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도종환

구름뜰 2011. 11. 5. 09:34

 

 

 

오랫만에 시집을 구입했다

지난달, 김용택 시집을 두 권 샀고 그 이전엔 어떤 시집이었는지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이다.

 

 

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 번은 허락하시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 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했으나

그 뒤편은 벌레먹은 자국이 많았다.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아직 구름을 물들일 찬란한 노을과 황홀이 남아 있고,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도종환 시인은 54년 생이다.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는 우리 인생을 하루 24시간으로 계산하였을 때

선생의 나이가 선 자리를 의미하는 것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난도 교수님 계산법으로.

 지금의 나는  한시에서 세시 사이였던 기억이 있다.

 

어디에 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가 

더 의미있는 일 아닐까.

종점(죽음)을 생각지 않고 살수도 없고, 종점만 생각하며 살 수도 없다.

중요한 건 오늘 살아있는 것이고,

 이렇게 이순간 내가 깨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샛노란 잎 한 장씩 내려 지붕의 반쪽을 덮고 나머지 반은 당신 가실 길에 깔아놓는 은행나무에게 바이올린 소리를 들려주면 좋겠어요. 은행잎이 떨어지면서 긋는 음표의 곡선들을 모아 오선지에 오려붙이며 당신을 생각했지요. 가장 황홀할 때 결별하는 은행나무 밑에서 이 음악이 완성되면 어긋나는 우리의 운명도 아름다운 풍경이 될 것 같아요.

 

떡갈나무 잎 떨어져 날리는 동안 바람은 몸을 비벼  첼로의 낮은 음을 만들고 나는 그 소리에 내 비애의 키를 한 옥타브 내려 맞추었어요. 내 슬픔은 비명소리보다 낮은 음에 더 잘 어울리거든요.

 

오늘은 내 슬픔보다 더 많은 산벚나무 평나무 갈참나무 작은 잎들이 결별하는 날 오후 내내 리기다소나무 잎들이 금빛 실비를 지상에 뿌리며 흐느껴 우는 날 나는 비처럼 내리는 초독을 향해 은빛 금관악기를 불었어요. 내 어깨 내 손등을 비늘 끝으로 찌르며 쏟아지는 아픈 모음들

 

그러나 나는 파멸보다 먼저 가을이 찾아오고 노을이 아직도 내 한쪽을 불태우고 있을 때 이산의 나무들과 내게 이별이 찾아온 걸 고맙게 생각했어요. 이렇게 서서 이별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그대를 경배하는 오늘은 이 산의 모든 나무들이 나뭇잎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날

-황홀한 결별

 

 

황홀한 결별

어긋나는 운명도 아름다운 풍경이 될 것 같은.

 

결별이 황홀하기까지 할려면,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오선지에 그려지는 음표같아야 할까.

 

가을, 모든 자연물은 황홀한 결별을 한다.

그대를 경배하는 결별,

 알아서,

순응하는 결별.

다시 만날 결별이다.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 물에 던지며

서 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낯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

내 몸에 머리를 기대오는 가을의 어깨위에

나는 들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늦은 가을 오후

-가을 오후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도 알고,

너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이름 없는 언덕에 기대어 한 세월 살았네

한 해에 절반쯤은 황량한 풍경과 살았네

꽃은 왔다가 순식간에 가버리고

특별할 게 없는 날이 오래 곁에 있었네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특별하지 않은 세월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많은 들꽃 중에 한 송이 꽃일 뿐인

너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 풍경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모든 가능은 언제나 너로 인해 열려 있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들 가질 수 없었던.

특별할 것 없는 내가 특별해지는것도

그 때문이며

그 가능성 때문이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리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서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우리의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 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은은함에 대하여

 

 

 

 

 당신과 내가 

은은할 수 있다면

 

굽이치는 여울에서도

 

당신과 내가

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강물이 될 수 있겠지요.

 

달빛도 

강물도

그 은은함으로

 물들어 간다면..

 

 

 

 

이른 봄에 핀

한송이 꽃은

하나의 물음표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묻는

-한 송이 꽃

 

 

 

 

이 물음을 도종환 시인이 강의중에 청중들에게 물으셨다.

 

이른 봄에 핀 꽃들이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도 이렇게 피어 있느냐고?

최선이냐구요?

 

 '아니요!' 라는 말이 내게서 탄식처럼 발화되었고,

아무도 답하는 이 없었지만, 내 목소리가 낮아서 아무도 듣질 못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었다.

 

한 송이 꽃, 

낙엽

볼때마다

그 후로 부끄럽다.

 

 

 

초록은 연두가 얼마나 예쁠까?

모든 새끼들이 예쁜 크기와 보드라운 솜털과

동그란 머리와 반짝이는 눈

쉼 없이 재잘대는 부리를 지니고 있듯

갓 태어난 연두들도 그런 것을 지니고 있다.

연두는 초록의 어린 새끼

일제히 재잘거리는 소란스러움으로 출렁이는 숲을

초록은 눈 떼지 못하고 내려다본다

-연두

 

 

 

관엽 어린 싹이

손가락을 비틀며 올라온다

줄기와 뿌리 모두가

저거 하나를 밀어올리는 게

생의 전부였다는 듯

나무도 그쪽만 들여다보고 있다.

어제는 조봉암이 사형 오십이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았다는데

오늘 아침엔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묻던 소설가 돌아가셨다

꿈이 우리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가혹한 형별이었는지 알고 있지만

관엽이여

그래, 우리 꿈꾸지 않으면

이 엄동에 누가 아름다운 꿈을 꾸겠는가

꿈의 어린 혀,

어둔 흙 속에서도 스러지지 않는 열망이여

연두여.

-싹

 

 

 

 

지금도 내 마음의 마당 끝에는 꽃밭이 있다.

내가 산맥을 먼저 보고 꽃밭을 보았다면

꽃밭은 작고 시시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꽃밭을 보고 앵두나무와 두타산을 보았기 때문에

산 너머 하늘이 푸르고 싱싱하게 보였다.

꽃밭을 보고 살구꽃 향기를 알게 되고

연분홍 그 향기를 따라가다 강물을 만났기 때문에

삶의 유장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눈을 열어 세상을 보았을 때

거기 꽃밭이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지금도 내 옷소매에 소박한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이

- 꽃밭 중에서

 

 

 

꽃밭을 먼저 보지 않았더라도

우리들의 이성은 꽃밭을 먼저 허락할 줄 안다.

삶의 유장함도 한걸음부터이고 한 생각부터이다.

 

 

 

지난달, 김용택 시인의 특강을 들으러 가던날, 사인도 받을 겸 동네 서점에 들렀다. 

한 쪽 구석에 삼십 여권이 책곷이에서도 헐렁하게 꽂혀 있었다.

 "아저씨, 시집이 이것 분이예요? "

"요즘 누가 시집을 사나요?"

 서점 주인은 되려 내게 반문했다.

내가 산 시집 발행일을 보니  8년전에 출간된 시집이었다.

 

나는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메모를 해 두었다가  두 권이나  세 권 모이면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편이다. 대체로 산문이 많고 소설도 더러 있다.

시는 왜 그랬는지, 도서관에서 빌려 보기만 했다 그것도 아주 가끔,

 

큰 아이 고등학교 1학년 때 내 생일 선물로 

  이해인의 "꽃으로 라도 때리지 마라'라는 시집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녀석, 어떻게 시집 생각을 했는지 기특했던,

'그래 이거 좋겠다' 앞으로 선물할 일 있으면 '쭈욱 책으로'하자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은행잎같은 노란 표지의 시집을 보면서

사춘기는 조금 지났지만 소년의 정성에 살짝 놀랐고 감동했었다.ㅎㅎ

하지만 이후로 산문집으로  바뀌어 버렸다.

 

여고시절,  스무살을 갓 넘긴 그 시절까지는 시집만 봤었다.

 '김남조'를 좋아했고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은 거의 다 외웠었다.

  여섯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낭송해주며  감흥을 나누느라 밤 늦은 줄 몰랐던 시간들도 많았다.

이불속에서 벌어졌던 그 밤들이 동생에게도 좋은 추억이 되었는지.

지금도 가끔  '언니 덕분에  좋은 글을 많이 접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시집 100권 정도는 있어야 든든하지요"

함시사 리더인 최선생 얘기를 들고  내 책장시집들을 보았을때.

우리동네 서점만큼  빈약한  내 모습이 거기 있었다.

몇권을 제외하면 빛도 바래서, 책벌레가 몇 마리쯤 꼬물꼬물 살고 있을 것 같은

 25년 쯤 전의 시집들이 대부분이다.

 세월의 단절, 시의 단절같은 지나온 시간들이 내 책꽃이에 꽂혀 있었다!

 

최근에 다시 시에 관심이 가게  된 것도 어찌보면,

잊고 산 시간, 아니면 덮어 두었던,

그 시절을 다시 이어가고 싶은 회귀 본능 같은 것인지.

 아니면 그때 이후로 잠재되었지만 억압되었던 욕망이 다시 살아나는 건지....

 

용돈이 궁하던  시절, 시집 한 권, 책 한 권을 살려면

한 달 용돈을 규모있게 쓰야 가능한 거였지만,

그것들이 내게준 정신적 포만감을 그 무엇보다  좋았다.

 

  보고 싶은 책 맘껏  볼 수 있는 지금.

그 시절 만큼 외워지지는 않지만 이해력은 훤씬 더 좋아졌으니

시를 감상하기에 좋은 나이다.

 욕심이 지나쳐 간택 해 놓고 감당 못해서 집적거리다 접어둔

작가들에겐 스스로  무안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래도 나는 책을 맘껏 사 볼 수 있고 책에 관한한 조금 사치!!를 부릴줄도 아는 

지금이 차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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