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실존은 자신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조건화 된 삶의 토대위에 있다.
이 조건화된 삶의 토대는 어디에서 오는가.
한 생애서 뿌린 말과 행위의 씨앗들은
그 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또 다음생으로 이어지면서 생의 모습을 결정 짓는다.
전생을 알고 싶거든 현재 내가 받는 것을 보라.
내생의 일을 알고 싶거든 현재 내가 짓고 있는 것을 보라."
<인과경>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삶과 죽음이 끊없이 되풀이하는 삼사라의 세계에서,
인간 존재는 마치 바다에 떨어진 한방울의 물방울처럼
여러 다른 존재들과 어우려져 한 생명의 바다를 이루며 이런저런 관계로 얽혀 있다.
<중아함경>에서는 "인과 연의 법칙을 이해하는 자는 진리를 아는 자이다"라고 했다.
<상응부>경전에서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삶은 동시에 의존적 관계로 엮어 진행 된다.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의 법칙에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존재도 우연히 혹은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은다.
반드시 그 존재를 성립케 하는 원인과 조건이 있다.
나는 너의 원인과 조건이 되고, 너는 나의 원인과 조건이 되어 줌으로써 우리는 함게 존재 하는 것이다.
--너와 나의 관계는 신의 장난처럼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 뿌린 업의 결과이다.--
삶에는 많은 방향이 있으며,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는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 선택의 자유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인간의 삶은 날실과 씨실로 짜 나가는 한 장의 천이다.
지금 이 자리, 그대가 더하는 실은 무슨 빛깔인가?
우리는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나는 무엇인지
과연 나는 하루하루를 나 답게 살고 있는지. <인연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엇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늘의 나는 무엇인가 ---중에서
<인연이야기> 이 책은 작년 구월에 초판 발행된 책이다.
내용은 초기 인도 불교에서 전해오던 설화나 경전 이야기를 주제로 하면서
각각의 소 제목을 달아서 재밌는 이야기들을 알기 쉽도록 풀어 놓았다.
그리고 각각의 소주제 뒤에는 주석 붙이듯 법정스님의
말씀이 부연 설명되어 있어 스님 법문을 듣는 기분으로 읽어도 좋다.
경전이라고 해서 불교에 국한된다기 보다는 누구든지 알아두고 새겨두면 좋은 이야기들이다.
부처님 살아계신 당시의 이야기들이 많으므로,
설화적이고 종교적 이질감이 느껴지는 글들도 있을 수 있지만 방편삼아 읽어도 좋을 것 같고,
어떤 내용들은 2500년이나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실한 과제'라는 생각이 드는 글도 있다.
스님 글은 읽을수록 맑아지고 개운해지는 느낌이 든다.
몸을 씻은 것처럼, 마음을 씻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신성한 장소에 든 것처럼 차분해지고 안정되는 느낌,
향을 싼 종이에서 향내가 나듯이
스님의 책에서는 스님의 향기!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죽음은 과일 속에 들어 있는 씨앗처럼 삶과 함께 살아 간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생에 대한 깊은 존경과 성실성도 잃지 않을 것이다.
생명이 지닌 밝고 아름답고 선량한 가능성을 일깨우지 않고 자기 한 몸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풀을 뜯다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다를 게 무엇이냐--
우리는 새삼스럽지만, '오늘의 나는 누구인가'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허락받은 목숨은 가뭄으로 잦아드는 논물 같다고 했다.
목자가 소를 몰고 가듯 - 중에서
생명이 지닌 맑고 아름답고 선량한 기운, 스님은 '미리쓰는 유서'에서도 이것을 강조하셨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장 큰 가치를 두는 것은 이런 선업을 쌓고자 하는 본성,
'선의지' 만이 사람이 끝까지 저버리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목자가 소를 몰고 가듯'의 본문 내용은 도살장에서 살아가는 소들 이야기다.
날마다 소들이 죽어나가고 있지만,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지 또 자신의 차례가 언제일지도 모르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서로 떠받고 뛰놀면서 좋아하는 소무리를 보면서 어리석음을 얘기한 글이다.
우리 삶도 죽음을 준비하면서 스트레스 받으라는 말씀은 아닐테고
늘 깨어 있어서 보람있는 삶, 가치 있는 삶을 살으라는 말씀이신것 같다.
무의미한 삶을 살지말라는 말씀으로 들어야 할 것 같다.
무상이라는 말은 단순히 덧 없고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생겨나고 없어지고 변화하면서 잠시도 같은 상태로 머물지 않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무상이라는 말의 본뜻은 변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오히려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거기에 가능성이 있다.
변하기 때문에 창조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얼마든지 고쳐 나갈 수 있다.
육신의 무상함을 알고 침울해 할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지 말고
날마다 거듭나면서 후회 없이 알차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기체인 육신은 영원하지 않지만
법신은 무상하지 않고 늘 살아 있으므로
청청한 법신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중음이란 중유(中有)라고도 하는데,
의식을 지닌 중생이 죽음의 순간부터 다음 생을 받을 때 까지의 중간시기를 말한다.
이 기간이 49일 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해 49일 동안 명복을 빌고 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
산이나 바다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다 - 중에서
불교교리를 배우다 보면 제일 먼저 매력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 이 무상개념이다.
상이 없는것, 영원한 것이 없다는 말인데.. 결론은 메일 것 연연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스무살을 갓 넘긴 시절 우연히 참석하게된 법회에서 스님 법문을 듣게 되었는데
그 때 듣게 된 것이 이 무상과 인연법에 관한 말씀이었다.
내게만 그랬는지 모르지만 '바로 이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초발심' 이었다는것은 뒤늦게 알았다.
여기 책속에도 그렇고 예나 지금이나 좋은 선지식이나 지혜로운 사람,
특히 부처님 당시에 어리석어 미혹했던 이들이나, 저 잘난체 기고만장하며 살던 이들이
어느날 부처님을 만나거나 바라문, 선지식을 만나면 그를 스승삼고 출가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그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이것(초발심)이 일시적인 감정일까 라는 생각을 그때도 했었지만
지나고 지금 돌아봐도 역시 마음이 동한 일이었음은 분명한것 같고.
인생의 이정표처럼 한번 발한 그 마음은 언제나 심연 저 안에서 잔잔한 일렁임으로
나를 지탱하게 해주는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내게 그 만큼의 인연뿐이었는지 더 어떠한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젊은 시절 그 만남 만으로도 크나큰 복이었음은 내 생애를 두고 봐도 감사할 일 임은 틀림없다.
경전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남자로 태어나기 더 어려우며
불법 만나기가 더 어렵다고 했는데 나는 불법을 민나는 복까지 누렸으니
남자로 태어난 것보다! 큰 복을 누린셈이다.
법정스님도 스물두살에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집을 나서면서 제일 아까워한 것이 책이어서 '이 책을 어이할꼬' 하며
안타까워 했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있다.
출가 2년후에야 통영 미래사 효뵹스님에게 계를 받고 법명(법정)을 받았다고 한다.
법정스님 출가 초기에는 억새처럼 늘 서슬 퍼런 기세여서어떤 사진기자가
눈빛을 보고는 너무 무서워 사진도 못 찍고 그냥 내려 가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혈기왕성한 승려로 불교 신문사 주필도 맡았었는데 바른 리를 잘해서
제도권 밖으로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 였던 듯...
총무원장으로 부터 당시 곧은 소리를 잘 하는 바람에 '승적을 발탁하겠다'는 엄포까지 받았었고,
결국 정권에 대한 증오심 등, 자신의 수행에 도움이 안되겠다 싶어
그 절(75년) 촉망받던 중진스님 이었지만, 송광사 뒷편 불일암으로 칩거 생활을 들어가셨다고 한다.
이 때부터 '무소유' '산방한담' 등 숱한 산문집들을 쏟아 내신 셈이다.
스님은 칩거에서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는 잠언집에서
“마음이 닫혀 있다면 오늘부터 모두 풀어버리십시오.마음이 물처럼
너그럽고 따뜻하게 흘러야인생에서 화창하고 향기로운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이란 재산도 명예도 아닙니다. 마나 주변 이웃에게
덕(德)을 베풀었는지가 중요하죠. 바로 덕이 사람의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보석같은 말씀들을 남겨두고 가신 스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평화와 위안을 얻는다.
산으로 가셨지만, 당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우리에게 돌려 주시는 삶이셨고,
그래서 당신의 정진은 속인들을 위한 정진도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스님의 공덕은 기록물로 남았으니 뉘라서 당신 삶을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으랴.
원도 한도 없이 편안하게 열반에 드셨으리라..
"너는 어찌 그렇게 어리석어 도리를 모르느냐. 도를 얻으려면 먼저 그 어리석음부터 끊고,
그 다음에 마음을 억제해야 한다. 마음이 선악의 뿌리니라. 음욕의 근원을 끊으려거든
먼저 그 마음부터 다스려야 한다. 마음이 안정되고 생각이 풀린 뒤에라야 도를 얻을 수 있으리라."
부처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열두 가지 인연은 어리석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어리석음은 모든 죄의 근원이요. 지혜는 모든 선행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 어리석음을 끊어 버린 다음에야 생각이 안정될 것이다.
성욕과 도 닦는 일은 여러 가지로 많은 문제를 지닌다.
하나는 쾌락의 극치를 통해 생명의 환희를 나누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쾌락에서 벗어남으로써 해탈의 기쁨을 누리려 한다.
한 경전은 부처님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고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것(성욕)이 하나뿐이었기 망정이지 둘만 되었더라도 도 닦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사십이장경>
--30여 년 전 내가 알던 한 도반이 기도끝에 결심한 바 있어 남근을 끊어 버린 일이 있었다.
입에 올리기가 쑥스러워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 후로는 성에 대한 욕망이 말끔히 가셨는지 궁금한 일이다.
카톨릭 봉쇄 수도원 같은 데서도 그런 욕망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몸을 피가 나도록 회초리로 친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곁가지를 칠 게 아니라 그 뿌리를 다스리라는 교훈은 지혜로운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이 꼭 성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도를 얻기 위해 음경을 끊으려던 비구 - 중에서
부처님 당시에도 수행에 방해가 되는 남근을 잘라 버릴려고 하는 이에게
부처님이 어리석음 부터 먼저 끊어 버리라는 말씀이시다.
부처님께서도 "이것이 하나 뿐이었기 망정이지 둘이었다면 도 닦을 사람이 있었겠느냐"는
부분을 읽다가 나는 혼자서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남성 이라는 느낌, 너무도 인간적인 속내를 비친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고나 할까.ㅎㅎ
왕자로 태어나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고 있었고,
'라훌라'라는 자식까지 두고 살다가 출가 했으니 더욱 그렇지 않았을까.
그래도 사람의 정신이란 참으로 놀라워서 어떤 욕망도 이성으로 제어 할 수 있으니.
수행하는 사람은 홀로 있을수록 넉넉한 뜰을 지닐 수 있다.
마음에 꺼리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보다는 외롭더라도 홀로 있는 게 얼마나 홀가분한 일인가를
겪어 본 사람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홀로 있을 때의 너는 온전한 너이지만,
친구와 같이 있을 때는 절반의 너 밖에 존재하지 않은다고.
또한 홀로 있을수록 함께 존재한다. 수행자는 어차피 홀로 가는 사람이니까.
고독은 보랏빛 노을이 아니라 당당한 있음이다.
어리석은 사람과 짝하지 말라 - 중에서
혼자서도 잘 지내는 사람.
그런 사람은 혼자이면서도 함께 존재할 줄 아는 사람이지 않을까.
어차피 혼자인 삶, 홀로 일때 기쁨이나 행복을 느낄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쉽기야 할까만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해져야
혼자서도 자유로와 지는 것이도, 함께 하는 것에도 익숙해질 수 있을것이다.
하늘이 아름답고 해와 달, 세상 만물에 조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홀로서도 기쁨을 누릴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어찌 홀로라고 외롭거나 고독할까. 가는곳이 어디든, 머무는 곳이 어디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외로움을 덜 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한데서 느끼는 만족감보다 자신을 사랑하면서 느끼는 만족감이 먼저여야
정말이지 고독도 즐길 줄 알며, 자기를 발전 시킬수 있지 않을까.
명상하고, 책 보고, 혼자서 정진하는 삶, 그것이 세간이든 출세간 이든
혼자서 자유로울 줄 알아야 정녕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다.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들을 때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요즘처럼 저마다 자기 말과 주장만을 내세우는 세태 속에서는 단절이 있을 수밖에 없다.
--듣는다는 것은 바깥 것을 매개로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소리를 깨우는 일이다.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사람은 그 말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한다.
미하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별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남한데 전하려면 그것에 필요한 말이 우리 안에서 먼저 자라야 한다."
'말'이 되기까지는 우리들 안에서 씨앗처럼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듣는다는 것은 곧 자기 것을 비우기 위해 침묵을 익히는 기간이다.
침묵 속에서 자란 성인들의 말은 솔직하고 단순하다.
그렇게 때문에 복잡한 의식 속에서 메말라 가는 사람들의 뜰을 되살려 준다.
듣고 또 들어 성인의 지혜를 이룬다 - 중에서
"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남한데 전하려면 그것에 필요한 말이 우리안에서 먼저 자라야 한다."
침묵이 말이 되고 글이 되기 까지,
말하지 않음속에서 걸르고 걸러진 말 그런 맛을 자주 보아야 하는데.
너나 없이 잘 안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을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불쑥 준비도 없이 튀어나오는 말들은 대체로, '하지 않음만 못한 경우'가 많다.
말은 걸르고 걸러서 정화시키고 순화시킬수록 정신도 정진되고 향상되는 것 같다.
말을 다스릴줄 아는 것으로 다듬어지는 것이 인격이 아닐까!
불교의 통설에 따르면, 지은 업에 따라 그 과보를 받는 시기에 세 경우가 있다고 한다.
순현보는 현재 지은 업에 따라 그 결과를 현세에서 받는 것이고,
순생보는 이다음 생에 가서 받는 것이며,
순후보는 내생이 아니더라도 그 자신이 부린 것을 언젠가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일은 그저 되거나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고,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
개인의 집합인 공동체의 인과관계도 마찬가지이며 그것을 共業이라고 한다.
입안의 도끼로 자신을 찍다- 중에서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인과를 생각하면 늘그런 생각이 든다.
세상을 살면서 나를 돌아 보는 것으로 문제삼고 해결삼는 것이 인과법이 아닐까.
후진국에서 삶에 만족도가 높은 것도 이 인과의 정신에 입각한 영향이라고 하는데
세상 무서운줄 아는 것이 인과법 인것 같다.
그리고 인과에는 지금 오늘 이순간의 내 삶의 모습으로 바꿀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세지가 숨어 있다.
알수없는 인생이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것이며, 아름다운줄 알고 살면서
내게 와 닿는 일들에서 좋은일하며 베풀며 선업을 쌓을일 이라는 것이다.
좋은일이든 나쁜일이든 순현보, 순생보, 순후보, 어느삶에서든 업으로 남을터이니,
선업을 쌓을 일이고, 좋은 인연 많이 만들 일이다.
그러니 '복 받으세요'가 아니라 '복 지읍시다'가 정답인 것이다.
'좋은날 되세요'도 좋지만 '좋은날 만드세요'가 더 멋진 말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본래는 깨끗하지만 그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일으킨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면 뜻이 높아지고, 어리석은 자를 벗하면 재앙이 닥친다.
그것은 마치 종이가 향을 가까이했기 때문에 향내가 나고,
새끼줄은 생선을 가까이했기 때문에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사람들은 무엇엔가 점점 물들어 가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악한 사람에게 물드는 것은 / 냄새나는 물건을 가까이하듯,
조금씩 조금씩 허물을 익히다가 / 자신도 모르게 악한 사람이 된다.
어진 사람에게 물드는 것은 / 향기를 쏘며 가까이 하듯
지혜를 일깨우며 선을 쌓아 / 자신도 모르게 선한 사람이 된다.
<법구비유경>
향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 중에서
향기나는 것과, 비린것 표현하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이런 것들,
분별심이 생겨서 '왜 저럴까' 라는 대상이 눈에 띄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게서도 저런 아집이나 편견이 느껴지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방편으로 삼는다면.. 어떨까.
차지하는 것과 쓸 줄 알고 볼 줄 아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쓸 줄도 모르고 볼 줄도 모른다면 그는 살 줄도 모른다.
그저 하나라도 남보더 더 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오늘의 우리들은 탁욕의 노예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지를.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많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일 것이다.
국자는 국맛을 모른다 -중에서
차지하는 것, 사람을 차지하고, 재물을 차지하는 것,
가진것과 베푸는 것은 별개다. 있다고 가능한 것이아니라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니 부자는 물질적 영역만의 것은 아니라, 정신영역이 먼저다.
많이 가지고서도 마음이 닫혀있다면 언젠가 인연이 다해서
그 재물을 다 떠나고 나면(잃고나면)그 아픔의 크기만 크지 않을까.
그 재물의 양만큼 ...
분수에 족할 줄 알고 지금 이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으로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두는 것. 그것이 지혜로운 삶, 편안한 삶이 아닐까.
무슨 일이든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이 인격 형성과 연결되어야 한다.
모든 일이 인격화될 때 그 기능은 새로운 빛을 발한다.
--저마다 지닌 자신의 특성을 살려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삶의 뜻을 드러내야 한다.
사회 전체를 두고 볼 때도 그래야만 건전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건전한 사회란 원만하게 조화를 이룬 사회를 말한다.
자기를 다룬다는 것은 자기야말로 모은 일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말도 바로 이런 뜻에서 나온 가르침이다.
내가 내 인생을 스스로 사는것이지. 그 무엇에 삶이 부림을 당해서는 안된다.
지고한 생의 부림을 당하면서 어떤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다룬다- 중에서
모든 일의 주체인 자신, 먼저 사랑해야 하는 자신.
내가 나를 귀한줄 알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때
존귀한 인간이 될 수 있고, 그런 대접을 받지 않을까.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끊임없이 갈고 닦아 향상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회전체와 원만하고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내가 모든일의 주체 곧 세상의 주체라는 것을 명심하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석가모니가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다.
그가 말해서 중요한 말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말했다는 것이 요지요 본질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세존이시여 몸이 자꾸만 불어나 행동하기가 몹시 불편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다섯 가지 일로 살이 찝니다. 첫째는 자주 먹기 때문이고,
둘째는 잠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잘난체 거드럭거리기 때문이고,
넷째는 걱정 근심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일하지 앟고 놀기 때문이오,
이 다섯 가지가 사람을 살찌게 하니, 만일 살을 빼고 싶거든 먼저 먹는 은식을 줄이고
잠을 덜 자고,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백성들의 일에 대해서 걱정 근심을 하고, 놀지 말고 일을 하시오.
그렇게 하면 전과 같은 몸매를 지니게 될 것이오."
부처님은 다시 계송을 읊으셨다.
사람은 자제 할 줄 알아야 한다.
음식을 보고 적게 먹을 줄 알면
그로 말미암아 살찌는 일 없고
소화 잘 되니 목숨 보전하리라.
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요리사를 불러 말했다.
"이 계송을 잘 외워 두었다가, 내게 음식을 내올 때는 먼저 이 계송을 들려다오."
부처님이 말씀한 체중 조절법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에 속한다.
당연한 상식이 부처님의 입을 빌려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왕이 요리사를 불러 식사하기 전에 계송을 외우게 하는 묘사는 무슨 코미디의 한 장면 같아
절로 웃음을 짓게 한다.
요즘의 교활한 통치자들에 비하면, 어리석으면서도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왕이 훨씬 인간적이다.
내게 만일 무대 예술에 대한 소질이 있다면,
이런 소재를 가지고 멋진 코미디를 한 편 만들어 보고 싶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한 편의 드라마이니까.
비만때문에 고민하던 왕이 부처님에게 살찌는 이유를 묻었고
그 가르침대로 행하여 살이 빠져서 수레와 시종도 마다하고 제 발로 찾아온다는 내용이다.
이에 부처님은 왕에게 당부한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탐욕만 기르면서 복된일은 생각지 않소,
사람이 죽으면 정신은 떠나고 빈껍데기인 몸뚱이만 무덤에 버려지는 것이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정신을 기르고, 어리석은 사람은 육신을 기릅니다.
만일 그런 줄 알았거든 성인의 교훈대로 나라를 잘 다스리시오."
2500년 전 이야기지만 오늘 우리들의 고민과 다르지 않음을 본다.
경전에서는 육신의 탐욕에만 눈이 멀어서 복된 일은생각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런 부분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경전이야기 처럼 죽고나면 그만인 줄은 알지만 살아있으니 그 몸 덕분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 속인의 입장으로 보면 소홀할 수 없는것이 또한 몸이다.
영혼(정신)은 육체에게 육체는 정신에게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것이 生이니
어느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는 것은 편견이랄 수도 있지만,
구도의 삶을 살지 않은 우리 속인들이야 살아있는 동안은
육욕이든, 정신이든 똑 같은 욕망의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다만 보이는 겉 껍데기에 치우쳐 보이지 않은 영역은 등한시 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말라는 질책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다이어트에 대해 현대의학이 밝혀낸 이론,
비만인 사람은 많이 먹는 행위가 신경시스템의 즐거움과 연결되어 있어서
배가 부를수록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자제가 쉽지 않다고 한다.
반대로 마른 체형은 과식이 즐겁기는 커녕 불쾌하도록 신경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서
그 습관이 고정되어 있다고 , 그러니 신경시스템을 바꿔주어야 할 만큼
비만은 단박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굳어진 습관, 그것을 바꾸지 않는한 비만해소는 요원하다고 보는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ㅎㅎ 안타까운 일이다.
절대적인 사랑의 신이 있다면 그 자식인 사람들은 똑같이 당신과 닮게 지어 놓았을 텐데.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여러 가지로 불구가 된 생물(물론 사람도 포함해서)이 있다.
이것은 결코 신의 실수가 아닐 것이다. 실수를 한다면 그가 어디 지고한 신일 수 있겠는가 .
이런 경우 고대 인도 사람들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은 업보라고 생각했다.
업의 결과가 이와 같으므로,
현재 새로운 선업을 쌓으면 얼마든지 고쳐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인과론 운명론과 그 틀이 다르다.
전생을 알고 싶거든 현재 내가 받는 것을 보라.
내생의 일을 알고 싶거든 현재 내가 짓고 있는 것을 보라."
<인과경>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사실을 위증한 과보 -중에서
어렵고 힘들게만 살아가는 사람들이있고, 쉽고 편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보일뿐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다 고만고만한 삶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는게 아닐까.
물론 예외도 있으리라..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났거나 하는
선택 이전에 주어지는 삶의 조건이 인연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면
삶에 훨씬 더 긍정적인 자세가 된다.
그래서 인연법을 알면 운명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를 가지는 셈이다.
인연법이 맞든 틀리든 그런면에서 불교교리가 우리 삶을 한결 여유롭고 긍정적인 메세지를 준다.
종교로 접근하지 말고 사상서를 읽는 다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삶이 고달플 때,
위안이 되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내 경우엔 그랬다!
부처님이 슈라바스티에 계실 때 여러 비구니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브라흐마 신을 모시고 싶거든 부모에게 효도하라.
브라흐마 신으 곧 그 집에 머물 것이다.
인드라 신을 자기 집에 모시고 싶거든 부모에게 효도하라. 인드라 신은 곧 그 집에 머물것이다.
모든 천신을 자기 집에 모시고 싶거든 부모를 공경하라. 모든 천신은 그 집에 머물 것이다.
그리고 만일 성현과 여래에게 공양하고 싶거든 부모에게 공양하라.선현과 여래가 곧 그 집에 머물 것이다."
우리가 해와 달을 바라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부모의 은혜 아닌 것이 없다.
가령,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올려놓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모시고
백 년 동안 다니면서 갖가지로 공양해도 은혜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잡보장경,,
나이가 들면서 제일 뿌듯한 것은 부모님께 잘해드렸을 때,
부모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고
또 자식이 잘 되어 기쁜 소식을 전해 줄 때인것 같다.
이렇게 자식을 두고 부모로 살아가는 우리 삶은 끊임없는 관계의 연속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해야 세상살이가 신이나고 원만해진다.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주변을 한 번 돌아볼 일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우리삶의 씨줄과 날줄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인명 존중뿐아니라 생명 존중으로 그 뜻이 확산될 때 인간의 뜰은 그만큼 넓어질 것이다.
부모를 공경 공양한 인연 공덕 - 중에서
알 수 없구나, 그 마음이여,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으니..
내 마음을 참으로 알고 있다면 다른 이의 마음도 알 수 있다.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저마다 다른 여러 개의 마음 같지만, 그 뿌리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
눈뜬 사람들의 가르침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라고 했지
자기 자신에게 머물거나 그치라고 하지는 않앗다.
자기를 인식하되 거기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이다.
자기에게서 시작해 세상(이웃)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세상에 있어야 한다.
이 조그만 책 안에 들어 있는 비유와 인연 설화의 주제도 바로 이점에 있다.
따라서 참되게 살려는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를 당하는 그 속에서 최선의 길을 발견한다.
"어지러운 세상이야말로 좋은 시절 아닌가."
이렇게 말한 조주 선사의 주장은 결코 역설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뿐 아니라 늘 어지러운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들의 현실을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상황을 자기를 형성해 나기기 위한 좋은 시절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날마다 좋은날 (日日是好日)!
마음속 번뇌가 가장 무섭다 - 중에서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불행한 일이 닥쳐도 곧 회복하지 않을까.
삶의 기초를 환경이 아니라 정신에 두기 때문에 그 어떤 조건에도 끄떡없을 것이다.
만약에 조건에만 연연하여 조건이 있을때만 유지되는 어떤 감정상태라면
무상이라는 관념에서 접근하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가.
변하지 않은 것, 향상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인데.. .
자신을 다루는 길은 몸으로 하는 행동과
입으로 하는 말과 마음으로 하는 생각을 잘 다스림으로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열반의 경지란 다른 뜻이 아니라 행동과 말과 생각
이 세가지 (三業)가 가장 청전한 상태를 가리킨다.
"자신을 잘 다루는 사람만이 마지막 그곳까지 갈 수 있네"
마지막 그곳이란 열반을 가르킨다.
코끼리를 잘 다루는 법과 자기 자신을 잘 다루는 법 - 중에서
몸으로 하는 행동,
입으로 하는 말,
마음으로 하는 생각
이 세가지가 존재를 결정짓는것이며,
궁극에 다달아야 할 목표, 자기 자신을 다루는 법이라고 한다.
'에리히 프롬'은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다'고 했다.
존재, 살아있음 만으로 행복의 조건은 갖춘셈이고,
말과 행동 생각으로 매순간 조금더 자신의 삶을 깨워두면
훨씬 더 복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살아있어서 아름다운 세상, 그러니 아름답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고,
먼 훗날 내가 지나온 날을 돌아 보았을 때, 흐뭇하고 뿌듯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말, 행동, 생각을 잘 다루어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게 잘 사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인연 이야기>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말처럼 쉽기야 할까만은 그래도 좋다.
알고 있음만으로도 동(動)하는 마음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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