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쳤다. 이 소설을 불과 한 달 반 만에 썼다. 폭풍 같은 질주였다.
창밖엔 자주 북풍이 불어재꼈고 폭설이 내렸다.
나는 우주의 어느 어둑어둑한 동굴에 혼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아
내 안에서 생성된 날 선 문장들이 포악스럽게 나를 앞으로 밀고 나갔다.
나는 때로 한없이 슬펐고, 때로 한없이 충만했다.
다 쓰고 났을 때, 몸 안에서 무엇인가. 이를테면 내장들이 쑥 빠져나간 듯했다.
나는 쭉정이가 되어 어둔 방구석에 가만히 누웠다. 그리고 보았다.
저만치 흘러가던 나의 젊은 날이 어느새 돌아와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5월의 물푸레나무처럼 내가 다시 푸르러졌다고 느꼈다.
어느덧 봄이었다. 나는 햇빛 환한 봄길로 걸어나갔다.
민들레 홀씨만큼 몸이 가벼웠다. 바람으로 천지를 흐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길 끝에 서서, 막 세수하고 난 어린아이처럼 킥킥거리고 웃으면서 흥얼흥얼했다.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 친구여, 모든 해답은 나부끼는 바람속에 있다.
라고 나는 노래 불렀다. 놀랍게도 봄이 예민해진 내 젊은 살肉을 산지사방으로 부드럽게 관통했다.
행복했다.
지난 십여년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낱말은 '갈망渴望이었다.
<촐라체>와 <고산자>, 그리고 이 소설 <은교>를, 나는 혼잣말로 '갈망의 삼부작'이라고 부른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을,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의 눈물겹고 뜨겁고 푸른 '갈망'의 화두를 일단 접는다.
새 소설이 나를 부르고 있다.
2010년 이른 봄 한밤에.
북한산 자락에 엎디어
--작가의 말...
신작 <은교>가 나왔다는 글을 올 봄 신문 신간면에서 접했다.
칠십 노인이 열 일곱 소녀를 사랑하는 독특한 장치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기사에 인용된 작가의 말 첫문장과
"지난 십여년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갈망渴望이었다."라는 문장때문이었다.
지난해 <설렘>으로 박범신 선생님 글을 읽었을때 느껴졌던
그 진솔한 울림이 <작가의 말>을 통해서도 느껴졌다.
정제되고 절제된 인품이 느껴졌던 문장들이 다시 궁금해졌고,
이래 저래 바빠 미루다가 이제서야 읽게 된 책, 은교!다.
소설이야말로 작가의 내면을 표출하기에 가장 좋은 장르라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은적이 있은데,
주인공 老시인 이적요와 제자 서지우를 통해 들여다 보이는 치밀한 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탄탄한 구조를 엿보는 느낌이라니..
장편이지만 읽는 동안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있는 작품이었다.
칠십노인의 정서를 맘껏 헤쳐놓은 것 또한 읽는 즐거움이었다.
열일곱 은교를 사랑하는 스승과 제자,
젊은 제자의 사랑과 늙은 노시인의 사랑이 어떻게 다른지도 제시해 놓아 좋았다.
꼭 제 그릇만큼 제 크기만큼 사랑도 그렇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작가를 염두에 두고 읽기 시작했지만 읽을 수록 작품속 인물에 집중하게 되는 묘한 끌림이 있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사실이다. 은교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아니. 새해가 왔으니 이제 일흔이다. 우리 사이엔 오십이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
당신들은 이런 이유로 나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변태적인 애욕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명저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세익스피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당신들의 그것도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뭐 상관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일 뿐이니까.
---시인이 마지막 남긴 노트 - 프롤로그 중에서
어느날 자신의 집 정원 벤취에서 낯선 소녀가 잠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독신의 老시인 이적요!
그는 언제부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까라며 지난날을 해후하면서
은교를 처음본 그때부터 사랑하게 되었던것 같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 처음은 어른이 아이를 이뻐하는 것 같은 그런 감정이었을 것 같다.
몸이 반응하기 전까지는...
시인의 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외국의 자식집으로 다니러 간 두 어달 동안
집 청소 아르바이트로 일주일에 두어번씩 시간 나는대로 놀러오듯 와서
신나게 놀다(청소하다)가 가는 은교,
시인에겐 자식같은 돌아온 싱글인 서지우가 있었고
그렇게 셋 사이에서 일어나는 묘한 감정변화, 대립이 이 소설의 플롯이다.
문학적 재능이 부족한 서지우를 스승은 매번 '멍청이'라고 야단치지만
제자는 스승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재주가 없는 대신 심성이 따뜻하고 착해서 시종여일하게 자신에게 잘하는 제자를
스승은 아들과 살아도 그만 못할거라며 역시 의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연인처럼 지내던 두 사람사이에 은교가 나타나고,
은교를 향한 스승의 눈빛에서 사랑을 읽어내는 서지우!
그는 스승이 절대로 사랑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평생을 독신으로 시만 쓰며 살아온 스승의 위상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길것이라는
서투른 판단으로 스승의 감정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기를 바라며 해서는 안될 짓을 하게 된다.
순수한 사춘기 소년처럼, 은교를 보기만 하는 것으로도 자신이 살아온 전 생애보다
제대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스승! 그 감정을 전혀 이해 못하는 제자
여기에서 부터 이들의 불행은 시작된다.
6개월의 간격을 두고 제자는 교통사고로 노인은 지병으로 이승을 떠난다.
떠나기 전에 그들은 각자 은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
이미 고인이 된 그들의 이야기,
그 때 그 일이 있었을 적에 느꼈던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가
남겨둔 글을 통해 번갈아 전개되는 방식이다.
살아서 하지 못했던 말들이 솔직하게 까발려지는 글이다.
자신이 서지우를 죽였노라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을 죽이려한 스승의 눈빛까지 감지하고 읽어낸 제자.
스승의 마음을 직감으로 알았고 스승이 쳐 놓은 덫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
그러나 저러나 스승의 의도대로 교통사고가 나고, 서지우는 죽는다.
서지의 죽음과 함께 스승의 사랑도 끝나는 것 같다.
아니 스승이 더 산 6개월을 술로 죽음을 재촉하는 노시인에게서
서지우가 떠나고 난 뒤의 사랑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일 정도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재촉한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나도 따라죽고 싶어하는 그런 것 같기도하고,
더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는 노인네처럼 그렇다.
노시인의 은교를 향한 사랑과는 별개로 은교를 사랑한 제자를 향한 질투였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것은 독자몫인것 같고, 자신을 발견하는 그런 과정인것 같기도 하고.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의 정한을 무엇이 무엇보다 낫다고
차마 단정할 수 없는 그런 여러가지 것들을 내포하고 있는 소설이다.
딱 한 번 은교는 "할아버지, 학교 앞으로 와주세요." 라는 부탁을 한다.
그것이 생애 처음있는 데이트 처럼 기꺼워 달려가는 스승을 보면서
제자는 자주들르는 술집 종업원에게 은교의 남친인양하고 면박을 주라는 정도로 부탁을 하지만
그 사주 받은 녀석은 칠십의 노인을 고딩을 탐하는 것으로만 여기고 노기탱천한 모습으로
노시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당신 지금 썩은 관처럼 보여, 충공이야. 충격과 공포! 그 얼굴로 고딩을 넘봐"
"늙은 것이 뭐하는 짓이냐"는
내밀한 순정에 치명적인 모욕감을 당한 노시인.
자신의 실체를 관으로 썩은 관으로 인식시켜준 청년,
뒤늦게 그 청년이 서지우가 사주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되는 스승!
어둠 속에 앉아 있었지만 내 온몸은 풍뎅이처럼 부풀어 있었다.
마음을 내려 놓으려 할 수록 분노가 내 속에서 놀라운 폭발력으로 빅뱅을 거듭하고 있었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이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아름답게 만개한 꽃들이 청춘을 표상하고,
그것이 시들어 이윽고 꽃씨를 맺으면 그 굳은 씨앗이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인이라는 씨앗은 수많은 기억을 고통스럽게 견디가가,
죽음을 통해 해체되어 마침내 땅이 되고 수액이 되고,
수액으로서 어리고 젊은 나무들의 잎 끝으로 가. 햇빛과 만난 그 잎들을 살찌운다.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서지우는 죽음으로 처단해야 할 만큼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스승을 배반했고, 늙은 것을 '범죄'이자 '기형'으로 취급했다.
단순히 스승인 나를 모욕하고 나를 배신한 것만이 아니다.
전체 인류가 직면한, 모든 살이 있는 것들이 짊어져오고 짊어진. 짊어져갈 존재의 장엄한 법칙을
가장 부정직한 방법으로 철저히 부정했으며 철저히 모욕했다.
그가 부정하고 묘욕한 존재 속에 그 자신까지 물론 포함된다.
그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나이 들고 있는 중이니까.
따져보면, 자신을 부정하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만 해도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고 할 수 있다.
그냥 범죄가 아니라, 사악한, 적극적인 범죄이다.그러니. 어떻게 내가 그를 용서하겠는가.
나는 그러나 그 이틀 후쯤 찾아온 서지우에게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멍청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 분노를 감추기 위해 나는 한사코 그의 눈을 피했다.
"번거로우니 당분간 들르지 말게"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며칠 동안 혼자 지냈다.
서지우에 대한 끔찍한 배신감과 그의 '범죄'에 대한 내 분노를 다지고 다져서
다른 이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는 데 나는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나는 기다렸다.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악한 범죄'가 어서 세포분열을 거듭해 더 크고 깊어지기를.
내 살의가 노인이라는 씨앗보다 단단해지기를.
그리고 서지우 스스로 죄에 죄를 보태고 또 보태서
자기 멸망의 올가미 속으로 기고만장 걸어 들어오기를.
그러기 위해 필요하다면, 은교라도, 기꺼이 활용한 마음의 준비가 나는 되어 있었다.
자신의 산문을 훔쳐서 자신의 작품으로 둔갑시켜 발표하는 제자,
한 술 더 떠 자신이 보기에 은교는 전혀 원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어린것을 탐하는 제자
서지우는 스승의 사랑을 자신이 하는 사랑과 동일시했다.
스승의 나이에 은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고,
당연 사랑할 자격도 없다고 적어도 자신만이 은교를 사랑할 자격이 있다는,
그 어떤 것에서 보다 은교에 한해서 만은
자신이 스승보다 우위라고 옳다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제 스스로..
자신은 괜찮고 스승은 추하다는 그 심리기저는 단지 나이뿐이다.
그것을 용서하지 못할짓으로 묘사한 부분에서 공감가는 부분이 많다.
은교는 육체적인 사랑은 서지우와 나누지만
자신을 사랑했던 할아버지에게선 따뜻한 느낌만 가진다.
그 이상의 할아버지 감정은 짐작도 못했던 은교,
뒤늦게 할아버지가 남긴 글을 읽은 은교는 절규한다.
" 할.....아부지가.....나를요, 이렇게...... 갖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구요.. 이까짓 게, 뭐라구요"
"뭐예요..... 바보같이, 자기 혼자서....."
오늘은 은교, 네게 첫 편지를 쓴다.
지금은 부치지 않을 편지를, 그래도 편지, 하고 발음하고 나니까
사탕을 물었을 때처럼 혀끝이 달콤하다.
사실은 네게 편지를 쓰고 싶은 날이 그동안에도 참 많았었어.
그렇지만, 나는 어두컴컴하고 너는 시리게 푸르다.
어찌 그걸 부정하랴. 젊은 날에 만났다면,
그리하여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터부도 없었다면
너를 만난 후, 나는 아마 시를 더이상 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편지를 쓰면 되니까.
천 일 동안이라도. 너에 대한 나의 정한은 아직도 이리 무성하다.
너는 내게 어째서 한 번도 종이 편지를 쓰지 않았니.
그랬더라면 죽어서 글을 남기는 이런 짓, 혹시 하지 않아도 됐을지 모르는데..
발화는 그렇게 끔찍했다.
너에 대한 욕망이 아주 '사실적'이었다는 말을 내가 이리 길게 쓰고 있다.
사랑했다는 말을 혹시 듣고 싶다면, 당신의 사랑은 차라리 끔찍했다고 말해줘.
그날 나의 포악한 힘에 의해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힌 네 머리통은 왜 유리처럼 깨지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건데, 네가 아니었으면 내 육체는 그 자체로 그때 무덤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묻는다.
도대체 너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시인의 노트 - 나의 처녀, 은교에게 중에서
시인 이적요는 어느날,
은교와 함께있는 시간에 자신의 남성이 반응하는 것을 보게된다.독신으로 육체적인 욕망은 다스릴 줄 알며 살아왔고,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얼마든지 제어가 가능한 것으로 치부하며 살아왔었다.
그런 일흔의 시인에게 은교는 새로운 깨어남이었다.
몸이 반응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육체적 욕망과,
몸이 반응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육체적 욕망이 가능한지 어떤지는 남자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그 반응 이후로 자신이 은교를 사랑하고 있음을 몸이 먼저 반응하고 나서부터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렇지만 그 살아있음!을 잘 승화시켜내는 시인의 모습은 아름답다.
드러내면 추하고 드러내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들,
극과 극은 통한다는 통념이 괜한 얘기가 아님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열일곱 소녀를 사랑하는 노 시인의 속내를 부분부분 헤집어 놓았지만,
그 사랑속에서 느껴지는 노인의 모습은 연민을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절제된 아름다움이다.
그 사랑의 과정이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과정이어서 그런 것 같다.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
스탕달이 연애론에서 한 말이다.
여성에게 있어 연애는 영혼으로부터 감각으로 옮겨가는 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라고 그 순간(은교가 자신의 손을 잡은 순간) 내가 관념적으로 연애를 상상할 때와 너무다 다른 결론이었다.
나는 은교를 만나기 전까지 참된 연애란 남녀불문하고 영혼으로 시작된다고 믿었다.
감각은 하나의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은교를 통해 내가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실체 없는 관념이었는지 명백히 알게 되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보수적 수준보다
늙은 내 육체가 사실은 얼마나 예민하고 건강하게 제 촉수들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지도. 늙은 육체는 외피에 불과했다.
은교와 만나는 나의 감각들은 몸서리쳐질 만큼 살아 있었다.
'뽀뽀도 그냥 하는 세상'을 알고는 있었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나와 상관 없는 다른 세계였다.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한명 밖에 존재하지 않은, 고유명사였다.
은교와 시인의 육체적인 접촉은 마을 뒷산을 오르다
오르막에서 몇 번 손 잡아준 그것이 전부정도였다.
은교는 그 손잡는 것이 싫지 않았는지
산에 올라 할아버지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그 큰 손 안에다 자신의 조막만한 손을 놓으면서
할아버지에게 보자기처럼 한 번 감싸보라고 한다.
장난치는 어린 손녀같은 아이와의 시간,,그것으로 다다,
그 손이 자신의 손에 닿아서 느끼는 감정을 묘사한 이 부분도 미문이다.
아가페적인 사랑, 플라토닉 러브, 그리고 스킨십 젊을때는 잘 몰랐던 것들,
나이는 좀더 감각적이고 예민하게 추스릴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게 아닐까.
산수화의 여백처럼.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서슬이 퍼렇게 살아있는 노년, 모른척 할 뿐, 그렇지 않은척 할뿐,
젊은이들보다 더 예민한 촉수를 가지는 것이 어쩌면 노년일지도 모른다.
가보지 않았으니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짐작을 해 본다.
나는 필명이 적요이다.
천박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수록 천박한 짓과 천박하지 않은 짓을
악착같이 나누려고 한다는 것은 내가 혁명을 꿈꾸던 젊은 날에 배운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천박한 자신의 욕망을 갖은 말로 치장해 감추면서,
세상에 대고 밤낮없이 두 개의 나팔을 불었다.
이를테면 천박한 자라고 판결을 내리는 자에겐 트럼펫을 줄고,
천박하지 않은 자라고 판결을 내린 자에겐 우아하게 색소폰을 불어대는 식이다.
그런 자 중에서 자기 판결의 확고한 명분을 갖고 있는 자는 사실 드물다.
명분이야 난무하지만, 대개는 눈치로 때려잡는다.
좀더 깊이 알거나 좀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 어떤 지점을 향해 색소폰을 불었다 하면
그제야 너도 나도 줄지어 집중포화로 포즈도 우아하게, 색소폰을 일제히 불어젖힌다.
천박하다고 판결해, 트럼펫을 불어야 할 때는,
그 짓조차 오물을 뒤집어쓸지 몰라 조심조심하다가 최종적으로, 침묵은 밑져도 본전이라는,
지식인 사회의 은밀한 불문율을 따라가고 마는 것도 그들이다.
문단이라고 뭐 예외가 아니다.
---시인의 노트 - 심장중에서
천박한 욕망,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들,
결정하지 말고 살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칠순의 감정을 엿본 느낌이다.
젊다는 것 만으로 느끼는 우월감이나 나이든 노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선입견이나 시선이 얼마나 우매하고 한심스런 모습인지를
노인의 입장에서 보게된다.
그리고 사랑이나 연정의 그 농밀한 감정을
나이로 선을 그을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나이는 그 농밀한 감정의 진위를
더 잘 알고 추스릴 줄 아니 지혜와 함께여셔
젊을 때보다 더 성숙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사랑,
제자를 사랑했던 스승, 은교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스승을 사랑한 제자, 은교를 사랑했던 서지우.
은교는 자신도 할아버지처럼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소설말미에 둘은(서지우와 할아버지)서로 사랑했었다고 말하는 은교!.
이들중 정말로 사랑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사랑의 순간은 언제나 진실하다고 했으니,
모두 다 사랑일 것이고, 사랑했을 것임은 의심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노라'는 아무래도
할아버지에게 가장 큰 의미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젊은 날에 만났다면, 그리하여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터부도 없었다면
너를 만난 후, 나는 아마 시를 더이상 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편지를 쓰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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