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구름뜰 2012. 3. 16. 09:54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 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위대한 시인의 시라고 생각하기에는 허접스럽게 들릴수도 있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 김수영의 시인으로서 갖는 위대함의 비밀이 있다. 대부분의 지식인이 민주투사인 척했을 때, 김수영은 자신의 소시민적 나약함에 정직하게 직면했고 그것을 숨기지 않고 노래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은 위대하다. 그것은 자신을 치장하던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처럼 우리도 자신의 삶과 감정에 직면하도록 하자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 즉 관습, 자본, 그리고 권력이 만든 피고름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희망할 수 있고, 우리의 뒤에 올 사람들이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상처를 받지 않을 사회를 꿈꿀 수 있게 될 것이다. 철학자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자, 혹은 시인을 포함한 모든 작가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의 시, 소설, 영화 그리고 철학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정직하게 치부를 털어놓는 친구 앞에서는 자신도 정직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시를, 그리고 철학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처럼 정직하기 위해서 말이다.

-

정직한 인문정신이 건네는 불편한 목소리를 견디어낼수록, 우리는 자신의 삶에 직면할 수 있고 , 나아가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꿈도 키울 수있다.

- 강신주  프롤로그 고통을 치유하는 인문정신 중에서

 

 

 

 

 

 

<철학이 필요한 시간>의 프롤로그에 실린 김수영의 시와 글이다.

프롤로그에 실린 또 한편의 단상이 인상적이다.

 

 

 

어느날 저자는 시인과의 첫 만남을 가졌고 그와 함께 인 것이 행복했고,

다음에 한 번더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약속한 날이 왔고, 저자는 그 장소로 일찍나서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전화를 했다.

 

 "예, 그런데 오늘은 별로 시내에 가고 싶지 않네요, 다음에 보도록 하지요." 

 

너무도 당혹스럽고 화도 치밀었다고, 나를 하찮게 봤을거라는 것까지.

커피 한잔을 더 시키고 차분히 생각해보면서 깨달은 것은

시인의 '솔직함과 정직함'에 관한 것이었다고.

처음 만났을 때 좋았던 행복감 때문에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약속날은 정작 그런 마음이 없어진 '자신의 감정에 가장 솔직한 자세'라는 것이다.

 

시인이 나오고 싶지 않은 것은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를 이유로(약속때문에) 나와 만날 마음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반대로 생각해서 약속 했다는 이유만으로 시인이 나왔다면

우울함을 누르고 만난 그 만남이 행복하고 유쾌할 수는 없었을 거라는 것이다..

 

 

 

 

자기 감정에 솔직한 모습, 

나와 함께 있는 이가 내게 온전히 몰입해 주는 만남이라야  행복한 만남이 된다.

하여 시인에게 바람 맞던 날 저자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고 했다.

단지 약속 때문에 마음은 아닌데 만나러 나가는 자리라면

차라리 펑크를 내는 편이 낫다는 얘기와 상통한다.

 

이후 시인을 만나게 되었고

시인은 정말  나와 만나고 싶을 때 만났으므로

그날의 만남은 아주 행복했다는 얘기다.

 

타자와의 만남은 만난 횟수나 함께한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닐게다.

그와 내가 만나고 싶어한 마음이 일치했을 때

진정한 만남의 시간이 되고 그런 만남이라야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만나고 싶은 날

그런날엔 만나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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