때문이라는 것. 성인의 말씀과 역사에 대한 기념비적 기록들을 감히 누워서 보다니! 말하자면 이 경우엔 내용이 아니라, '북 스타일'이 문제가 된 것이다. 두 케이스를 종합하면 정조의 문장관이 한눈에 집약된다. '클래식'에 속하는 책을 엄숙한 자세로 읽으라, 그러다 보면 저절로 그런 스타일의 글이 써질 것이라는 것, 독서와 문체란 이렇듯, 신체의 규율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정조만이 아니라, 중세적 지식체계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전제이기도 하다. --

--문체반정의 총 지휘자 정조는 서적 수입금지를 강경하게 몰아붙이는 한편, 과거시험을 포함하여 사대부 계층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을 실시한다.

 

 성균관의 시험 답안지에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전편이 아무리 주옥 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해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문체반정이 피튀기는 전쟁은 아니었으나, 그 파장은 가혹했다. 정조시대 이후 새로운 문체적 실험이 완전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는 지성사적 측면에선 암흑기라 해도 좋을 정도로 황량하기 그지없다. 피를 흘리지도, 경제적 제제를 가하지도 않았건만 지식인들은 자기검열을 통해 스스로를 길들여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 연암은 이 사건의 어디쯤에 있엇던가? 그는 당시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지도 않았고, 이후에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엇다. 그런데도 핵심배후로 지목되었다. 어떻게 그럴수가? 그 미스터리에 접근하기 전에 체크해 두어야 할 것 두서너 가지가 있다.

사건스케치 중에서

 

 

2 문체와 국가 정치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반정, 그리고 문체반정 조선사를 장식하는 반정은 이 세가지가 전부다. 물론 앞의 두가지와 나머지 하나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유혈의 쿠테타와 무혈의 문화혁명이라는 점 말고도 중존반정이나 인종반정은 권력밖의 집단이 거사를 일으킨 데 비해 문체반정은 국왕이 직접 나서서 사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정조는 세종과 함께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지적인 통치자였다. -- 

 

--곰곰히 따져보면, 정조가 아니고는 당시 유행하는 문체가 불온하다는 것을 감지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산림처사로부터 도학적 훈육을 받기에 급급했던 여타 평범한 왕들로서야 무슨 안목으로 시정에 유행하는 문체가 순정한지 타락한지 알아차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문체반정은 순전히 전조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체 문체가 통치와 무슨 연관이 있길래 국왕이 손수 검열을 진두 지휘한단 말인가?

 

문체는 한 시대가 지니는 사유체계및 인식론의 표현형식이다. 그것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나 매개가 아니라 내용을 선규정하는 표상의 장치이다. 중세 유럽의 대학에서 수사학을 주요과목으로 설정한 것을 떠올리면 일단 감이 잡힐 것이다. 어떤 어조와 제스쳐를 쓸 것인가. 혹은 어떤 장식음을 활용할 것인가. 하는 따위는 단순히 테크닉이 아니다. 그런 테크닉을 숙련하는 고정 자체가 앎의 경계를 결정한다. 말하자면 문체는 사유가 전개되는 '초험적 장'인 셈이다.

 

 좀더 비근한 예를 들면, 지금 대학에서 양산하는 학문체계는 논문이라는 표현방식을 모든 구성원에게 부과한다. 그러므로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대학이 부과하는 규범화된 언표체계를 습득해야만 한다. 예컨대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야 하고, 서론에선 문제제기를 하고 연구사를 정리한 뒤, 연구방법을 제시한다. 또 결론에선 본론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남는 과제를 제시한다'는 식으로 사용되는 문장형식도 몇 가지로 정해져 있다. 이런 틀에 맞추려면 당연히 담을 수 있는 내용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 나물에 그 밥'이 체계를 일탈하는 순간 그것은 지식의 경계 밖으로 축출된다.

 

 만약 논문에 네티즌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문체를 사용했다고 하자. 아예 논문 제출 단계에서 짤리고 만다. 그 정도까지 갈 것도 없이 약간만이라도 '아카데믹한'어법에서 벗어나면, 당장 제동이 걸리는 게 대학의 현실이다. 나 역시 그런 일을 숱하게 겪었다. 학위논문이 아니라, 레포트 수준에서도 좀 개성있는 문장을 시도해 볼라치면, 가차없이 '그건 비평체 아냐'하는 질책을 받아야 했다. (비평이 뭐 어때서?) 그러니까 대학에서는 비평스타일조차도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달라진 거 같진 않다. 문체야말고 체제가 지식인을 길들이는 가장 첨단의 기제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문체는 지배적인 사유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문턱'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고문이 바로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태어나서 문자를 익히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든 지식인들은 고문을 습득하기 위한 훈련에 진입한다. 앎은 곧 고문으로만,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경의 문장과 사마천고 반고로 대표되는 선진양한의 문장 및 한유와 소식 등 당송 팔대가의 문장이 바로거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사대부들의 사유 및 신체를 이 표상 범위안에 묶어 놓는다는 점에서 체제를 유지하고, 지배적인 담론을 재생산하는 유효한 장치로 기능하엿다. 古란 무엇인가? 중국의 고문이다. 고문이란 그때 완성된 문장의 전법들이다. 즉 시간적으로는 아득한 옛날, 공간적으로는 저 중원땅을 향하게 함으로써 '지금 여기'를 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교묘하면서도 집요한 습속의 장치!그것이 바로 고문이었다.

 

 그런데 그 견고한 장치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말 청도의 문집이 유입되면서 고문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언표들이 번성하게 된 것이다. 소품문(小品文), 소설(小說,) 고증학(考證學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내 일찍이  소품의 해는 사학보다 심하다 했으나 사람들은 정말 그런지 몰랐다. 그러다가 얼마 전의 사건이 있게 된 것이다. 사학을 물리쳐야 하고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잇다. 하지만 이른바 소품이란 문묵 필연 사이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연소하고 식견이 천박하며 재예가 있는 자들은 일상적인 것을 싫어하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므로 서로 다투어 모방하여 어느 틈엔가 음성 사색이 사람의 심술을 고혹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 폐단은 성인을 그릇되이 여기고 경전에 반대하며 윤리를 무시하고야 말 것이다. 더욱이 소품의 일종은 명물 고증학으로 한 번만 변하면 사학에 들어가게된다. 그러므로 나는 사학을 제거하려면 마땅히 소품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조의 논리는 간단 명료하다. 소품을 읽다보면 경학을 벗어나게되고 그러다 보면 윤리를 무시하게 되어 아침내 삿된 학문에 물들게 된다는 것, 소품의 경박하고 참신함에 사람들이 금방 혹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체와 국가정치- 중에서

 

문체반정, 문예부흥기였던 정조시대에 박지원은 조의 견제대상이었다고 한다.

벼슬도 주변의 권유가 있었지만 애초부터 과거를 거부하고

권련 외부에서 떠돌며 문체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담론의 장을 열어 젖히는 것을 좋아했으며,

자연인으로 사는 삶을 살았던,  벼슬보다도 8도 유람을 하면서

통하는 친구들과 정담 필담 나누기를 더 즐겼던 그는 시쳇말로 야인기질이 다분한 성정이었던 것 같다.

 

정조는 죄를 지은 사대부들에게 반성문을 쓰거나 전향을 표명한 글을 쓰면

대부분 영달의 코스를 밟게 해주는 노회함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래서 변절자들이 한 술 더 뜬다고 이후에는 소품이나 소설에 대해

그들이 더 맹공을 퍼붓는 씁쓸하기 짝이 없는 일들도 일어났다고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친일 행적을 보인 작가들도 그런 변절자의 표본을 보인 작가들도 많다.

제도권에 정신이나 사상을 흡수시키기에 가장 좋은 방편은 글이다.

 글이란 정신이며 그 정신이 또 다른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동기가 불순하거나 잘 못된 정신(글)이 미치는 파급효과는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

정조가 문체반정으로 혼란해지려는 문체를 바로 잡으려 했던 것도 

글은 사람의 생각을 선 규정하는 힘이 있으며, 의식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임을 말해 무엇하리.

친일작가와 카인(최초의 살인자)을 비교하여 친일행적이 살인보다 나쁘다며 빗댄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카인은 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끝났지만, 친일은 그 민족혼의 정신을 말살한 것이라서

그것이 한사람의 살인보다 더 나쁘다는 요지의 글이었다.

 

  정신영역의 침범이라는 점에서 봐도 죄질이 나쁘며 지능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표방하는 서양문화에 비하면 얼마나 기막힌 저급함이며 민족적 비애인지.. 

시대적 상황이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정신만은 지켜감이 정녕 그 시대 지식인들의 몫이 었을지인데.

 그 죄악을 어떤것으로 단죄할 수 있을까., . 그저 개탄하며 통탄해 마지 않을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또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또는

소월의 '우리에게 보섭대일 땅이 있다면'등

그 시대 어느 누구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작품으로 승화 시켜낸 작가들이야 말로

진정 참된 지식인 이었으며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한 작가들이다.

 오늘날 까지 존경받을 수 밖에 없는 작가들인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처럼, 그들은 가고 없지만 정신은 글속에 그대로 살아있다.

글이 곧 정신이기 때문이다. 글은 적어도 바르고, 옳은 명분을 위해서 쓰여져야 하리라.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한것은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3, 대체 소품문이 뭐길래! 

나는 보았네 세상사람들

남의 문장을 기리는 것을

문은 꼭 양한(兩漢)을 모의하고

시에는 언제나 성당(盛唐)을 일컫지

비슷하다 함은 이미 참이 아닌데

한당이 어이하여 다시 있으리

 

나도 이런 칭찬 들은 적 있지

처음 듣곤 낯이 따갑더니

재차 듣곤 포복절도

며칠씩이나 허리 아팠고

널리 소문나니 더욱 무미해

도리어 밀랍을 씹는 듯했네.

 

 연암이 지은 <증좌소산인>이라는 시의 한 대목이다. 양한은 사마천과 반고의 문장, 성당은 한유와 유종원 등의 시, 한마디로 고문을 만한다. 연암 역시 이런 문체적 규범을 열심히 따랐고, 세인들로부터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는 문장이 아니었다. 밀랍을 씹는 듯, 사모관대를 하고 죽은 시체와 같았다. 앙상한 규범으로만 존재하는 문장에 어떻게 천지자연과 삶의 생동하는 호흡을 불어넣을 것인가? 이것이 연암을 위시한 18세기 신지식인들의 시대적 화두였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 소품문이다.

 

 소품이란 말 그대로 짧은 글이다. 우선 고문이 지닌 불필요한 긴 호흡을 한칼에 잘라버림으로써 그 위압적인 무게를 해체해 버린다. 나비차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게 소품의 전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지와 찰발성이 받쳐 주어야 한다. 단순히 글재주로만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삶 자체가 그대로 글이 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스타일, 그것이 바로 소품체다. 그래서 소품문이 번성했다는 것은 새로운 삶과 사유로 무장한 신지식인들이 출현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대처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고, 사람에 대한 관찰은 정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묘한 것이 없고, 정에 대한 관찰은  남녀의 정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진실된 것이없다.--

 

"비슷하다 함은 이미 참이 아닌데,"  "눈앞의 일 속에 참된 정취 있거늘, 어쩌자고/머나먼 옛날에서찾는가"

"사마천과 반고가다시 살아난데도/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진 않으리라. "어슬프게 고문을 본뜨지 말고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삼라만상'에 눈뜨라는 것이다. 사마천과 반고의 문장이 위대한 건 바로 그런 경지를 확보했기 때문인데, 그걸 보지 못하고 베끼기에남 골몰하다니, 그들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들은 지금 시대에 맞는 전혀 새로운 문장을 만들지. 예전 자신들이 썼던 문장을 본뜰 리가 없다. 그건 이미 지난 시대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이 천근(遷近)타 말하지 말라/ 천 년 뒤엔 응당히 높을 터이니."<증좌소산인>

대체 소품문이 뭐길래 - 중에서

 

 

소품문이란 길이가 짧고 소재나 주제가 제한이 없는글을 말하는 것 같다.

책 속에서는 소재를 어린아이가 울고 있는것,

시장사람들이야기,개 고양이 이야기,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 이야기,

나비와 벌, 꽃,가을이야기 등 지극히 가늘고 작은 것까지 무궁한 조화의 표현이라고 했다.

미세한 차이들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에 홀로 다른점 사물에서 새로운점

그러므로 하늘과 땅에 가득 찬 모든것들을 다 소재가 되는 것이다.

그당시에 금기시 되었던 남녀간의 정까지.. 인간군상의 다양한 면을  글로쓴 소품문,,

 

이건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천고 천상의 가치 역사와 우주의 이치를 논하는 것이어야 

장이라고 생각했으니 당연히 문장에 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글에 빠지면 사대부들은 존재근거가 위태로울 것이며 고문으로  표상되는 거대담론이 사라진다면

선비들이 통치이념을 잘 구현해낼까 미리 염려하고 단속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 정조의 안목과  예견이 들어 맞았다고 할가. '작은 것들의 향연' 소품속에서 고문의 권위는

입지가 좁아졌다고 한다. 그 배후 조종자로 정조는 연암을 지목했다고 한다.

 

 

"말세의 문인들은 고문을 짓는다고 스스로 뽐내며 거칠고성근 것을 답습하고 껍데기와 찌꺼기를 본뜨면서 깨끗하고 질박한 양 착각하나 실은 너절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지요 공은 이 풍속 고치려다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를 샀었지요. " 그리고 그것은 "흡사 위장병 환자가 맛있는 음식을 꺼리는 것과 같고, 눈병 앓는 환자가 아름다운 무늬를 싫어하는 것과 같"았다고.

 

 과연그러해다. 마치 환자들이 몸에 이로운 것을 꺼리듯이, 고문파들은 싱싱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문장들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속내를 들춰보면 그건 이미 논리와 설득의 차원을 넘어서 이권과 영역을 사수하기 위한 이전투구의 양상을 띠게 된다. 연암에 대한 비방들은 그런 점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게 데면데면하겨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말하자면 글이란 읽는 이들을 촉발하는 공명통이 있어야 한다 찬탄이든 증오든 공명을 야기하지 못하는 글은 죽은 것이다.

 

 그의 글이 언제나 거센 회오리를 몰고 다닌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책을 펼치자 마자 1만 길이나 되는 빛이 뻗어나와 가슴을 툭 트이게 한다. " 이런 열렬한 예찬자가 있는가 하면 격식에 사로잡힌 고문주의자들은 '궤변으로 세상을 농락한다'며 격렬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연암체 중에서

 

 연암의 문장론,,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게 될 것이다. ...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되엇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해와 달이 비록 오래되었어도 그 광휘는 날마다 새롭다. 책에 실려 있는 것이 방대하지만 가리키는 뜻은 제가끔 다르다. 때문에 날고 잠기고 달리고 뛰는 온갖 생물 가운데에는 간혹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것이 있고, 한천초목에는 반드시 비밀스런 영이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서 지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한다-- 초정집서 <楚亭集序>

 

 법고 창신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조한다. 이렇게 정리하게  되면, 연암의 특이성은 변증법적 조화와 통일로 오인 되고 만다. 그러나 그의 의도가 과연 古와 今의 조화에 있었던 것일까? 그보다는 고문이든 아니든, 언어가 어떻게 하면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날마다 그 광휘가 새로운 그래서 썩은 흙에서 지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이로 화하는 삼라만상의 무상한 흐름을 능동적으로 절단 채취 할수 있을 것인가에그 핵심이 잇다. ---중요한 것은 외부와 내부를 넘나들면서 끓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변이의 능력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논점을 변증법으로 영토화하려는 순간 종횡무진하는 이 '게릴라적인 담론은 고상하고 평온한 질서로 평정되고 만다.

 오히려 연암체의 진수는 대상과 소재에 따라 변화무쌍한 변이 능력에 있다.

 

 글자는 비유컨데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전장(전거를 인용하는 것) 고사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를 묶어 구절이 되고, 구절을 엮어 문장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 운으로 소리를 내고, 사로 표현을 빛나게 하는 것은 군대의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조응이라는 것은 봉화이고 비유라는 것으 유격의 기병이다. 억양반복이라는 것은 끝까지싸워 남김없이 죽이는 것이고,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다시 묶어 주는 것은 성벽을 머저 기어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반백의 늙은이를 사로 잡지 않은 것이고, 여음이 있다는 것은 군대를 떨쳐 개선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병법을 잘하는 자는 버릴 만한 병졸이 없고, 글을 잘 짓는 자는 가릴 만한 글자가 없는 것이다. ..

글이 좋지 않은 것은 글자의 잘못이 아니라, 저 글자나 구절이 우아하고 속됨을 평하고, 편과 장의 높고 낮음을 논하는 자는 모두, 합하여 변하는 기미와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 합하여 변화하는 저울질이란 것은 때에 달린 것이지 법에 달린 것은 아니다. <소단적치인>

 

<소단적치인> 한 문장만 봐도 연암의 문장이 얼마나 능통한지를 알 수 있다.

처음에 <소단적치인을>을  읽었을 때 어찌 이리 적절한 비유를

장수처럼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일예로 글자는 비유컨데 병사이고, 뜻은 비유하면 장수이다.

제목이라는 것은 적국이고, 전장(전거를 인용하는 것) 고사는 싸움터의 진지이다.

제목을 깨뜨리고 나서 다시 묶어 주는 것은 성벽을 먼저 기어올라가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병법에 능한 장군 같기도 한 이 글을 읽다 보면

문체나 문장에 이치를 거의 통달한 이라고 할 만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줄 읽고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문장을 연암은 얼마만큼의 시간을 두고 사유하며 썼는지.

아니면 단숨에 써내려 간 문장인지.. 문장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손금보듯 꿰고 있는 연암의 그 지식과 지혜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글쓰기를 전쟁의 수사학에 빗대고 있는 이 글이야말로 동서고금을 가로질러 단연 독보적인 문장론이다. <소단적치인>이란 제목도 흥미롭다.  소단은 문단이란 의미고 적치는 붉은 깃발이란 뜻이니, 우리 말로 옮기면 문단의 붉은 깃발을 논함 정도가 된다. 병법에는 고정된 룰이 따로 없다. 병법을 달달 왼다고 전투에 승리하는 건 결코 아니다. 아니, 도리어 그러다 망한 케이스가 더 많다. 승패를 좌우하는 건 병법이 아니라, 세를 파악하는 능력일 뿐이다. 글을 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문장의 어떤 종류의 규범이나 초월적 체계가 있을 리 없다. '합하여 변하는 기미', 곧 때에 맞는 용법이 있을 뿐이고, '제압하여 이기는 저울질', 곧 효과와 울림이 있을 뿐이다.

 

 연암체가 과연 그러하다 그의 글은 소설과 소품, 고문과 변려문 등이 자유자재로 섞이는 한편, 천고의 흥망성쇠를 다룬 거대담론과 시정의 우스갯소리, 잡다하고 황당한 이야기들이 공존하고있다. 그것은 어떤 하나로 분류되는 순간, 그 그물방을 교묘하게 빠져나가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곤 한다.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버리는 '변검'처럼 그리고 그 변화무쌍한 얼굴들의 각축장이 바로 <열하일기>다.

 연암체 - 중에서

 

 

 

5 열하일기 - 고원 혹은 리좀

측근 관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문체반정의 바람은 마침내 그 진앙지로 열하일기를 찾아낸다. 정조는 당시 규장각 관료였던 남공철에게 이렇게 분부했다.

 

<근자에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다. 열하일기를 내 이미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있겠느냐?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된 후로 문체가 이같이 되었거늘 본시 결자해지인 법이니 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부 지어 올려 열하일기로 인한 죄를 씻는다면 음직으로 문임 벼슬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다면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즉시 편지를 써서 나의 이런 뜻을 전하도록 해라.. (나의 아버지 박지원)

 

 문풍을 타락시킨 원흉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한 정조의 안목은 적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열하일기가 일으킨 파장의 측면에서 본다면, 정조의 그 같은 조처는 뒷북치는 감 또한 없지 않으니... 정조는 연암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휘둘렀다. 그러나 이 노회한 조치에 대해 연암은 어떻게 방응했던가? "보잘것 없는 제 책이 위로 임금님의 맑으신 눈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느냐? "중년 이래로 불우하고 영락하여 스스로 자중하지 못하고 글로써 유희를 삼아 때때로 궁한 처지에서 나오는 근심과 게으르고 나태하여 원고를 챙기고 단속하는 일을 제대로 못한 탓에 자신과 남까지 그르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문풍이 이때 문에 진작되지 못한다면 자신은 문단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견책을 받은 몸이 새로 글을 지어 이전의 잘못을 덮으려 해서야 쓰겠느"냐며 결국은 반성문 하나 제출하지 않은다. 당근도 채찍도 모두 비켜간 것이다. 문체반정 이후 대부분의 문인들이 견책을 면하기 위해 혹은 영달을 위해 철저한 고문주의자로 변모해 갔지만, 연암은 이후에도 정조의 건제, 아니 집요한 구애의 손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뱀처럼 유연하고, 두꺼비처럼 의뭉스럽게.

 

 그 여파 때문인지 이 문제작은 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까지 역임했음에도 조부의 문집을 공간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 '뜨거운 감자'였다. 마침내 1900년 창강 김택영의 주도로 <연암집>이 처음으로 출판되었고, 이듬해에는 <연암속집>이 발간되었다. <열하일기>가 단독으로 출간된 것은 1911년 최남선이 고전 보급을 목적으로 창설한 조선광문회가 발행한 것이 최초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택영조차도 염암의 전(傳)이나 <열하일기>가운데 <도강록> 이하의 몇 편은 순전히 패관소설체로 되어 있다며 빼버렸다는 사실이다. 20세기에도 < 열하일기>는 여전히 '벅찬 텍스트였던 것인가?

 

 열하일기는 수많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잇다. 형식상으로는 압록강을 건너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마테오 리치의 무덤에서 끝나지만 그것은 사실 시작도 끝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중도에 있으며, 따라서 어디서 읽어도 무관하게 각각은 서로 독립되어 있다. 또 연행을 마치고 돌아와 연암협에서 다시 메모지를 들고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연암 자신의 윤색도 적지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리하다가 만 경우도 있다.

 

 여행과 유목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여기서 여행은 유목과 아름답게 포개진다. 그는 인간. 자연 동물 등 무엇이든 접속하고 들러붙어 그 '표면의 충돌'들을 세심한 촉수로 낱낱이 잡아낸다. 그의 초감적 능력이란 실로 경탄할 지경이어서 '산천 성곽, 배와 수레, 벽돌, 언어, 의복제도' 등으로부터 '장복(하인)이의 귀밑 사마귀' '여인네들의 몸치장' '장사치들이나 낙척한 선비들의 깊은 속내'  '1시간에 70리를 다리는 말의 행렬' 등에 이르기까지 삼투하지 않은 영역이 없다. <열하일기>의 수많은 고원들은 바로 "시각조차 촉각처럼 만지고 직접적으로 느끼고 감응하"(이진경) 유목적 여정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심도 뿌리도 없이 우발적인 흐름에 따라 줄기를 뻗어나간다는 점에서 하나의 '리좀'이다.

 

 문체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열하일기는 정통 고문체에서 패사 소품체를 종횡으로 넘나든다. 그 사이에서 수많은 변이형들이 산포된다. 우리 말 대화는 문어체의 고문으로 표현하되, 중국 말대화는 굳이 구어체인 백화문으로 표현하여 언어의 차이를 부각하는가 하면, 조선식 한자어를 고문체 안에 뒤섞거나 번번히 속담. 은어 , 욕설 등을 구사함으로써 이른바 '특수어들의 경연'을 연출해 낸다. 정조가 명명한 소위 '연암체'의 실체는 바로 이 주류적 언어를 '더듬거리게'하고, 나아가 문체의 경계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균열 그자체에 있는 것일 터, 그러므로 패사소품이 되는 부분만 잘라 버리면 '어엿한 고문이 되리라 보는 것은 그야말로 착각이다. 리좀의 한 부분을 잘라 땅 속 깊숙이 심는다고 어찌 수목의 뿌리가 될 것인가.

 

 고문과 소품, 사실과 허구, 주체와 대상의 경계까지를 모호하게 흐려버리는 이 괴상한 '책기계'를 수목이 아닌 리좀이 되게 하는 배치. 그 스릴 넘치는 장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열하일기- 고원 혹은 리좀 -  중에서.  

 

정조의 홍국영 비호아래 그 세도 때문에 '연암'이라는 곳으로 가서 살게된 연암! 

그 시대에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문체의 반란 같은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박지원의 번뜩이는 사유로 빛을 발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등, 다양한 글쓰기를 통새 자신의 역량을 쏟아 낸 듯하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그의 정신을 향유할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세상 흐름보다 한 발 앞선  사람들, 시절을 잘 못 만났다고 할수도 있을것이고,

어쩌면 그런 성향은 어느 시절에 태어나더라도 자유인으로 사는것이

세상에 더 큰 족적을 남기는 일이라는 여러 갈래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다 후대에 자신의 기록물을 남길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그가 한일은 작다고 할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유대로 변방이라도 좋고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산 연암,

 그가 만약 벼슬길에 나갔다면 그 자유로웠던 사유가 틀에 메였을 테고

오늘날의 열하일기 같은 작품은 후대에 남길 수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는 정말로 처세에도 능한 야인이었는지 모른다.

 유영하는 정신세계, 여행을 통해서 사유의 폭을 넓히고 아니 넓었던 사유의 폭이

여행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드러난다고 해도 될만큼 경계가 없는 자유인이었음은 분명하다.   

 

 

  3장 천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유쾌한 노마드

  1, 잠행자 혹은 외로운 늑대

 연암은 사절단의 비공식 수행원이었다. 중요한 결정에는 낄수도 없고, 공식적인 성명단자에는 포함되지도 않는다. 북경에서 느닷없이 열하로 가게 되었을 때, "정사 이하로 직함과 성명을 적어서 예부로 보내어 역말 편에 먼저 황제에게 알리기로 하였으나" 염암의 성명은 단자 속에 넣지 않았다. '있으면서 없는 존재'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대규모 집단의 유일한 여행자이다. - 새벽에 서늘함을 타서 일찍 떠나거나 혹은 수행원들과 부담없이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는 것도 길을 가다 만나는 이방인들에게  스스럼없이 접근하여 딴지를 걸 수 있는 것도 공식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임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수목적인 배치 안에서 움직이는 유연한 선분, 그래서인가. 이 여행이 '지리적 경계'를 넘어 생애 처음으로 중원의 땅을 밟는 거창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의 출발은 지극히 경쾌하다.

 

  마치 돈키호테가 시종 산초 판사와 애마 로시난테만을 데리고 천하를 주유하듯, 그 또한 '두귀가 쫑긋' 하고 '정강이가 날씬한' 말과 우직한 하인 창대 장복이만을 동반한다. 돈키호테는 머릿속에 온갖 '기사담'을 다 집어 넣고서 길을 나서지만, 연암은 이제 마주치게 될 미지의 세계를 낱낱이 담기 위해 붓과 먹, 공책 등을 들고서 여행을 떠난다. 전자는 텍스트를 구현하기 위해 떠나지만, 후자는 텍스트를 채우기 위해 떠난다. 전자의 여행이 이미 완결된 세계를 현실에서 확인하고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후자의 여행은 예정도, 목적도 없이 낯설고 이질적인 모험속으로 무작정 몸을 날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연암이 더 '돈키호테적'인 게 아닐까.

 돈키호테와 연암 - 중에서

 

 그는 보이지 않은 것을 보려 하고, 보이는 것에서 숨겨져 있는 것들을 보려한다. 그런 까닭에 사신을 비롯하여 하인들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되놈의 나라라서 산천이며 누대조차 노린내가 난다고 눈도 주지 않은 채 오직 목적지만을 향해 나아가는 집합적 배치 속에서 연암은 그 길을 함께 밟아가면서도 끊임없이 옆으로 샌다.

이질적인 것들과 접속하려는 그의 욕망에는 경계가 무궁하다. 북경 안팍에 있는 여염집과 점포들을 유람할 때. 그는 이렇게 투덜댔다.

 

  <그러나 내가 유람한 곳이 겨우 백 분의 일이나 될까. 때로는 우리 역관들이 말리기도 하고, 때로는 들어가기 힘든 곳을 문지기와 다투어 가면서 모처럼 들어가면, 바쁘고 총총하여 그저 시간이 부족하였을 뿐...... 겨우 빗돌 한개만 읽는데도 몇 시간씩 보냈으니, 자개와 구슬처럼 찬란한 궁궐의 구경도 '문틈을 지나가는 말'이나 '여울에 달리는 배'처럼 되고 말았다. 오관(耳目口鼻心)이 함께 피로해지면서, 아울러 사우가 맥이 풀리어 언제나 꿈에 비록(예언서)을 보는 듯하고, 눈은 신기루를 본 듯 아련해 거꾸로 기억하기도 하고, 명승고적은 틀리게 안 것이 많았다. 돌아와서 약간의 기록을 수습해 보니, 어떤 것은 종이쪽이 나비의 날개폭이나 될까 하고 글자는 파리 대가리 만큼 하니, 대체가 그 총망중에 빗돌을 얼른 보고 흘러 베낀 것이다. (양엽기)

끝없는 잠행 -중에서 

 

연암이 여행기를 남기기 위해 문지기와 다투과 역관들의 눈을 피해 들어갔어도 시간이

부족하여 제대로 보지 못한것이 많아 뒤죽박죽 되었다는 내용이다.

길에서 만난 여인네들의 장신구나 패션, 머리모양 곰이나 범 온갖 동물들의 모양새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미치치 않은 영역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때는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시어 글자를 썼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중에도 연암의 가장 큰 목적은 이국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수행원들을 따돌리고 낮에 만난이들과 밤에 만날것을 약속하고 잠행이 이루어졌는데,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이국의 사람들과 필담을 나누다가

새벽녘이면 놀라서 여관으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책에서는 톰소여의 모험을 보는 듯, 춘향이를 만나러 가는 이몽룡의 탈주를 보는 듯,

그의 잠행은 유머러스한 스릴과 서스펜스로 가득하다고 표현되어 있다.

 

통하는 사람들,,, 이국이지만 말이 통하고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학문을 논하든 정세를 논하든 

터놓고 얘기할수 있는 장을 마련한 연암의 호연지기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촉박한 중에도 그런 시간들의 연암의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세상, 사람이든 사물이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은

시종일관 6개월의 여행기간 동안 지치지도 않는다.

하고싶은 건 꼭 해야 하는 성미이면서도 그 하고 싶어하는 일들이란, 

사절단 어느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분들이어서 더욱 연암다운 기질이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도 그가 어떻게 놀든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로 알아서 잘 놀았다고나 할까.

 

 조선시대 연행에서 '유리창'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무려 27만 칸에 달하는 서점, 골동품 가게들이 즐비한 지식의 보고, 아니 용광로. 그야말로 세계의 지식이 흘러들어오고 다시 뻗어나가는 곳이 유리창이었다. 그러므로 근대 이전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있어 유리창은 연행의 필수코스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공식적 업무가 없는 지식인들의 경우, 연행의 목적지는 북경이 아니라 유리창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홍대용이 천애의 지기를 만난 곳도 바로 이 유리창이 아니던가. 이쯤 되면 독자들도 내가 중국에 갔을 때, 퇴락한 유리창에서 깊은 감회에 젖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나는 거기서 200여 년 전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역동적인 숨결을, 그리고 나와 비슷한 나이에 거기를 지나갔을 염암의 발자취와 호흡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연암은 유리창에서 가슴벅찬 감동과 함께 진한 고독감에 사로 잡힌다. '지성의 거리'를 거닐면서 새삼 가슴 속에 용솟음치는 지식을 펼칠 장이 없음을 환기하게 되었나 보다. 한 누각위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이렇게 탄식한다. "이 세상에 진실로 저를 아는 사람 하나 만났다면 한이 엇을 것"이라고.

 자신을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 비감함. 그렇다고 기죽어 음울해할 연암이 아니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다'라는 노자의 궤변을 버팀목 삼아 국면을 전환한다.. "이제  이 유리창 중에 홀로 섰으니, 그 옷과 갓은 천하에 모르는 바이요. 그 수염과 눈썹은 천하에 처음 보는 바이며, 반남(潘南)의 박(朴)은 천하에 일찍이 듣지 못하던 성일지라도, 내 이에서 성(聖) 도 되고 불(佛0도 되고 현(賢)도 되고 호(豪)도 되어, 그 미침이 기자(箕子)나 접여(接與)와 같기로, 장차 그 누가 와서 이 천하의 지락을 논할 수 있겠는가."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외로움을 고귀함으로, 다시 자유인의 지극한 즐거움으로 변환시키는이 멋진 역전! 그래서 외로운 늑대 연암은 결코 외롭지 않다!

달빛 그리고 고독 -중에서

고독했더라도 연암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 사유의 유함이 물과 같아서 걸림이 없는걸 볼 수 있고

또 넘치는 에너지를 문장에다 풀어낼 수 있었으니 그 여유자적함 때문에

가끔은 외로웠을지라도 오히려 그 외로움도 즐길줄 알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2, 열하로 가는 '먼 길' 

 그러나 황제는 연경(북경)에 있지 않았다.(이럴 수가!) 열하에 있는 피서산장에 가 있었던 것이다. 열하로 가는 길은 연경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하다. 지리지에는 4백 50여리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700리 그것도 험준한 산과 물을 수도 없이 지나야 하는 코스다. 길은 멀고 일정은 빠듯한지라 인원을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했다. 연암은 비공식수행원이라 가도 되고 안 가도 상관없는 처지다. 그래서 연암은 머뭇거린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요해의 땅을 밞을 것인가. 아니면 북경에 남아 이국의 친구들을 사귈 것인가.  정사이자 삼종형인 박명원(이 분 덕분에 연암이 하릴없어도 수행원에 끼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은 그에게 중국에 온 뜻을 되새기면서 이번 길이야말로 좀처럼 얻기 어려운 기회라며 꼭 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연암도 그 결정에  따른다. 이 과정은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이때야말로 연암의 생애 아니 18세기 지성사의 새로운 획이 그어지는 클리나멘의 순간이다. 만약 연암이 그냥 북경에 남았더라면? 물론 그것만으로도 연암의 연행록은 충분히 감동적이었을 테지만 그것이 주는 충격과 효과의 진폭은 비교적 평이했을 것이다. 그만큼 연암과 열하의 만남은 '천고에 드문 마주침' 이라 할 만하다.

 

 연암은 하는 수 없이 장복이를 떨어뜨리고 창대만 데려가기로 했다. 환상의 2인조가 생이별을 하게 된것이다. 고지식하고 융통성ㅇ 없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기는 하나, 그래도 산전수전을 함께 겪어왔는데, 막상 떼어놓으려니 연암의 가슴이 미어진다. 장복이은 또 어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두사람과 생이별을 하게 되엇으니 창자가 끊어질 듯이 서러워한다. "장복은 말 등자를 붙잡고 흐느껴 울며 차마 헤어지기 어려워한다. 내가 돌아가라 타이른 즉 또 장대의 손목을 잡고 서로 슬피 우는데 눈물이 마치 비내리듯 한다."

 

연암은 문득 말위에서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도 생이별보다 괴로운것은 없을거"이라고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그거야 사람마다 겪는 것이고, 천하의 순리가 아닌가. 또 죽은 이에겐 괴로움이 없을 터, 그러나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는 때. 그것도 흘러가는 물을 사이에 두고 헤어질 때의 그 애닯음을 무엇에 비길 것인가. 이런식으로 연암의 이별론이 시작된다. 어던 소재든 그에 알맞는 리듬과 악센트를 부여하는 것이 연암의 장기 아니던가. 장복이와 이별하는 장면에서 시작된 '이별론'은  배따라기 곡에 대한 해설에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왓던 소현세자의 조선 사절단 사이의 이별장면으로 변주된다고 한다. 이쯤되면 연암은 정복이는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상념에 되취되어 격정적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고..

'천신만고' 중에서

 

 연암이 열하에 당도했을 때는 바야흐로 8월, 북방의 더운 기운이 오히려 찌는 듯하여 그는 흰 모시 홑적삼을 입었는데도 대낮이 되면 땀이 흐르곤 했다. 무리한 행군으로 인한 피로함과 체질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귀, 눈, 마음을 모조리 열어놓고서 그 이질성의 세계를 낱낱이 기록한다. 8월 13일은 건륭황제의 춘추절이었는데 황제는 특별히 조선 사신을 불러 행재소까지 와 뜰에 참여하여 하례를 올리도록 은전을 베푼다. 노고를 치하하느라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황제는 여러 면에서 조선 사신단에 대한 편애를 감추지 않는다. 연암이 특별한 체험을 많이 하게된 것도 어찌 보면 황제의 직. 간접적 배려에 힘입은 바 크다.

 

 이 때만 해도 그렇다. 황제의 70세 잔치인 천추절 당일날 황제가 있는 곳까지 부르는 바람에 엄청난 규모의 진공(進貢)(공물을 갇다 바침)행렬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연암이 보기에, 세계 곳곳에서 당도한 수레가 만 대는 될 듯하다. 사람은 지고, 약대는 싣고, 가마에 태우고 가는데, 마치 형세가 풍우와 같았다. 거대한 바람이 움직이는 듯한 진공대열에서 연암의 눈을 사로잡은 건 억센 쇠사슬로 목을 맨 범과 표범, 그리고 길들인 사름, 크기가 말만하고 정강이는 학처럼 우뚝 선 악라사(러시아의 옛 이름)개 , 모양은 약대 같고 키가 서너댓 자나 되는데 하루 3백리를 간다는 타계 등, 기이한 금수들이었다.

 

 만약 괴상스럽고 잡스럽고 우습고 괴이하며 거룩한 것을 구경하려면 먼저 선무문 안에 있는 상방(象房)에 가봐야 할 것이다..... 몸둥이는 소 같고 꼬리는 나귀와 같으며, 약대 무릎에, 범의 발톱에. 털은 짧고 잿빛이며 성질은 어질게 보이고, 소리는 처량하고 귀는 구름장같이 드리웠으며, 눈은 초생달 같고, 두 어금니는 크기가 두아름은 되고, 길이는 한 발 넘어 되겟으며, 코는 어금니보다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이 자벌레 같고, 코의 부리는 굼벵이 같으며, 코끝은 누에등 같은데. 물건을 끼우는 것이 족집게 같아서 두루루 말아 입에 집어 넣는다. <상기> 연암이 코끼리에  대한 묘사. --

 

 연암을 비롯한 조선 사행단에게 있어 가장 '쇼킹'한 것은 바로 서번, 즉 티베트와의 마주침이다. 이것은 그저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가 아니라, 낯선 우주와의 충돌에 비유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그저 스쳐지나간 것이 아니라,이 여행기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염암이 그것과 접속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 이렇듯 열하는 천시만고를 보상해 주기하도 하듯. 온갖 퍼레이드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연암은 이 이질성의 도가니를 종횡무진누비고 다녔다.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열하 그 열강의 도가니 - 중에서

 

열하에서 보낸 시간은 엿새, 열하는 정말 매혹적인 공간이었다고 한다..

황제의 별장이 있는 곳이었으니 오죽했을까.

무엇보다도 황제는 조선사신단에게 티베트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접견하도록 은혜를 베룬다.

황제쪽에서는 영광스런 기회를 준것이지만 조선 사신단에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고 한다.

 

유학자가 불교 그것도 그당시로 봐서는 사교에 가까운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할수도 아니 할수도 없는 상황, 처음엔 은전이었지만 지엄한 명령이니 울며 겨자먹기로 접견을 마쳤으나,

조선사신단의 불공함은 황제를 노하게 만들고, 황제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한다.

황제가 떠받드는 존재(판첸라마)를 변방 국가 사절단이 뻗대었으니...

그때의 모습을 연암은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제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그들 근신의 호송도 없거니와 황제로서의 역시 한마디 위로의 말씀이 없었다.

이는 대체 사신들이 부처님(판첸라마)뵙기를 꺼려한 까닭으로 이러한 푸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들의 기색을 살펴보면, 갈 때와 올 때의 대우가 다름을 나는 느꼈다. 대체 저 백하는 며칠 전 건더던 물이었으며 모래 언덕은 앞날에 발을 멎던 곳이엇고, 제독의 수중에 가진 채찍이나 물 위에 떠 노는 배까지도 올 때의 것들과 다름이 없건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독은 입을 다물고 통관마저 머리를 숙이고 돌아보지 않으니, 저 강산은 아무런 변함이 없건마는 세대의 염량은 완연히 눈앞에 떠오른다. <환연도중록>

 

 

 

 3장 천개의 얼굴 천개의 목소리

 

정진사, 주주부, 변군 내원, 조주부 학동 등이 더불어 투전판을 열었는데,소일도 할 겸 술값을 벌자는 심산이다. 그들은 나더러 투전에 솜씨가 서툴다고 한 몫 끼워주지 않고,그저 가만히 앉아서 술만 마시라 한다. 속담에 이른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셈이니, 슬며시 분하긴 하나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혼자 옆에 앉아서 지고 이기는 구경이나 하고 술은 남보다 먼저 먹게 되었으니. 미상불 해롭잖은 일이다. 벽을 사이에 두고 가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하도 갸날픈 목청과 아리따운 하소연이어서 마치 제비와 꾀꼬리가 우짖는 소리인 듯싶다.나는 마음 속으로 '아마 주인집 아가씨겠지.  반드시 절세의 가인이리라'하고 일부러 담뱃불 댕기기를

핑계하여  부엌에 들어가보니, 나이 쉰도 넘어 보이는 부인이 문쪽에  평상을 의지하고 앉았는데. 그 생김생김이 매우 사납고 누추하다. 나를 보고, "아저씨, 평안하셔요"한다. 나는, "주인께서도 많은 복을 받으셔요"하며 답하고는 짐짓 재를 파헤치는 체 하면서 그 부인을 곁눈질해 보았다. 머리쪽지에는 온통 꽃을 꽂고, 금비녀 옥귀고리에 분연지를 살짝 바르고, 몸에는 검은 빛 긴 통바지에촘촘히 은단추를 끼었고, 발엔 풀, 꽃, 벌, 나비를 수놓은 한 쌍의 신을 꿰었다.,<도강록>

 

 <열하일기>와 관련해서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이다. 투전판에서 '왕따'를 당하는 모습도 흥미롭지만, 갸날픈 여인의 목소리에 혹해서 은근슬쩍 접근했다가 완전히 좌절?하고 마는 과정은 마치 얄개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쉰도 넘어 보이는 여인네와 주고 받은 어색한 인사말하며, 그와중에도 곁눈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는 치밀한? 관찰력하며, 연암의 모습은 여지없이 여드름 덕지덕지한 사춘기 얄개의 그것이다.

 

 이 스토리는 그 다음날로 이어진다. 다음날 "하루 해가 몹시 지루하여 한 해인 듯 싶고, 저녁 때가 될 수록 더위가 더욱 심해져서 졸려 견딜 수 없던 차에, 곁방에서 투전판이 벌어져 떠들고 야단들이다."  전날 '왕따'를 당했던 연암은 한 걸음에 달려가 자리에 끼어 연거푸 다섯 번을 이겨 백여 닢을 따 술을 사서 실컷 마셨다. 그 전날의 수치를 깨끗이 씻은 것이다. 의기양양한 연암이 "그래도 불복인가" 하고 으스대니, 자존심이 상한 조주부와 변주부가 "요행으로 이겼을 뿐"이라고 대꾸한다. 서로 크게 웃었다. 하지만 변군과 내원이 직성이 풀이지 않았음인지 다시 한판 하자고 조르나 연암은 발을 뺀다. 특유의 고상한 문자로 여운을 남기며, "뜻을 얻은 곳에 두번 가지 말고, 만족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라."

 

 여행이 주는 재미는 이처럼 일상을 탈출하여 놀이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특히 연암처럼 비공식적 동행자일 경우 임무수행의 의무로부터 벗어나 다양한 장소, 상이한 그룹에 끼여들 기회가 적지 않다. 일상의 시공간적 리듬을 벗어난 데서 오는 긴장과 이완, 이질적인 습속들 사이의 충돌 등 예기치 않은 사건들의 발생도 바로 그때 일어난다. 연암은 이 '자유의 공간'위를 경쾌하게 질주한다.그는 타고난 장난꾸러기다.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터주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기꺼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건들마다 유쾌한 악센트를 부여하는

악동! 

호모 루펜스- 중에서

 

 "이는 중국땅이 커서 능히 회회(광대하여 포용하는 모양)하여 끝이 없어 이런 것도 같이 길러 내므로 정치에 병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만일 천자가 좀스러워서 이런 것을 자로 계고하고 깊게 추궁한다면, 도리어 깊숙한 곳에 숨어 살다가 때로 나와서 세상을 흐려 놓을 것이니, 천하의 근심이 클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날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장난삼아 구경하게 하면 비록 부인이나 어린이라도 이것을 묘술로 알게 되어, 족히 마음을 놀래고 눈을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임금된 자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아니겠소."얼마나 노회한 논리인가.

 

  어찌 됐든 이렇게 해서 연암은 이상하고 신기한 '요술나라'로 돌아간다. 스무 가지가 넘는 요술이 펼쳐지는환희는 한 마디로 '환타지아' 그 자체이다. ---연암은 요술이 기본적으로 눈속임이라고 간주했다 자신의 눈을 전적으로 믿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거기에 속아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거야말로 인생의 환(幻)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훌륭한 교사가 아니겠는가. 기막힌 역설 혹은 아이러니,연암의 사유는 이렇듯 막힘이 없다. 환타지아를 맘껏 즐길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을 삶의 예지로 변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일 터이다.

환타지아 중에서

 

 궁을 나섰을 때 나는 정말 놀랬다. 궁으로부터 보드가야의 대탑에 이르는 연도에는 수천수만의 티베트 군중들이 달라이라마를 한번 뵙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더더욱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 순간에 전개된 군중들의 모습이다. 달라이라마와 내가 궁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온 거리가 정적에 휩싸였다. 영화의 뮤트 슬로우 모션처럼, 온 세계가 너무도 조용해진 것이다. 미동의 소리도 없었다. 그들은 달라이라마를 육안으로 쳐다보는 그 감격을 가슴으로, 눈빛으로만 표현했다. ...달라이라마는 그들의 군주였고, 다르마의 구현체였다. 그는 21세기 벽두에 우뚝 서 있는 왕이었다.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3권에서

 

나는 이 장면을 처음 접했을 때,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한갓 난민촌의 수장이 어떻게 이토록 막강한 카리스마를 내뿜을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군중을 침묵하게 하는 그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왕이면서 동시에 진리의 구현체인 존재가 이 첨단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가능하단 말인가? 누구도 이 질문들에 명쾌하게 답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 우리의 이 협소한 인식의 수준에선 달라이라마는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다. 연암의 시대도 그러했다.

 

 대개 모두 놀랍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며, 칭찬하는 듯도 하고, 조소하는 듯도 하며, 기괴하고 거짓말 같아서 모두 믿을 수가 없으나, 아무튼 이것들을 주워 모르고, 조잡한 것들을 서술해서 한 편의 글을 이룬 것이다. 신령스럽고 현란하고 크고 곱고 텅 비기도 하고 밝기도 하며, 섬세하고 교묘하여 평범하지 않은 이 문자는 소위 활불(活佛)이란 자의 법술(法術)의 내력을 특별히 깊히 캐어서 썼을 뿐만 아니라, 만나서 서로이야기한 여러 사람들의 성정과 학식 용모와 말솜씨 등도 똑똑히 나타내었다.

 

이것은 연암의 처남 이재성의 평어다. 무슨 평어가 이렇게 알쏭달쏭한가? 대체 어떤 글에 대한 것이길래? 바로 <황교문답>에 대한 것이다. 황교란 티베트 불교를 뜻하는 것으로 평어에 나오는 활불, 곧 판첸라마의 내력을 다룬 글이다. 다시 조선인들에게 티베트와의 만남은 마치 낯선 우주와의 충돌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서술이 단순명료할 리가 없다.

 실제로 <열하일기> 전체에서 가장 '튀는' 부분을 꼽으라면, 단연 연암이 판첸라마를 만나느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판첸라마는 명목상으로는 대법왕 달라이라마를 잇는 소법왕이지만, 서로 번갈아 가며 통치하기 때문에 사실은 같은 위상을 지닌 존재이다. 결국 요즘으로 치면 연암은 달라이라마를 만난 셈이다. 연암과 달라이라마의 만남이라? 이 대목은 내용도 기이할 뿐 아니라,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티베트 불교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달라이라마를 만나다- 중에서...

 

달라이라마는"지혜의 바다'라는 뜻으로 관세음보살의 환생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제도적 명칭인데.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통치권자로 임명된 것은 명나라 때부터이고,

환생으로 대를 잇는 제도적 승인에 속한다고 한다.

명나라 중엽부터 중국으로 부터 봉호를 받지 않고 

 대법왕(달라이라마)과 소법왕(판첸라마)이 있어 대법왕이 죽을 때 소법왕에게

'아무데 아무게'의 집에 아이가 태어날 때 이상한 향기가 날것이니 '그것이 곧 나 다' 하고

예언을 하고 대법왕이 죽고 나면 그 아이가 태어나게 되고 궁으로 데려온다고 한다. '

 

그 아이가 성장하여 왕위에 오를때까지 소법왕이 대신 통치를 하며, 

 그런식으로 계속 이어져  와서 지금의 달라이라마인 텐진 가쵸는 14대째로,

그 또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내어났지만 여러가지 시험을 거쳐

13대 달라이라마의 환생자로 결정되어 5살때 왕위에 올랐다.

 

환생이야기를 내가 처음 들은 것은 80년대 초 티벳에 직접 다녀온 스님으로 부터 스님이 직접 찍어온

슬라이드 영상물과 함께 법회시간에 듣고 보았다.

그 때 스님은 어린 텐친가죠(환생)가 자신이 쓰던 물건(전새에서)과 다른 물건들을 섞어 놓아도

 자신이 전생에 쓴 물건을 찾는다는 등 여러가지 방편을 통해서 검증을 받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환생임을 다시 확인한다는 말씀을 듣고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 티벳이라는 나라의 신비로운 환생을 나는 윤회라는 것과 결부시켜 이해 했는데

이번 이 책을 읽으면서 윤회와 환생은 다른 것임을 알게도 되었다.

윤회는 업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환생은 깨달음을 얻은 이가 스스로 다음 생을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이 제일 마지막 중생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구제하기 위하여

몸을 나투시는 것처럼, 곧 달라이라마가 관세음보살의 환생인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티벳은 어떤까? 1949년 중국은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했고, 수많은 인민을 학살했으며 6천여개의 사원을 파괴하였다. 마침내 59년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을 단행한 뒤, 티메트 불교는 세계 속으로 퍼져 나갔고, 그 수장인 달라이라마는 근대 이성의 한계에 봉착한 세계인들에게 삶의 비전을 제시하는 '지혜의 스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청왕조에선 스승의 나라로 추앙받았으나, 지금은 식민지속국으로 가차없이 짓밟히는 것도 그렇지만, 바로 그 중국 제국주의로 인해 티베트 불교가 히말라야 고원지대에서 세계사의 한복판으로 걸어나가게 되엇으니. 역사의 이 지독한 역전과 아이러니 앞에서 그저 망연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 조선의 위치는 어떻게 달라졌던가? 한국은 중국과의 외교를 위해 달라이라마의 방문을 거부하고 있는 극소수 국가 중의 하나다. 연암 시대에는 황제가 강제로 절을 하도록 시켜도 거부하더니. 이제는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달라이라마의 만남을 아예 묵살하고 있다. 얼마 전엔 달라이라마가 몽고로 가기 위해 한국의 창공을 경유해야 했느데, 아시아나 항공사 측에서 그것조차 거부한 적도 있다. 맙소사!

 

 누군가 말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한 번은 비극으로, 도 한 번은 희극으로, 그러나 이 경우엔 정확히 그 반대다. 열하에서의 대소동은 다분히 희극적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상황은 음울하기 짝이 없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하긴 전자가 코미디라면 후자는 코믹한 비극이라는 점에서 상통하는 바가 없진 않다.

달라이라마를 만나다  - 중에서

 

 

4장 범람하는 유머, 열정의 패러독스

1, 유머는 나의 생명!

호모 루펜스가 펼치는 개그의 향연. 유머 없는 열하일기는 상상할 수조차 없으니,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유머로 시작하여 우머로 끝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도처에서 유머를 구사한다. --유머는 익숙한 사유의 장을 비틀어 버리거나 아니면 슬쩍 배치를 변환하는 담론적 전략이기도 하다. 연암 사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러니와 역설, 긴장과 돌출은 모두 유머러스한 멜로디 속에서 산포된다.

 나는 중년 이후 세상 일에 대해 마음이 재처럼 되어 점차 골계를 일삼으며 이름을 숨기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니, 말세의 풍속이 걷잡을 수 없어 더불어 말을 할 만한 자가 없었다. 그래서 매양 사람을 대하면 우언과 우스갯소리로 둘러대고 임기응변을 했지만, 마음은 항상 우울하여 즐겁지가 못했다

 

천재들은 시대와의  불화를 감지할 수 있는 내용같기도 하지만,

 연암은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비분강개하거나 하지 않고 해학으로 표현하였으며

그것으로 역경과 굴곡의 생을 능동적 발판으로 전환하는 고도의 능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는 평이다.

그만큼 유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연암이 우스갯소리를 해대며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았다면,

세상의 위태로운 지경에서 위기를 모면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그의 유머 능력은 호질에서 특히 돋보인다. 그는 상점의 멱 위에 한편의 기문을 발견하고 그것을 베끼기 시작한다. 동행한 정군에게 부탁하여 그 한가운데부터 베끼게 하고 자신은 처음부터 베껴 내려간다. 주인은 당연히 이상스럽다.

"선생은 이걸 베껴 무얼 하시려오?(주인)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 번 읽혀서 모두들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거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 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것이외다."(연암)

사람들을 포복절도 하게 하려고 그런 수고를 감수하다니, 그거야말로 포복절도 할 일 아닌가?

포복절도 중에서

 

 

2,시선의 정복 봉상스의 해체

 호곡장?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

1천 2백리에 걸쳐 한 점의 산도 없이 아득히 펼쳐지는 요동벌판을 보고  터뜨린 그의 탄성이다. 통곡하기 좋은 곳이라니? 어리둥절한 동행자 정진사의 물음에 연암의 장광설이 도도하게 펼쳐진다. 이름하여 호곡장론 혹은 통곡의 패러독스! 천고의 영웅이나 미인이 눈물이 많다 하나 그들은 몇 줄 소리 없는 눈물만을 흘렸을뿐,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금석으로부터 나오는 듯한 울음을 울지 못했다. 그런 울음은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  

 

 사람이 다만 칠정 중에서 슬플 때에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 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다. 지정(至情)이 우러나오는 곳에는 이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을 진대 울음과 웃음이 무엇이 다르리요 <도강록>

 

요컨대 기쁨이나 분노, 사랑, 미워함, 욕심 어떤 감정이든 그 극한에 달하면 울 수가 있으니, 그때 웃음과 울음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극치를 겪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슬픔을 당했을 때 '애고' '어이' 따위의 소리를 억지로 부르짖을 따름이다. 궤변 혹은 예측 북가능한 생성, 이에 다시 정진사가 묻느다.

"이제 이 울음터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의당 당신과 함께 한번 슬피 울어야 할 것이나, 우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느 것에 해당될까요."

 대답 대신 또 다른 궤변이 이어진다.  갓난아이는 왜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가? "아기가 태 속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막힌 데다 에워싸여 답답하다가, 하루아침에 넓은 곳으로 빠져 나와서 손과 발을 주울 펼 수 잇고 마음이 시원스레 환하게 되니 어찌 참된 소리로 정을 다해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즉 이때의 울음은 우리가 아는 그런 울음이 아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경계를 넘는 순간의 환희이자 생에 대한 무한긍정 으로서의 울음인 것이다.

호곡장 중에서

 

 한 소경이 손으로 월금을 뜯으며 지나간다. 순간 크게 때닫는 바가 있어. 이렇게 말한다. "저야말로 평등의 눈을 가진 이가 아니겠느냐." 근거는? 소경은 눈에 끄달려 시기하고 집착하는 마음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여래의 눈이 천지만물을 두루 비출 수 있는 것이라면, 소경의 눈은 빛이 완전 차단된 암흑이다. 하지만 둘은 모두 편협한 분별과 집착에서 자유롭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여래의 평등안, 소경의 눈이 곧바로 연결되는 이 돌연한 비약, 연암 특유의 역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이런식의 돌출과 비약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일야구도하기>에서 창대는 다쳐서 뒤에 처지고, 홀로 말에 의지하여 물을 건너게 되었을 때. 동행자가 위태로움에 대해 말한다. "소경이 애꾸말을 타고 밤중에 물가에 섰는 것이야말로 위태로운것 가운데 최고가 아니겠느냐"고, 그러나 연암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소경을 볼 수 있는 자는 눈 있는 사람이라 소경을 보고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로움을 느끼는 것이지, 결코 소경이 위태로운 것이 아니오, 소경의 눈에는 어떠한 위태로움도 보이지 않은데 무엇이 위태롭단 말이오,

 

 보는 것의 위태로움, 그것은 결국 자신의 눈을 앎의 유일한 창으로 믿는데서 오는 것이다. 감각을 앎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을 때 삶은 얼마나 위태롭고 천박해질 것인가. 이어지는 대목에서 연암은 그점을 환기한다. "소리와 빛은 외물이니 외물(外物)이 항상 이목(耳目)에 누(累)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것을 잃게 하는 것이 이 같거든, 하물며 인생이 살아가는 데 있어 그 험하고 위태로운것이 강물보다 심하고,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이 되는것임에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중에서

 

화담 서경덕에 얽힌 유명한 에피소드

어느날 소경이 눈을 떴는데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눈이 보이지 않을때는 몸 전체의 감각으로 찾았는데

눈을 뜨자 사물의 현람함에 사로잡혀 잃은 것이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소경에게 화담의 한마디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다시 봉사가 되라는 얘기가 아니라 현람함에 눈 빼앗기지 말고

 '분으로 돌아가라' 뜻이다..

 

타인들의 고루한 편향을 보는 건 쉽다. 그러나 그 시선을 자신에게 비추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자신을 기꺼이 타자의 프리즘속에서 볼  수 있는 고정된 위치를 벗어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의 자유에 다름아니다. 연암의 패러독스가 한층 빛나는건 바로 이런 '자유의 공간' 에서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 중에서 

 

 

 

 5장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1,사이에서 사유하기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을 아껴 여룡의 여의주를 부러워히자 않은다. 여룡 또한 여의주를 가지고 스스로 뽐내고 교만하여 저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선귤당농소>

 이글은  연암의벗이자 제자인 이덕무의 것으로 연암이 재인용하면서 당시 신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회자된 아포리즘이다. 요점은  척도를 고정시키지 말라는 것, 진리 혹은 가치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이는 자리, 곧 배치에 다라 달라진다는 까닭이다. 지극히 낮고 천한 미물인 말똥구리와 신화적 상상력에 감싸인 여룡을 대비함으로써 그 효과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렇게 정리하면 참 범박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중세적 초월론을 내파하는 뇌관이 잠복해 있다. 초월론이란 말 그대로 모든 대상들의 차이를 하나의 초월적 기호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런 지반에 서는 한, 모든 차이는 다양성이 아니라 엄격한 위계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즉 말똥구리는 절대로 여룡과 같은 평면에 비교될 수 없다. 이덕무는 바로 그러한 위계와 구획의 장을 전복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에서 사유하기 - 코끼리에 대한 상상 중에서

 

<공직관문고자서>에서 들고 있는 이명(耳鳴)과 코골기의 비유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가 갑자기 우는지라 놀라 기뻐하며 가만히 옆의 아이에게 말하였다. "얘! 어 이소리를 들어 보아라. 내 귀가 우는구나. 피리를 부는듯, 생황을 부는 듯, 마치 별처럼 동그랗게 들려!" 옆의 아이는 귀를 맞대고 귀기울여 보았지만 마침내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이 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찍이 시골사람과 함께 자는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것이 게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하거나 한숨 쉬는 소리 같기도 하며, 불을 피우는 듯, 솥이 부글부글 끓는 듯, 빈수레가 덜그덕거리는 듯하였다. 들이마실 때에는 톱을 ㅁ켜는 것만 같고, 내수린 때에는 돼지가 꽥꽥거리는 듯하였다. 남이 흔들어 깨우자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내가 언제 코를 골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현상에 대해 연암은 이렇게 해석해 준다. "자기가 혼자 아는 것은 언제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 걱정이고,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남이 먼저 앎을 미워한다. 이명은 병인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은다고 안타까워하고, 코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는 것에 성을 낸다. 그러므로 이명을 듣지 않고 내 코골기를 깨닫는다면 작가의 뜻에 거의 가까워질 것이다"라고,이해되는가? 더 헷갈린다고? 맞다 그러면 연암의 일차적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사이의 은유들을 통해 그가 의도하는 바는 어떤 해결책이나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계속 물음을 구성해내라는 것, 어떤 대상이든 입체적으로 다층적으로 사유하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이면에 숨겨진 성격을 보려 하고, 그것을 인접한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길'이 있기 때문이다.

'사이'의 은유들 중에서.

 

"자네 길을 아는가."

"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을"

" 강은 바로 저와 우리와의 경계로서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지.

무릇 세상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은 마치 물이 언덕에

제함과 같으니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사이'에 있는 것에네." 

 

 연암이 말하는 사이의 사유도 고정된 표상의 말뚝에서 벗어나 인연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하면서 만물의 근원에서 노닐 수 있는 능력 그것이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길은 하나가 아니다. 방향도, 목적도 없이 뻗어나가면서 무수한 차이들이 생성되는, 말하자면 '가는 곳마다 길'이 도니느 그런 것이다. "말은 반드시 거창할 것이 없으니, 도는 호리(저울 눈의 호와 리로 매우 적은 분량을 뜻함)에서  나누어진다"고 할 때의 그 호리의 차이! 물론 그 '호리의 차이는 천리의 어긋남을 빗는다'는 점에서 폭발적 잠재력을 지닌다.

그대 길을 아는가 중에서

 

 

 

물과 언덕사이에 길이 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렇다고 그 중간은 더더욱 아닌 경계.

그것은 그 어느 것에도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때와 더불어' 변화하는 어떤 지점일 터이다.

여기서 호리란 시점을 말하는것 같다.

그 미세한 시점에따라서 방향은 180도 달라진 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 같다.

 

경계, 사이를 볼 줄 알고 그것의 특이성을 볼 줄 아는 유연성.

대체로 불교의 공 사상과 연관이 많은 이야기 같기도 하고,,

세상만물에 대한 조화로움을 법도로 삼아서

어떤것에도 걸림없이 살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변이 능력, 즉 사물에 따라 조응하는 능력,

사물에 부림받지 않는 능력을  곧 자유를 이야기 하고자 함인 것 같다.

 

 

'인성은 물과 같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지 않은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근 것이 먼지로 이루어졌을 뿐인데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가 데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이렇게 되는 순간, 인간 내부의 경계 또한 무의미해진다. 즉 개별인간들에게 부과된 고유한 정체성 역시 불변의 위치를 고수할 이유가 없다. 인연조건에 다라, 배치에 다라 일시적인 주체로 호명될 따름이지. 근원적으로 모두가 무상한 것이다.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은 자의 영원성을 지키기 위해 안달한다. 무엇보다 이름이 그러하다. 이름이란 대체 무엇인가? 한번 자신의 이름을 돌아보라!

 

삶의 무상성, 권력의 포획장치를 계속 무력화시키는 한편, 끊임없이 새로운 경계를 펼치는 삶과 사유의 궤적들, 낯설고 이질 적인 것들과 소통하는 강렬도는 무상한 연기의 장속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열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연암 또한 일종의 구도자였다. 다만 그의 도량은 깊은 산정이 아니라, 암투가 그치지 않은 중앙정계의 언저리와 왁자지껄한 '저잣거리' 였다는 점이 달랐을 뿐.

 

  일생동안 하나의 고정점을 갖지 않은 채, 때론 떠돌면서 때론 고요히 앉은 채로 유목을 했던 연암은 이처럼 이름은 무상한것이라고 이름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거듭 말한다. 그의 사유의 핵심범주인 명심은 그러한 탈주체와의 극한이다.

 

 내가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이제 내 마부가 말에게 발을 밟혀 뒷수레에 실리고 보니, 마침내 고삐를 놓고 강물 위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올려 발을 모두자, 한번 떨어지면 그대로 강물이엇다.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아 마음에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 나자, 내 귓속에 마침내 강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을 건넜으되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마치 않은 자리 위에서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만 같앗다.  <일야구도하기> 절정이자 대단원이다.

 

 

 

 강물로 옷을 삼고, 몸을 삼고, 성정을 삼는다? 이 경지는 어떤 경지일까. 아무튼 강물과 하나되어 마침내 강물소리가 들이지 않게 된 것은 마음을 청정하게 비움으로써 생사심을 벗어나 우주와 내가 하나되는 경지를 뜻한다. 귀와 눈, 곧 감각과 선임견에 사로잡힌 분별심을 벗어나면 집착해야할 아상이 사라지는데 그러면 대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그가 여행의 초입구에서 던지 화두, '여래의 평등안'과 '소경의 눈'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열하일기>가 발산하는 강렬도는 바로 ''이름'의 중력에서 벗어나 무상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할 수 있는 '노마드'적 여정의 산물일 터, 이제 그 '천의 고원'을 나오면서 나는 다시 묻느다. 대체 연암은 누구인가? 물론 나는 아직도 그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에게 그의 묘비명을 쓸 자격이 주어진다면 , 나는 다만 이렇게 쓰리라.

"살았노라, 그리고 <얼하일기>를 썼노라."

 네 이름을 돌아보라 - 중에서

 

고미숙이 말하는 노마드란

유목을 삶의 조건으로 삼는 사람 혹은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으며 항상 새로운 삶의 조건들을 찾아 움직이기 때문에

한곳에 부리를 박고 살아가는 정착민과 대비된다.

그렇다고 유목을 단순한 이동이나 유랑과 혼돈에서는 안된다.

유목민에게 중요한 것은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창안하는 것이다.

어디서든 들러붙어 능동적으로 삶을 구성하도. 그 대상이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

어떤 것과도 접속할 수 있고 언제든 다른 존재로 변이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유목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목적 삶을 위해 굳이 초원이나 사막을 찾아갈 필요는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이 선 자리를 초원으로 사막으로 만드는 것이다.

도시에서 유목하기, 앉아서 유목하기가 결코 반어가 아닌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