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박완서

구름뜰 2010. 8. 10. 11:20

 

 

아침 일과처럼 습관적으로 마당에 나갈 때는 모자도 쓰고 면장갑도 끼고 나름대로 준비를 하지만,

책 읽고 글 쓰다가 머리도 쉴 겸, 몸도 풀 겸 마당에 나갈 때는 맨손이다.

맨손으로 나갔다고 할 일이 눈에 안 들어오는 건 아니다.

맨손으로 흙을 주무르다가 들어오면 손톱 밑이 까맣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정성 들여 손을 씻지만 대강 씻고 무심히 외출할 적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고 사람을 만날 때면 열심히 내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지만

속으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비죽비죽 웃음이 나온다.

 

며칠만 나의 때 묻은 손톱을 간직하면 열 손가락 손톱 밑에서 푸릇푸릇 싹이 돋지 않을까.

내 손톱 밑에 낀 것은 단연 때가 아니라 흙이므로.

매니큐어 대신 손끝에 푸른 싹이 난 열 손가락을 하늘 향해 높이 쳐들고

도심의 번화가를 활보하는 유쾌하고 엽기적인 늙은이를 상상해본다.   

 

 

- 금년은 경인년이다. 나에게는 그냥 경인년이 아니라,

또 경인년이고 또 경인이기 때문에 내 생전에 또 전쟁을 겪게 될 까 봐 두려운 것이다.

6. 25가 난 해도 경인년이었으니 꽃다운 20세에 6. 25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겨운 건 육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이다.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그 해의 5월도 아름다웠다. 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5월이었다.

교정에 라일락 향기가 숨 막히던 5월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거였다.

어떻게 해서 졸업을 5월에 할 수 있었나, 다들 의아해하지만 그 또한 우리 학년만의 특혜였다.

우리는 중학교 재학 중에 해방을 맞았고 해방된 달이 8월이어서인지

다음 해 봄에 진급을 시키지 않고 일 년 있다가 9월에 진급을 시켰다.

식민지를 벗어난 독립국에 맞는 국졍교과서나 커리큘럼이 정해지기도 전,

단지 해방되었을 뿐인 혼란기에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 후 몇 년 동안은 8월을 학기말로 하고 9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그게 미국식 학제라고 하니 뭐든지 미국식을 좋아할 때라 그대로 고정되는 줄 알았는데

종전대로 봄 학년도롤 환원한다고 했다. 별안간 그렇게 하면 그해  학년은 너무 짧아지니까,

그 과도 조치로 그 해만 5월을 학기말로 했던 것이다.

졸업식도 5월에 있었고 대학 입시도 5월에 이미 치르고 나서 합격된 뒤였으니

근심 없이 마냥 들뜨고 행복한 졸업식이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좋은 계절이 졸업의 기쁨을 더해주었다.

 

대학 입학식은 6월 초에 있었다. 대학로도 눈부신 6월이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이었다. 하필이면 왜 졸업식이었을까는 굉장한 행운이었지만

하필이면 왜 50년 6월이었을까는 무서운 재난이었다.

입학식을 치르고 며칠 다니지도 않아 6. 25가 났다.

 

집안 남자들의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 굶주림, 폭격과 기총소사, 혹한의 피난길

그 와중에서도 좌냐 우냐 하는 이념에 따라 혈육과 가정이 분열하고, 이웃과 친척, 직장 동료끼리도

서로 헐뜯고 고발하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사람 나고 이념 난 게 아니라

이념이 인격이나 사람다움 위에 군림하던 전후의 공포 분위기,

이청준의 소설에도 나오는 전깃불 뒤의 어둠이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다짜고짜

우리 얼굴에 불빛을 쏘아대며 빨갱이인지 반동인지를 묻는 오만한 심문자.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던 시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내 정체성, 고달픈 소녀 가장을 거쳐서 안착한

사회의 외풍을 막아줄 남자와의 무탈한 결혼생활,

베이비 붐 시대가 이 땅의 가임 여성에게 부과한 역사적 사명인 양 대책 없는 다산, 화목한 가정,

남들은 다 팔자 좋다고 알아주는 이러한 결혼생활이 문득문득 나를 힘들게 했다.

 

속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겉만 빌려 입은 비단옷으로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처럼

자신이 한없이 뻔뻔스럽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실제적인 가슴의 통증으로 비명을 삼킬 때도 있었고,

어디 남 안 듣는 곳에 가서 실컷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이 뭉쳐 병이 될 것 같은 적도 있었다.

 

- 그래서 늦은 나이에 소설이라는 걸 써보게 되었고 비교적 순탄한 작가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치유받고 위안을 얻은 것처럼 느낀것도 사실이다.

6.25의 경험이 없었으면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느끼고 남들도 그렇게 알아줄 정도로

나는 전쟁 경험을 줄기차게 울궈먹었고 앞으로도 할 말이 얼마든지 더 남아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

지금도 문학 강연 같은 걸 하게 될 때는 소설이 지닌 이런 미덕, 쓰는 이와 읽는 이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위안과 치유의 능력에 대해 말하곤 한다.

 

나는 내가 소설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걸 인정하고 소설가인 것에 자부심도 느끼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마치 허세를 버린 것처럼 뒷맛이 허전해지곤 한다.

내가 당초에 되고 싶었던 건 소설가가 아니었다.

다만 대학에 가서 학문을 하고 싶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무엇이 되는 건 그다음 문제였다.

당시만 해도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었을 뿐

졸업하고 뭐가 되는 직업인을 양성하는 데는 아니었다.

 

- 대학은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하고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는 지성을 길러내는 데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데가 아니었다.

특히 인문대가 그러해서 우리는 인문대를 대학의 대학이라고 자부하며 기고만장했엇다.

오죽하면 대학을 상아탑이라 불렀겠는가.

그만큼 잡스러운 욕망이나 더러운 실리로부터 보호받는다는 면이 강했다.

막 대학 문턱에 들어선 초년생에게 대학은 진리와 자유의 공간이었고

만 권의 책이었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었고,

지적 갈증을 축여줄 명강의 였고, 사랑과 진리 등 온갖 좋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로 나만의 아름다운 비단을 잘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 베틀에 앉아 내가 꿈꾸던 비단은 한뼘도 짜기 전에 무참히 중턱을 잘리고 말았다.

전쟁은 그렇게 무자비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직조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당초에 꿈꾸던 비단은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배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못 가본 길에 대한 새삼스러운 미련은 노망인가, 집념인가.

올해가 또 경인년이기 때문인가. 5월이란 계절 탓인가. 6월이 또 오고 있기 때문인가.나는 누구인가?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이다. 그 두개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먼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 중에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팔월 초 이튿날 나온 따끈따끈한 책이다.

<호미>이후에 쓴 글을 묶은 것이라고 하는데 선생님의 책은 나올때마다 보는 편이라

신간 소식을 접하면서 어찌 이런 제호를 붙였을까 하는 궁금증이 앞섰다.

호미에서는 정원이야기가 많았는데 역시나 마당의 소일거리와 더불어

올해 팔순이어서 그런지 지나온 날들을  담담하게 반추한 글들이 많았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산문집 첫 단원에 실려진 글이다.

책을 받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남편에게 책 읽어 주는 여자가 되었지만 두 어장 정도 읽었을까.. 

스무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라고 마지막 문장의 표현처럼,

중략부분이 있긴 하지만, 또 경인년이다 라는 대목에서부터 소리내어  읽을 수가 없었다.

성장을 멈춘 영혼이 느꼈을 60년, 상처야 다르지만 가슴에 묻어 둔 옹이를 쳐다보는 일처럼

연민이라면 외람되겠지만, 그런  마음과 내 옹이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함께 일었다.

 

천안함사건으로 애통한 죽음은 알지만, 그 정당한 분노조차 자제해야 할 것 같은

그래서 전쟁은 피해야지 하는 마음만 간절한 그래서 당신은 비겁한 평화주의자라고

당신의 평화주의는 전쟁에 대한 공포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전쟁을 겪은 세대가 느끼는 전쟁에 대한 공포감, 그건 아무리 비굴해지고 초라해지더라도

 그것만은 다시 겪고 싶지 않는 살아있는 자의 본능같은 것일게다.

 선생님의 작품은 거의 다 섭렵했지만 이전에는 토해내지 못했던

심리기저에 있던 그 세대면 어쩔수 없이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아픔이 느껴진다.

 

질박하고 진솔한 문체로 자신은 물론 작품속에서 특히 어머니나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등

가족들의 내면을  마음껏 펼쳐보였고  그것이 그 분들의 모습과 같았던 조금 달랐던

맘껏 까발릴수 있었던 선생님의 필력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작품들을 읽었었다.

 그리고 그 작품속 사람들이 더 이상 속물일 수 없을 정도로 속물이어도 선생님의 시선을 통해서 보게 되는

속물들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와 닿았었다. 그처럼 후련한 삶을  살고 계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스무살에 성장을 먼춘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라는

문장을 보면서  체화되지 못한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승화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근원적인 아픔같은 것들,

  전쟁, 그 시절이면  누구나  겪어서 한데  뭉뚱거려진 덩어리.

그 큰 덩어리에 비하면 개인의 고통은 미미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 미미함이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누구한데 보상받을 수 없는 회복불능의 삶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누구든 그 시절엔 그렇게 운명공동체적인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겪지 못한 세대가 겪은 세대의 아픔앞에서 좀 더 숙연해져야 하는 이유다.

 

못가본 길에 대한 미련은 가지 않은 사람에겐 덜할 것이고,

가지 못한 사람에겐 평생 가슴에 품고 사는 옹이가 될 것이다.

설령 놓친 꿈이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지금의 내가 더 초라해 보인다는 건

 누구나 느낄수 있는 이상을 향한 현실이 아닐까.

현실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이상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이라고

박경리 선생님은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냐는 물음에,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에게 일잘하는 사내는 평생 그리웠을 님이 아니었을까.

내편인 남자  나만 사랑하고 나를 지켜주는,

그로인해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은 평범한 여인으로서의 사랑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깊고 깊은 산골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세파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평생 그속에서 부대껴야 했던 고단함까지 읽혔다.

 마지막까지 호미를 놓지 않았던 흙에 대한 애착까지.

 모진 세월을 살아온 노시인의  흙같은 마음과 촌부같은 소망이 순수해서 눈물이 났었다.

 

 

인간의 참다움, 인간만의 아름다움은 보통사람들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숨이 있는 것이지

잘난 사람들이 함부로 코에 걸고 이미지로 만들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문학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건 진실인가.

말로 표현된 것의 자유와 한계.. 읽히고 싶다는 욕망때문에 조작한 이미지

경박한 과장, 분식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유년의 뜰 중에서 

 

 

어떤 극한상황에서도 우리를 덜 절망스럽게 하고 희망과 꿈을 갖게 하는 거야말로 문화의 힘일 터이다.

그건 또한 문화민족이라면 문화재가 있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가 그걸 공유한 민족에게 이러한 영감을 주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리게돼 있다.

뛰어난 장인과 훌륭한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재력만 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 자연의 풍상을 견디고, 사람들의 사랑과 공경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원형 위에

그런 신비한 더께가 앉는게 아닐까.

 

김구 선생의 백범알지 중에서 언제 들어도 마음에 깊이 와 닿는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의 첫머리를 인용하는 것으로 감히 이 졸문의 말미를 장식하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서셰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아아 남대문 중에서  

 

다들 치매에 대한 공포감을 갖는 건 치매란 인간성 속의 좋은 부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연민, 배려, 수치심 등을 상실하고

가장 추한 밑바닥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잇기 때문이다.

내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자기도 모르는 걸 어느 날 갑자기 드러낼 수도 있다는 게 어찌 공포스럽지 않을수 있을까.

수세식 변소 때문에 한 번도 자세히 볼 기회조차 없엇던, 자기 X를 남이 가장 잘 보이게 벽에 쳐바르는

치매의 대표적인 증세만 봐도 치매가 표현하고자 하는 걸 알 수가 있다.

-- 노인 최신 영화를 보러가다  중에서

 

 

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지겨워하는 마음이 같이 있는 것은 옛날에 비해 책이 흔해지고

내 안목으로는 잘 분간이 안되는 허접한 책, 겹치기 책이 많아졌다는 것하고도 관계가 있겠지만

피는 못 속인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내 서가가 자식들과 손자들이 즐겨 찾는 가족 공용의 도서관 구실을 하고 ,

또 책을 보낼 수 있는 곳도 몇 군데 정해놓고 있어서 서가에서 책이 질식하는 걸 막아주고 있다.

바쁜 사람의 휴식을 흔히 충전한다고 말한다. 휴식은 어디까지나 일을 위해 있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요즘의 나를 바라볼 때 아무것도 안 하는 동안의 달콤한 충족감을 즐기기 위해 일을 하는 것 같다.

일로 충전을 안 하면 휴식은 심심하고 무료한 시간밖에 안 될 테니까.

생활을 단순화해서 주변의 빈자리를 많이 확보하고 싶은 공간욕도 그런 정신상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나는 남이 해놓은 것처럼 호기심 반 경멸하는 마음 반으로 밑줄 친 부분을 읽어가면서

그 밑줄은 내가 친 게 틀림없다는 걸 인정 안 할 수가 없었다.

책 내용이 생각났을 뿐 아니라 그 때의 내 마음상태까지

어제 일처럼 선명하고 고통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 밑줄 친 그책의 출판 연도를 보면서 역시나 하고 내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떠올렸다.

심한 불면증과 곧 죽을것 같기도 하고, 죽고 싶기도 한 고통과,

그걸 아무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는 잘난 척 때문에 심신이 마모돼갈 때였다.

 

그래도 그 때가 가장 살고 싶어한 때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 때 열심히 매달린 게 하느님이었으니까. 그전에 갖게 된 신앙 때문에 그런 극한상황에

매달릴 데가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엇으나 아무리 매달려도 잡히지 않는게 하느님이었다.

이 고통이 무슨 뜻이냐고 피 토하게 외쳐도 대답 없는 게 신이었다.

 

그런 막다른 골목에서 그 문장을 만난 것이다.

그건 아마도 작가가 심형를 기울여 심오한 뜻을 담아낸 명문어사여서가 아니라

검부락지라도 잡고 싶은 내 절박한 심정과 맞아떨어져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밑줄 친 문장이 당장 고통을 벗어나게 해 주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 나는 보통 노인과 다름없이 내 건강이나 우선적으로 챙기며,

내 속으로 낳은 자식들과 그 들이 짝을 만나 새롭게 만든 가족들의 기쁜 일을 반기고

어려움을 나누며 정상적으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

이렇게 되기 까지 소리 없이 나를 스쳐 간 건 시간이었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줬다. 그렇다면 시간이야말로 신이 아니었을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로서의 나의 새로운 다집이 있다면

남의 책에 밑줄을 절대로 안치는 버릇부터 고쳐볼 생각이다.

내 정신상태 내지는 지적 수준을 남이 넘겨짚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일종의 잘난 척,

치사한 허영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폐증이라고 생각되자, 그런 내가 정떨어진다.

자신이 싫어하는 나를 주가 좋아해주겠는가.

나를 스쳐 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나를 솎아 낼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그나저나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지, 고통의 기억뿐 아니라

기쁨의 기억까지 신속하게 지우면서, 나 좀 살려줘,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고 싶게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 내 생애의 밑줄  중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고 싶게 잘가는 시간,

나이만큼의 속도로 늙어간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것일게다.

아직은 속도감을 실감못하고 살지만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나도 그런 마음이 들지 모르겠다.

어른들이 무심코 하는 말을 곰곰히 새겨 보면 이치에 닿고  일리 있는 말이다.

 

누구나 먹는 나이이고, 한번 뿐인 생이고, 죽음은 예견된 것이지만,

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어릴적보다 덜 해진걸 보면

나이듦은 지나온 시간만큼  세상일에 처연해지고 유연해지는 일 같다.

 

노인이 되면 말수가 적고 젊은 세대와도 대화단절도 많아진다.

생각과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에 대화를 할 수록 아득함만 느끼게 되서 그럴수도 있지만,

우리가 뒷방늙은이로 치부하거나 치부 받지 않기위해서는

정신의 탄력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젊은 사람들보다 지혜로운 부분이 많음에도 귀담아 듣지 않음은, 

방법상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노인과의 관계에서 가족간에 단절감을 더 많이 느끼는 부분,

 서로 너무 잘 알아서 여지를 두지 않고, 단정하고 포기하기 때문일수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처럼 초롱초롱한  정신의 탄력을 유지하는 노년을 나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려면 지금처럼 젊은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소통하고 공감가능한 이웃이 있어야 덜 외로울 것이다.

 동반자 같은 편한 지인이 서넛 아닌 대여섯쯤 있다면 내  피붙이가 아니더라도

마음이 통하는 이가 있어 그 만남을 꾸준히 유지해갈수 있다면

 노년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여유로울 지도 모른다.

 

 

내 책상에서 멀리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는 편의상 사전류와 글 쓰다가 자주 참고해야 할 책들

내 무식을 벌충해 줄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전문 서적들로 채워져 있다.

더 가까이 눈에 잘 띄고 손만 뻗으면 뽑아들 수 있는 자리는 시집들 차지다.

시집은 얇으니까 자리를 덜 차지하고 아무도 빌려달라는 사람이 없어서 여러 권의 시집을 모을 수 있었지만

장서로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시로 뽑아 읽기 위해 가까이 두고 있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 머리도 쉴 겸 해서 시를 읽는다.

좋은 시를 만나면 막힌 말꼬가 거짓말처럼 풀릴 때가 있다.

다 된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할 한마디 말을 못 찾아 어색하거나 비어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도 시를 읽는다.단어 하나를 꿔오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 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시를 받는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을때 중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촌 동생과 옛날 얘기를 하다가 사소한 기억의 차이 때문에 말다툼까지 한 적이 있다.

사촌 동생이라지만 같은 시골집, 같은구성원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젊은 날에서 어른이 된 후에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친동기간이나 다름이 없다.

둘이 즐겨 하는 옛날 얘기는 주로 시골집에서 보낸 유년기 얘긴데 가족이나 친척들의 생일이나 제사,

기념할 만한 날들에 대한 기억력이 비상한 동생이라 나는 그가 하는 옛날 얘기를 다 믿고 동조하는 편이다.

 

물론 내 머릿속에도 확고하게 자리 잡은 나만의 기억들이 있다.

그걸 무심히 발설했다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절대로 그건 아니라고 머리 좋은 동생이 박박 우기는 일에 부딪혔다.

아니면 그만이라고 념겨도 될 텐데 그렇게 쉽게 양보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년기의 그 기억은 내가 우리고 우려내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준 소설가로서의 나의

소중한 밑천이기 때문이다.

요새 자주자주 부딪히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스스로 마련한 대답도

'나는 기억의 덩어리일 뿐이다'인데 수없이 가지치기를 한 원체험이 없엇던 일이라면

그럼 내 소설은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한 것인가. 혹시 나는 치매가 아닐까.

--지루한 여름날을 이기는 법 중에서

 

 

ㅎㅎ  재밌다. 선생님의 성미가 느껴지는 이런 글들,

 자신을 묵사발 만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 이런 필법이 독자들을 얼마나 편하게 인도하는지.

 역시나 대가 답다. 그 나이에도 다투었다는 얘기도 재밌고, 그것이 자신은 

기억덩어리로 생각하며 살아온 부분이어서 다툴수 밖에 없었다는 부분까지 공감팍팍이다.

자신의 삶을 새빨간 거짓말로 사정없이 매도하는 것 같은 사촌을 보면서 흥분하셧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내용이 어떻든 간에 분명 그 사촌은 선생의 책을 잘 읽지 않은 분 일 수도 있을 것이다. ㅎㅎ

 

마흔에 등단하고 이어서 쭈욱 책을 낼 적마다  제일 두려웠던 것은 엄마가

내 책을 볼까 염려 스러웠다고 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딸이 조금 컸을때  딸이 볼까 부끄럽다는 글을 읽는 적도 있다.

지금은 순명의 나이를 지난지도 20년,

그래서 다툼이든 삐짐이든 그 어떤 심적 갈등이든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어서

팔순대가의 모습이 더 귀여울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쓰는 일은 자신의 속내를 부분이지만 드러내는 일이어서,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것을 늘 염두에 두게 된다.

그렇기에 글을 쓸때는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쓸수도 없을 뿐더러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언제나 조심스럽다.

 

초기 글쓰기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한 줄도 쓰지 못하게 된다.

 허투루 썼다가  의도와는 달라서 상처받는 경우도 있다.

 재밌는 애피소드가 있더라도 약간의 상상력만 더 할 수 있어서

대체로 깊이 있는 글은 못되고 신변잡기 같은 느낌만 드는 글이 많은이유다.

 산문이나 수필에서 재미를  찾기가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 것은 1951년이 저물어가는 겨울이었다.

그때 나는 스물 한 살이었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한 이듬해였다.

그때만 해도 서울대에 여학생 수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희귀했고,

특히 문리대는 대학의 대학이라고 자긍심이 대단할 때라 나도 내 위에 누가 있으랴 싶게 콧대가 높았었다.

그러나 입학하자마자 6.25가 나고 집안이 몰락해서

어린 조카들과 노모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고 말았다.

생산업체도 관공서도 있을 리 없는 환도 전의 최전방 도시

서울에서 찾을 수 있는 직장은 미군부대가 고작이었다.

 

-- 쉽게 임시 패스를 받고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진짜 PX걸이 된 것이 아니라

한국물산 위탁매장의 점원이 된 것이었다. 그 때 PX는 아래층만 매점이었는데 그것도

삼분의 일 가량은 한국인 업자에게 위탁매장으로 내주고 있었고 그 중의 하나가 초상화부였는데

나는 그곳으로 배치를 받았다.

초상화부엔 다섯명 정도의 궁기가 절절 흐르는 중년남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전쟁 전엔 극장 간판을 그리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업주가 그들을 간판장이라고 얕잡아 보니까 나도 그렇게 알고 함부로 대했다.

 

박수근 화백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딴 간판장이와 다른 점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염색한 미군 작업복은 매우 낡고 몸집에 배해 작았으며 말이 없는 편이었다.

--착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자칫하면 어리석어 보이기가 십상인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바닥은 결코 착하고 점잖은 사람을 알아볼 만한 고장이 아니었다. 나부터도 그랬다.

내가 말문이 열리고 또 어느 정도 뻔뻔스러워지기도 해서 돼먹지 않은 영어로

미군에게 수작을 걸 수 있게 되고, 차츰 그림 주문도 늘어날 무렵부터 화가들에게 안하무인으로 굴기 시작했다.

 

내 덕에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이 그들을 한껏 무시하고 구박하게 했다.

그들은 거의 사오십대로 나에겐 아버지뻘은 되는 어른인데도 나는 그들을 김씨, 이씨하고

마치 부리는 아랫사람 대하듯이 마구 불러댔다. -- 물론 그도 박씨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내가 아무리 잘난 체를 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양갓집 딸로, 또 서울대 학생인 내가 미군들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떨고, 간판장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제일급의 예술가라고 터미니없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저희들의 일거리를 대주고 있는데.

그만한 생색쯤 못 낼게 뭔가 싶었다.  나는  그때 내가 더는 전락할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전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불행감에 거의 도취해 있었다.

 

-- 어느 날 박수근이 두툼한 화집을 한 권 옆구리에 끼고 출근했다.

나는 속으로 '꼴값하고 있네, 옆구리에 화집낀다고 간판장이가 화가 될 줄 아남'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순전히 폼으로만 화집을 끼고 나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화집을 펴들고 나에게로 왔다.

얼굴에 망설이는 듯 수줍은 미소를 띠고, 마치 선생님에게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초등학교 학생처럼

천진무구한 얼굴이엇다.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일하는 촌부 그림이었다. 일제시대의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자기의 그림이라고 했다.

내가 함부로 대한 간판장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난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그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그후 그와 나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퇴근길을 같이 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국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서로 나누면서 위로받곤 했지만,

서로의 가정사에 대해선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휴전이 되기 전에 결혼해서 PX생활을 청산했고, 그는 휴전 후 정부가 환도하면서

 PX가 용산으로 옳겨간 후까지도 초상화 그리는 일을 한 걸로 알고 있다.

 

내가 비교적 평탄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많은 아이들을 낳아 기르느라 문화계 소식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이에 그는 조금씩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그림만으로는 생활이 안 될 때

백내장으로 고생하다가 타계한 걸 전해 들었다.

그의 유작전 소식을 신문 문화면에서 읽고 마음먹고 찾아가 <나무와 여인>이라는 작은 소품에

매료되어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고, 그 때의 감동이랄까.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충격을

참아내기 어려워 놓여나기 위해 쓴 게 내 처녀작 <나목>이다.

 

그는 왜 꽃 피거나 잎 무성한 나무를 그리지 못하고 한결같이 잎 떨군 나목만 그렸을까.

왜 나무 곁을 지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뭔가를 이고 있지 않으면 아이라도 없고 있는 걸까.

남자들은 일자리가 없고, 그 대신 여인들이 두 배로 고달팠던 ,그러나 강한 여인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고

전후의 빈궁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사는 모습이 그의 선한 눈엔 가장 아름다워 보였을까.

그래서 오래오래 남기고자 화폭 돌 삼아 돌을 쪼듯이 힘과 정성을 다해 그린게 아니었을까.

 

여인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길목마다 나목이 서 있다.

조금만 더 견디렴. 곧 봄이 오리니 하는 위로처럼,

그와 내가 한 직장에서 보낸 그해 겨울

같이 퇴근하던 폐허의 서울에도 나목이 된 가로수는 서 있었다.

내 황폐한 마음엔 춥고 살벌하게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엔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 쉬듯이 정겹게 비쳤을까.

 

이번 현대화랑에서 열리는 박수근 회고전에서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도

나에게 소설 <나목>을 쓰게 한 그 <나무와 여인>이었다.

그건 작지만 보석처럼 빛나며 내 눈을 끌어당겼다.

전시회는 국민화가라는 애칭, 존칭에 걸맞게 대성황이어다.

못 보던 대작도 많았지만 나는 좀처럼 나의 작은 보석 앞을 떠나지 못했다.

--보석처럼 빛나던 나무와 여닌 - 박수근 화백 추모 중에서..

 

 

박수근 회백과는 짧은 인연은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그 시절이야기를 제대로 풀어 놓으셨다.

역시나 필력이 부러울 정도로 사정없이 스무살의 속내를 가감없이 까발려낸듯한 문장을 읽으면서

작품속에서 더러 만났던 엄마를 닮은듯하여 재밌게 읽었다

 

결혼과 함께 잊고 살았을 박수근 화백에 대한 소식과,

 전시회 작품<나무와 여인>이라는 작품앞에서 당신이 받았을 자극이

어떤 것 이었을 지 공감간다. 그 비슷한 것을 나도 느껴본적이 있다.

 

같은 세월을 살아왔는데 세월이 한 참 흐른뒤  예전의 지인을 만났을 때

그가 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잘 되어 있을때 느끼게 되는 묘한 감정,

 잘되었다고 축하해 주고 싶은 감정과 그동안 나는 뭐했나 자각까지.

무언가를 시작 할 수 있는 시발점, 내지는 원동력이 되는 시점이 되기도 한다.

 

선생님도 그런 느낌을 박수근화백의 작품 앞에서 받지 않았을까.

 주변에  어떤 인연이었던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래서 복이다. 

화단의 박수근 화백처럼 문단의 큰 어른이 되신것도 어쩌면 박수근화백과의 인연도

분명 한 몫 하지 않았을까.. 그런 짐작을 해 본다. 

 

등단하고 40년, 팔순의 나이에도 아직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시는 것은

어쩌면 스물살에 채워지지 못한 결핍감때문에 더 악바리로 글을 써오신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당신의 삶이 비단이 아니라 누더기를 걸친듯한 느낌까지 들었다고 했지만,

당신이 보여준 길은 우리 문단에서 그 누구도 가지 못한 아름다운 길 이었음을 

선생님의 독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비단을 짜진 못하였더라도,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는 것을 

 초연히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또한

오늘의 아름다운 선생님 모습임을  선생은 분명 아실 것이다.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다.

그 애들도 나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참 좋겠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주었다.

늙어 보인다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고, 누가 나를 젊게 봐준 날은온종일 기분이 좋은

평범한 늙은이지만 글에서만은 나잇값을 떳떳하고 하고 싶다.

--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