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삶을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 누구도 닮지 않으면서 내 식대로 살고 싶다.
자기 식대로 살려면 투철한 개인의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 질서에는 게으르지 않음과 검소함,
단순함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도 포함된다.
그리고 때로는 높이높이 솟아오르고,
때로는 깊이깊이 잠기는 삶의 리듬도 뒤따라야 한다.
사람이 무엇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저마다 자신이 선택해야 할 삶의 과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 각자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독창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단 하나뿐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기답게 사는 일이 긴요하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책 뒷 표지에 실린 글..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하루 세 끼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
육신의 건강을 지탱하기 위해 먹는 이 식사를 취미로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도 함게 깃들어 있다.
육신의 주림은 음식으로 다스릴 수 있지만, 정신의 주림은 무엇으로 다스리는가.
탐구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들의 정신은 잡초로 우거진 황량한 패전이 되고 말 것이다.
-- 우리가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지 그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책(종교적인 이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 책을 대할 때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깨마다 자신을 읽는 일로 이어져야 하고,
잠든 영혼을 일깨워 보다 값있는 삶으로 눈을 떠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펼쳐 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런 책까지도 읽을 수 있다.
책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책 속에서 그 길을 찾으라 1993
무엇을 읽을 것인가 - 중에서
'책 읽는 일이 자신을 읽는 일이어야 한다'
책을 읽다가 '아하!'하고 깨치게 될 때, 또는 전혀 몰랐던 세상 이면을
간접 경험하게 될 때, 등 책은 우리 정신의 일용할 양식이다.
어떤 일에서도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하는 것은
자연, 사람, 사회현상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가.
그래야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소통하면서,
그속의 나를 성찰하는 생활까지 가능할 것이다.
식물에도 마음이 있느냐고? 암, 있고말고.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는 저마다 형태가 달라서이지 영(靈)이. 그 마음이 깃들어 있다.
산 것과 죽은 것의 구분은 영이 깃들어 있느냐 나가 버렸느냐에 달렸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 기준으로만 속단하기 쉬운데,
인간은 이 무변광대한 우주의 큰 생명체에서 나누어진 한 지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가 산에 가거나 나무나 꽃과 함께 있을 때 우리 마음은 차분해지고 아늑한 기분을 느낀다.
그것은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 있는 식물들의 심미적 진동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 인간들이 어둠 속에서 목소리로 서로를 분간하듯이 꽃들은 향기로써 서로를 분간하며 대화한다.
꽃들은 인간들보다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확인한다.
사실 인간의 말이나 숨결은 사랑하는 연인끼리를 제외하고는
꽃만큼 미묘한 감정과 좋은 향기를 풍기지 않는다.1993
식물도 알아듣는다 - 중에서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있는 식물들의 심미적 진동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는것,
산에 가면 그리 편한 것이 식물의 영적인 기운을 받아서 그런 것이었다니,
어느 식물학자가 발표한 것을 법정스님이 인용한 부분인데,
숲속이나 풀밭, 나무 한 그루만 봐도 차분하고 아늑한 기분이 들었던 건,
그 식물의 영적인 충만감 때문이라고 한다..
좋은 마음이 되는 것,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본능적인 느낌이었다니
좋은 사람과 함께 산행을 하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가.
나무나 꽃에게 자주 눈 돌릴 일이다. ㅎㅎ 산행을 즐길 일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 깃들어 있다는 영, 사람도 좋은 기운을 주는 사람이 있다.
같이 있으면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도 영이 충만해서 그런것일까!
향기 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산에 자주 가는 습관을 들여야 겠다.
삶이 고달프고, 허전할 때 힘들때 찾는 것도 위로나 치유를 받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때띠로 사람속에서 보다 자연속에서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걸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나무만큼 위안을 주지 못할 때도 있다는 애기일 것이다.
소통가능한 대상, 나와 성정이 비슷해서 잘 통하는 사람이 있다면 복이다.
상상력이란 일찍이 자신이 겪은 기억의 그림자일 것이며,
아직 실현되지 않은 희망사항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상상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어둡고 불쾌한 상상력은 우리들을 음울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생각이나 상상력도 하나의 업(業)을 이루기 때문이다.
- 꽃을 사랑하고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우리들 자신도 얼마쯤은 꽃이 되어 갈 것이다.
- 새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생명이 살아서 약동하는 소리요
자연이 들여주는 아름다운 음악이다.
세상이 온통 입만 열면 하나같이 경제 경제 하는 세태다.
어디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삶의 가치가 있는지 곰곰히 헤아려 보아야 한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경제만이 아니다.
행복의 소재는 여기저기에 무수히 널려 있다.
그런데 행복해질 수 있는 그 가슴을 우리는 잃어가고 있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1993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중에서
상상력, 그 무한한 에너지! 삶의 활력이며 여유며 희망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이 든다는 것은 상상력과는 멀어지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실현 불가능한 상상력은 공허라고...상상력 부재가 우리 삶을 얼마나 강퍅하게 만드는지
상상력이 에너지가 된다는 걸 근자에 제대로 경험하고 있다.
상상력은 에너지를 내 안에서 발원시키고,
그것이 일상의 소소한 말초에까지 연결되어 진다는 것을 느낀다.
'본데없는 행동'은 상상력 결핍 때문 아닐까.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이나 생각으로 가능한 영역은 제쳐두고, 보이는 것만 보고, 나머지는 볼려고도 하지 않거나,
보이는 것 없음으로 단정지어 더이상 배려없음의 마음상태라는 생각을 해 본다.
본데없음은 볼것 없음내지는 보이지 않음이고, 결국
자기 마음자리 추스리기로 봐서는 퇴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본데 없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ㅎㅎ 좀 우스운 논리가 된 것 같다.
상상력이 보이지 않은 에너지를 재생하고, 그것이 우리를 기름지고 풍요롭게 한다.
거름 주듯 사유 가능한 인간에게 상상력은 축복이다.
망설이지 말고 상상할 일이다. 공상가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상상력의 힘을 믿고 그 사유의 폭을 넓혀 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슴이 넓다는 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말과 상통하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이런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 다음 어딘가에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집을 한 채 짓고 싶다.
사람이 살기에 최소한의 공간이면 족하다.
흙과 나무와 풀과 돌, 그리고 종이만으로 집의 자재를 삼을 것이다.
흙벽돌을 찍어 토담집을 짓고, 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이면 더 바랄 게 없다.
지붕은 물론 억새나 볏짚, 아니면 산죽으로 덮으면 된다.
일 보는 집(정랑)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그것도 또한 흙집으로 지을 것이다.
- 마루 끝에 나무로 짠 의자를 하나 놓아두고 무료하면 거기에 앉아 책도 읽고
솔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할 것이다.
부엌은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도록 하고,
부뚜막에는 크지 않은 무쇠솥을 걸어 익히거나 끓게 한다.
한쪽에 칸을 막아 간소하게 주방 시설을 하고 싶다.
거기에 대나무로 홈대를 이어서 시냇물의 한 줄기가 지나가도록 하면 비바람이 치는 날에도 무방할 것이다.
아, 나는 이렇게 꿈을 지니고 있다. 이런 내 꿈이 금생에 이루어질지
아니면 내생에나 가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꿈이 설사 희망사랑에 그친다 할지라도 지금 나는 풋풋하게 행복하다. 1993
떠오르는 두얼굴 - 중에서
스님은 이 글을 93년도에 쓰셨다.
신문에 연재한 글들을 모은 것인데 불일암에서 거쳐를 옮겨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기거를 시작한 때 였던 것 같다. 산골생활 중 헐렁한 속옷바람이나 맨발로 흙을 밟고 지내다가
외출할 일이 있어서 양말을 신을 때부터 옥죄는 느낌을 표현한 글도 있다.
그 옥죄는 느낌이 세상에 대한 느낌 같아서, 오두막으로 돌아오면 만사 제치고 훌러덩 벗어버리고 나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고, 문명과 자연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심신이 함께 실감하는 때라고...
문명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편리해지고 편해진다고 생각하던 것과는 상반된 개념인데,
18세기 계몽사상가 루소도 "자연으로 돌아가라" " 물질적 진보는 인간 불행의 원인"이라고 했으니.
3세기 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결 보면 오늘 날의 발전된 물질문명만큼 우린 불행한 것일까.
편안함과 편리함이 행복을 대체하는 결과물일까..
종교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종교가 아닌지를 냉정히 가려 보라.
이것을 가려 볼 수 있다면, 승려나 사제 혹은 목사나 책들이 더 이상 우리를 속일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놓일지라도 믿고 따를 환상이나 허상을 만들어내지 않게 될 것이다.
- 절이나 교회에 종교가 있다고 잘 못 알지 말아라.
어던 종교든 일단 조직화되고 제도화도면 종교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그때 그 종교는 더 이상 신이나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
독선과 아집에 대한 변명이 되어 버린다.
종교의 틀 속에 갗힌 사람들은 어떤 의식이나 상징을 종교로 잘 못 알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신은, 부처와 진리는 이런 곳에는 없다.
-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 지켜보는 사람은, 언덕 위에서 골짝을 내려다 보듯이 거기서 초월해 있다.
지켜보는 동안은 이러니 저러니 조금도 판단하지 말라. 강물이 흘러가듯이 그렇게 지켜보라.
그리고 받아들이라. 어느 것 하나 거역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그러면서도 그 받아들임 안에서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본래의 자기 자신과 마주하라.
삶은 영원한 현재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그리고 이 자리에 있을 뿐이다.
무슨 일이고 이 다음으로 미루게 되면 현재의 삶이 소멸되고 만다.
현재를 최대한으로 사는 것이 수행자의 삶임을 잊지 말자.
-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자신 안에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득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신비로운 세계다.
홀로 있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고독한 존재다.
그 고독과 신비로운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거듭거듭 안으로 살피라.
- 공부가 됐건 일이 됐건 전적으로 하라.
어중간한 것은 사람을 퇴보시킨다. 하다가 그만두지 말라. 안 한 것만 못하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은 한 무슨 일이든지 전력을 기울여 하라.
그때 자기 안에서 어던 변혁이 일어난다.
그 변혁의 과정에서 참된 자기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1993
수행자에게 보내는 편지 - 중에서
'수행자에게 보내는 편지' 글은 수행자뿐 아니라 세간의 우리도 알아두어야 하는 이야기 같다.
종교의 본질을 가려 볼 수 있다면 승려나 사제 목사나 책들이 더 이상 우리를 속일 수 없다.
종교인 이면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스님의 성찰과, 필력,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주변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안하거나 호기심 또는 재미로, 대사를 앞 두었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등등의 이유로 점이나 다른일을! 하는 경우를 보게된다.
그 상황을 역이용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니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는 것이다.
오래전 어느 스님으로 부터 들은 얘기다.
경전에 열심히 정진하여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는 안목(혜안)이
생길수도 있다고, 그렇지만 설사 그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그것을 발설하여
이러쿵 저러쿵 함은 승려의 도리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혜안을 얻었더라도 신도들을 상대로 어떤 말도 감히 하지 않음이 참 된 도리라는 것이다.
그렇거늘,, 그 도량에 미친것인지 미치지 못한것인지는 모르지만,
주변에 절에서, 스님에게 들었노라는 이야기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신도들이 물으니 관심있어 하는 부분이 그쪽이라서 어쩔수 없이 답하는 것인지.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나는 묻는 쪽이나 답하는 쪽이나 나는 같은 부류라고 본다.
심한경우에는 절이란 곳이 그런 것을 묻고 알려주는 곳으로 오인하여 찾는 신도들도 있으니
얼마나 한심하며 부끄러운 일인지.
그런 부분들 때문에 종교의 본질을 냉정히 살피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내 주변에도 몸이 편치 않은 시동생 때문에 몇 년 째 병치례로 마음고생 하는 지인이 있다.
그분이 다니는 사찰에서 그런 사정을 알고 위로해 주거나 나아지고 향상될 수 있도록
정신적인 부분이라도 도움이 주어야 함이 도리일 터인데,
풀어주어야 한다며, 그 비용이 천만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처음엔 오백을 얘기했는데 옆의 스님이 저 집은 형편이 좋다고 하니,
그러면 천만원을 들여서 제대로 하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처음들을땐 오백이면 건강하게만 된다면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앚앉은 자리에서 다시 천을 부르는 스님을 보면서 기막혔다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오죽했으면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런 일이 닥치면 당사자가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가 기도하고 축원해준들 얼마나 좋아지며 그 영향이 미치기나 할까.
불교에 자기가 지은 업은 누구의 것도 아니고 자기가 받는다는데.,,
그러니 시동생 스스로 건강을 살펴야 할 것이다. 정신건강에서 육신의 건강까지..
이런 얘기를 듣다보면 화가 치민다. 닥쳐보지 않은 생속이라 섣불리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상황에서라도 아닌건 아닌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말기 암 환자들이나 현대의학으로 불치병이라는 판명이 났음에도
보호자나 환자를 상대로 만병통치약 운운하는 이들을 보면 똑같다.
어느작가가 무식한건 죄라고 하더니.. 그짝이라고 하면 너무 과한 표현일려나..
몰라서 무식한것 보다 어리석은 무식을 얘기한 부분인것 같지만,, 아닌건 아닌 것이다.
한사람의 맑고 조촐한 삶은 그 자신이 의식을 하건 말건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
달빛 같은 혹은 풀향기 같은 은은한 그늘을 드리우게 마련이다.
-삶의 향기란, 맑고 조촐하게 사는 그 인품에서 저절로 풍겨 나오는 기운이라고 생각된다.
향기 없는 꽃이 아름다운 꽃일 수 없듯이 향기 없는 삶 또한 온전한 삶일 수 없다. 1994
청빈의 향기 - 중에서
삶의 향기, 사람의 향기, 향기 없는 꽃이 아름다울 수 없듯이
향기 없는 삶또한 온전한 삶일 수 없다.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향기로 내 주변을 채울수 있다면.
사람향기야 말로 천리 만리 퍼져나갈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아니 천년 이천년 전의 향기까지 맡을 수 있는 책도 있으니.
사람이야 말로 꽃보다 향기롭고 아름다울 이유가 무궁무진하다.
그러면서도 불완전한 존재라 때때로 어리석기도 하고, 그게 우리 살아가는 모습이니 어쩔까.
좋은 것을 많이 접하고, 좋은 사람의 좋은 향기를 많이 맡다보면
자신에게서도 어느덧 그 사람들의 향기가 베어들고, 자신만의 향기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향기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정진할 일이다.
근묵자흑이라고 했으니.. 자기 하기 나름이다.
산의 고요와 침묵은 인간에게 명상의 씨를 뿌려 주고,
바다의 드넓음과 출렁거림은 꿈과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우리 삶에는 산만 있고 바다가 없어서는 안 되고,
또한 바다만 있고 산이 없어서도 균형 잡힌 삶을 이룰 수 없다.
부성적인 산과 모성적인 바다의 요소가 함께 조화를 이룰 때 삶은 생동감을 잃지 않을 것이다.1994
봄나물 장에서 - 중에서
산과 바다, 부성적인 산과 모성적인 바다의 조화
가끔 바다가 그리운것은 세상일 조화로움에 순응하고자 하는 본성이었던 겐지.
산이 주는 충만한 기와 바다가 주는 더 넓은 평안,
산과 바다처럼 어울려 균형감각을 잃지 말고 살아야 잘 사는 일인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그 나머지는 모두 세상에 속한 것이며,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소속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보다 뜻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 것인지.
그때 그때 자신의 분수와 처지에서 냉정하게 생각을 가다듬어야 한다.
불필요한 것들에서 벗어나 소유를 최소한의 것으로 제한하는 것은
정신생활을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하는 요소다.
'유교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만족할 줄을 알아야 한다. 넉넉함을 아는 것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편안하다.
그런 사람은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마음에 걸림이 없어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을 모르는 사람은 설사 천국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1993
정직과 청빈 - 중에서
만족하는 삶은, 기대치를 낮추는 일이다.
상대를 위한 기대치는 낮추고, 나를 향한 기대치는 높여야 한다.
그래야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향상될 때 내 주변은 절로 향상되며
내가 만족하며 낮추었던 상대도 어느덧 한단계 레벨업되어 있음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만나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대치를 낮추고,
자기 자신을 향한 기대치는 높이는 일인것 같다.
'할수 있다'는 기대치야 말로 삶의 원동력이다.
풀과 나무는 다들 자기 나름의 꽃을 피우고 있다. 이웃을 닮으려 하지 않고,
패랭이는 패랭이답게, 싸리는 싸리답게, 그 자신의 삶을 꽃피우고 있다.
생명이 깃들어 잇는 것은 어떤 형태로건 저마다 삶의 가장 내밀한 속뜰을, 꽃으로 피워 보이고 있다.
그래야 그 꽃자리에 이 다음 생으로 이어질 열매를 맺는다. 1993
연못에는 연꽃이 없더라 - 중에서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은 어떤 형태로건 저마다 삶의 가장 내밀한 속뜰을 꽃으로 피워 보이고 있다.
나답게 사는 일은 내밀한 속뜰을 꽃으로 피워보는 일이라는 문장이 좋다.
나만의 꽃을 피우고 나만의 열매를 맺는일.
생명체들끼리 조화롭게 살아가는 토대는 사람의 소중함을 아는것이 기본이 아닐까.
세상에는 소중한것들 뿐이다. 꽃도 나무도 사람도 모두다 귀하며 소중한 것들이다.
그것을 알아가는 일이 내 속뜰의 꽃을 피우는 일 같다.
사람에게도 그 사람 나름의 향기가 있을 법하다.
체취가 아닌 인품의 향기 같은것.
그럼 나는 어떤 향기를 지녔을까?
내 자신은 그걸 맡을 수 없다.
꽃이 자신의 향기를 맡을 수 없듯이.
나를 가까이하는 내 이웃들이 내 향기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1994
선진국 문턱은 낮지 않다 - 중에서
인품의 향기,
꽃의 향기.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
산업사회의 생산자는 소비자가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낸다기보다는
소비자의 욕구와 욕망을 자극하는 물건들을 만들어 낸다.
소비자는 결국 생산자에 의해서 조작당하고 유도된다.
이때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광고다.
광고의 그럴듯한 단어들에 현혹되지 말라.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어떤 알맹이와 함정이 들어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의 처지와 분수에 눈을 돌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한때의 기분이나 충동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들 자신이 마침내 쓰레기가 되고 만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들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그러니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있지 않다.
없어도 좋을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만큼 홀가분해져 있느냐에 따라 행복의 문이 열린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고 하지 말라.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익히 체험하고 잇듯이.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의 소중함마저 잃게 된다.
가수요란 허욕에서 싹튼다. 모자랄까 봐 미리 걱정하는 그 마음이 바로 모자람 아니겠는가.1995
덜 쓰고 덜 버리기- 중에서
스님이 늘 강조하던 행복의 척도 그것이 잘 안되는 건 누구나 다 공감하는 일이다.
하나의 소중함을 모르진 않지만 두개 가졌을 때 더 좋은 것이 우리 속인들의 속성이다.
이것에서 놓여나기가 쉬운일이 아니다. 그런줄 알고,
내 분수에 맞지 않게 현혹되거나 어리석게 살지는 말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물건이 나를 소유한다고 할 만큼 많은 물건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놓여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떤것이 바람직하다는 정도는 알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우리또래 아줌마들 모임, 특히 내주변은 덜한 편이지만, 한다리 건너 들어보면
명품 핸드백은 기본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서 심한경우에는 들지 않음이
오히려 희귀성에서 명품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시점까지 온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들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현혹되는 모습들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들고 다니는 명품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느니,
시인이 마음이 엿보이는 한줄 시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그래선지 내 주변에 명품가방든 이도 없고 이야기 하는 이도 없어 편하긴 하다. 유유상종이다.ㅎㅎㅎ
나중에 누군가 명품을 사준다고 하더라도 지금 마음 같아서는 사양할 것 같다.
그러니 아마도 내가 살아가는 동안은 가방가격보다 심하게 붙은
브랜드 값의 거품까지 떠안고 명품을 사는 일은 없을것 같다.
그것이 내 분수에 맞아서 라기 보담 그렇게 편승되어 휩쓸히는 세태가 용심 날 정도로 싫은 것이다.
이것도 편견이고 아집인지 모르겟다.
나중에 아닐수도 있을 때가 올지도 모르는데 ㅎㅎ
너무 단언해서 후회할일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내 마음은 그렇다. ㅎㅎ
재작년이던가. 휴거 소동으로 세상에 구경거리가 한판 벌어지는가 싶더니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 타종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왈가왈부하기는 주저되지만, 무엇이 진정한 종교이고
어떤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인지 이 자리를 빌려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다른 저의는 조금도 없다.
종말론은 일찍부터 심심치 않게 거론되어 온 주장이다.
거두절미하고 적어도 우리 시대에 지구의 종말은 없을 것이다.
지구가 종말을 향해 굴러가도록 방치할 만큼 오늘날의 지구인들이 그렇게 우매하지도 않다.
오늘도 사과나무를 심는 스피노자의 후예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이 어디이고 지옥은 어디인가.
이웃과 함게 기쁨과 슬픔을 나누면서 만족할 줄 알고 오순도순 살고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일 것이고, 아무리 가진 것이 많더라도 마음 편할 날 없이 갈등과
고통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 아니겠는가.
휴거를 믿고 재산을 바쳐 가면서 신을 찬양하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만 선별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신의 존재가 너무 편벽되고 옹졸해진다. 그런 신이 어떻게 이 세상 만물을 주재할 수 있겠는가?
신은 하늘 높을 곳 어딘가에 앉아 있는 어떤 인격체가 아니다.
만약 어떤 종교가 그를 믿지 않는 계층에 대해서 배타적이라면 그것은 신의 종교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우주 만물 속에 두루 존재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신은 그 어떤 종교와도 독점 계약을 맺은 적이 없다.
이런 가르침이 있다.
"'나'를 위해서 하려고 하는 온갖 종교적인 태도는 마치 돌을 안고 물위에 뜨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 '나'라고 하는 무거운 돌을 내던져라.
그러면 진리의 넓은 바다에 떠올라 진실한 자기를 살리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은 어떤 이익이나 영험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순순한 믿음 그 자체를 위해 닦는다.
종교는 하나의 교육과정이다. 이해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자기 교육이며,
이를 통해 우리 삶이 보다 풍요로워지고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종교는 진실을 스스로 탐구하고 찾아내는 행위다.
세상의 많은 자유가 있지만 궁극적인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자유다.
그는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으면, 한 사람의 개인으로 그 자신의 삶을 살며 순간 새롭게 태어난다.
- 오지도 않는 휴거를 무작정 기다리게 아니라 지금 바로이 자리에 있는 이웃과 사랑을 나누라.
가기는 어딜 가는가. 지금 그 자리에서 사랑으로 천당을 이루라.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1995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 - 중에서
명징한 스님의 가르침 군더더기라고는 찾아 볼수 없는 이런 이치를 논한
문장들을 읽다보면 책을 왜 읽어야하는지 저절로 답을 찾게 된다.
스무살적 무소유를 읽고 또 읽어서 스님의 바른 판단력이나 가치관을 엿보며 닮고 싶었던 과정들이
책이라서 가능했던 것처럼, 좋은 사람, 좋은 향기를 맡고 싶다면 다양한 책들을 많이 읽을 일이다.
언제나 나와 견주어 나라면 이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읽으며,
저자에게 혹여 보이는 편견이나 아집이 있다면 스스로 글쓰기를 통해서 반박도 해보고,
더 이상적인 시제를 뽑아 낼 수 있는지 고민도 해보고,
그러다 보면 사유의 폭도 넓어지고 사고력도 향상되는 것 같다.
좋은 책은 곱씹을 수록 단맛이 난다.
그러므로 스님이 서두에 내세운 말처럼 배고프면 밥먹듯이
책을 습관적으로 읽고 사색하다 보면 얼마나 풍부해질까.
이웃을 기쁘게 해줄 때 내 자신이 기뻐지고, 이웃을 괴롭게 하면 내 자신도 괴로워진다.
이웃에 대해서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이웃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내 자신의 내적인 평화도 함께 가져올 수 있다.
감정은 소유되지만 사랑은 우러난다.
감정은 인간 안에 깃들지만 인간은 사랑 안에서 자란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동정과 이해심을 지니는 것.
자연스럽게 이웃을 돕는 일. 낯선 사람에게도 너그러운 것. 따듯한 미소를 보내는 일.
부드럽고 정다운 말씨를 쓰는 일 등 등 바로 이런 것들이 사라이며 친절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면 이웃으로서 그 도리를 다하는 이것이 사랑이며 친절이다.
삶이란 누구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직접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순간순간 부딪치고 이해하면서 새롭게 펼쳐가는 기운같은 것,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는 곧 가슴속의 평화를 이룬다.1995
친절하고 따뜻하게 - 중에서
사랑은 우러나는 것이며, 사랑안에서 자란다
사랑의 은유를 이렇게 멋지게 풀어내다니. 그런것 같다.
사랑은 끊임없이 향상되게 하고. 스스로도 키우고 주변을 키운다.
살아가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고.
그 사랑도 나이가 들수록 훨씬더 성숙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우러나고 자라는 사랑,, 공감가는 표현이다.
현재 우리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한 생각이나 입에 담는 말
그리고 몸으로 하는 행동은 지금 한때로 그치지 않고
이 다음의 나를 형성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하고 결단한 의지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누가 대신해서 해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지요. 1995
흥겹고 멋진 음악처럼 - 중에서
생각이나 말,
그런 것들이 나를 만들고 내 향기를 만든다.
그러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
유능한 제자는 스승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유능한 스승 또한 자기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이르는 옛말에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
"얼음은 물에서 이루어지지만 물보다 차다"는 말이 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입산 출가 전이나 그 이후 수많은 스승들의 은혜 속에 형성되면서 살아왔다.
내 앞에서 직접 가르쳐 보인 현실적인 스승도 있었지만, 역사적인 인물로서 기록을 통해
많은 은혜를 끼친 스승들도 있다.
이런 수많은 스승들이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났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그만큼 탐구하고 열망하면서 찾았기 때문에 그 메아리로 응답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세속적인 인습과 기존의 가치와 전통을 극복하도록 부추긴 선사들의 가름침은
우리들의 영혼을 늘 깨어 있도록 고무시킨다.
그리고 구도의 길에서 시들지 않은 영원한 젊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1996
스승과 제자 - 중에서
내가 그만큼 탐구하고 열먕하면서 찾았기 때문에 그 메아리로 응답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수많은 스승들. 우리 삶에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많은 스승들이 있다.
관심을 가지고 보면 모두 나와 관련한 것들이 된다.
세상은 보기 나름이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마음이 없으면 하나도 안 보이고 안 들리며
마음을 열어두면 별의 별 것이 다 보이고 들린다.
꽃속에서 나비를 볼 수 있고,
꽃속에서 겨울을 볼 수 있고,
생명의 아름다움과 환희도 볼 수 있다.
당연히 사랑하는 님도 있고 그리운 님도 볼 수 있다.
해저물녘 노을이나, 푸른 창공의 하늘을 보면서도 마찬가지다.
내마음이 동하는 만큼 세상은 내것이 된다.
행복의 조건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있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만큼 자유로운가에 있다.
출가 수행자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가난할수록 부자다.
아무것도 갖지 않아 안팎으로 텅 빈 그 속에서 충만감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은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고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자신이 지닌 특성을 묵혀 두지 말고 그 특성을 살려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하라.
어떤 모임에서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반거충이는 수행자의 대열에 들 수 없다.
큰 원으로써 이웃에 덕의 그늘을 드리우라.
출가 수행자들에게 - 주에서
자신의 특성을 살리라는 마지막 페이지의 가르침은
깨어있음과 부단한 노력(정진)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편한대로 사는 것에 익숙하고 편리함에 길 들어 있기 때문에.
당장에 배고픈 식욕외에는 우리는 잘 잊는다.
스님의 산문집을 보면서 성찰적 글쓰기에 자극을 받는다..
스님은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그 사람 책만 골라서 읽은적이 있다고 했는데.
나도 그런면에서 편식이 심했었다.
올해부터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보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지나간 세상일에 좀더 관심을 두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오래 되었지만 건재한 고전을 접하고 싶다
잘될지 모르지만 성찰에도 못 미치는 블로그 글쓰기가
내게 동기부여를 해주고 있다.
-시시로 물으라
"나는 누구인가?"라고
니것은 모든 수행자의 근원적인 물음이다.
"나는 누구인가?" 1996
출가 수행자들에게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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