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알랭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을 위한'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소크라테스에서 니체 까지
철학자들의 이론을 접할 수 있고, 저자를 통해 이해를 도우는 형식이다.
1장 인기 없는 사람을 위하여- 소크라테스 편에서는
어떤 관념이나 이론을 소크라테스처럼,
조목조목 오류가 없는지 뒤집어서 접근한다거나 다시 생각해 보게하는 철학적 사고,
진실이 무엇인지 논리적 사고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바람직한지를 올곧게 제안해 준다.
2장 돈이 없는 사람들 위하여 -에피쿠로스에서는
그야말로 물질적인 것에 천착한 현대인들(예전 에피쿠로스 학파 때 보다 더)에게
여전히 와 닿는 주제가 펼쳐진다.
그 외에도 3장 좌절한 사람을 위하여- 세네카
4장 부적절한 존재를 위하여- 몽테뉴
5장 상심한 사람을 위하여 -쇼펜하우어
6장 곤경에 처한 사람을 위하여 - 니체로 이어진다.
시인은 삶에서 매우 독특하고 개인적인 것을 발견하며,
그것을 독특한 개성으로 정확히 묘사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시인은 인간 존재의 전부를 드러낸다.
시인은 비록 특정한 것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기에나 통할 법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중에서
"로테"
"나는 그대를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
"왜 만나지 않는다는 거야?"
"베르테르 그대는 나를 만날 것이고, 또 우리는 다시 만나야만 해, 그렇지만 그대는 흥분하는 성격을 조금 죽여야겠어, 오, 그대는 왜 이렇게 치열한 성격일까. 애착을 가지는 모든 것에 이렇듯 무지막지하게 열정을 보이다니."
그녀는 그의 손을 잡으면서 계속 말을 잇는다.
"조금 진정하라고, 그대의 정신, 그대의 지식과 그대의 재능이 그대에게 안겨줄 수많은 환희를 생각해!"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소설말미 중에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은 끊임없이 창조되고.
이세상 사람수 만큼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수천 수 만의 독자에게 공감을 주는 것이 곧 예술작품일 것이다.
내 얘기 같기도 한 허구들은 갈피갈피들을 위로한다.
비극으로 절망의 정수를 맛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그 경험들로 독자는 자신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을 극복하기도 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기도 한다.
쇼펜하우어는 휼륭한 작품과 작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그리고 삶의 불행에서
그 사람은 이제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보다는 전체로서 인류의 운명을 더 돌아볼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랑은 고통받는 존재보다는 뭔가를 아는 사람으로서 행동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땅을 파는 사이사이에
우리는 자신의 눈물을 지식으로 바꾸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쇼펜하우어. 상심한 사람을 위하여 중에서..
인기 없는 사람을 위하여 - 소크라테스
나는 숨을 쉬는 한, 그리고 지적 능력을 잃지 않은 한, 철학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훈계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진실을 명료하게 밝히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거요....., 그러니 여러분.... 그대들이 나를 사면하든 말든, 나는 나 자신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그대들은 알게 될 것이요. 일 백 번 더 고쳐 죽는다 해도 말이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감옥에서 최후의 운명을 맞게 되고, 그의 죽음은 철학사에서 철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보여준 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고하는 방법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들도 잘못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칠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어떤 것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까지 제시한다. 사고하는 삶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것들에 대해 소크라테스보다 더 소박한 의견을 내놓은 철학자는 없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몇 년에 걸쳐 정규교육을 받거나 시간적 여유가 많은 존재가 될 필요는 없다. 상식으로 통하는 신념을 평가해보고 싶어하는, 호기심 많고 차분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거리에서 친구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소크라테스의 방식을 따르다보면 30분 안에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한두 가지는 얻게 될 것이다.
상식을 검증하는 소크라테스의 방식은 플라톤의 초기와 중기의 대화편에서 눈에 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일관된 절차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요리책이나 기도서에 쓰인 언어로도 아무 훼손 없이 그대로 설명될 수 있으며 또 남으로부터 수용할 것을 요구받는 어떤 확신이나 반박하고 싶은 확신 어떠한 것에라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진술이 정확한지의 여부는 그것이 과반수에 의해 받아들여지느냐 또는 오랜 세월 동안 중요한 인물들에 의해 믿어져왔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의 방식은 암시한다. 정확한 진술이란 이성적으로 결코 모순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하나의 진술은 그릇됨이 증명될 수 없어야 진실이 될 수 있다.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믿고, 그들이 제아무리 저명한 인물이라 해도 그릇된 점이 증명되는 진술이라면 그것은 거짓임에 틀림없고, 그러면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
1, 확고하게 상식으로 인식되는 의견을 하나 찾아보자.
용기 있는 행동에는 전장에서 후퇴하지 않은 것도 포함된다.
덕을 쌓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2, 잠시 상상해보자, 이런 의견을 내놓는 사람의 확신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거짓이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 의견이 진실일 수 없는 상황이나 환경을 찾아보자.
용기가 있으면서도 전쟁터에서 후퇴하는 사람은 정말로 없을까?
전쟁터에서 꿋꿋하게 전투에 임하면서도 용기가 없는 사람은 없을까?
돈을 가졌으면서도 덕을 쌓지 못한 사람은 없을까?
돈은 없지만 덕이 높은 사람은 있지 않을까?
3, 예외가 발견되면, 그 정의는 틀렸거나 아니면 최소한 불명확한 것임에 틀림없다.
용기가 있으면서도 후퇴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쟁터에서 꿋꿋하게 전투에 임하고 있지만 용기가 없는 경우도 가능하다.
돈을 가진 악한도 있다.
가난하지만 덕은 높을 수도 있다.
4, 최초의 의견은 이런 예외까지 고려할 수 있도록 새롭게 고쳐져야 한다.
용기 있는 행동은 전쟁터에서 후퇴와 전진을 동시에 뜻할 수 있다.
돈을 가진 사람은 그 돈을 고결한 방식으로 획득한 경우에먄 덕이 있는 존재로 묘사될 수 있다. 그리고 돈을 가지지 못한 일부 사람들도 덕을 추구했으되 돈을 버는 일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살아왔다면 역시 덕이 높을 수 있다.
5, 그렇게 새로 정리한 주장에서 또다시 예외가 발견된다면 , 앞에서 거쳤던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진실은, 만약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제나 더 이상 논박할 수 없는 주장 속에 담겨 있어야 한다. 어떤 주장에 대한 이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곧 그 주장에 담겨 있는 그릇된 것들을 발견해나가는 일이다.
6, 극작가 아리스토파테스가 뭐 빗대어 말했든 간에, 사고의 산물은 직관의 산물보다 우월하다.
우리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내세운 이유들이 얼마나 훌륭한가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기가 없는 현상 그 자체에 관심의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인기를 잃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에 주목해야 한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대부분으로부터 자신이 그릇된 존재라는 비난을 받는다면 무척 놀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논법을 고려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 얼마만큼의 무게를 부여할지를 결정하는 요소는 그런 의견이 나오게 된 사고방식의 건전성이다.
-우리는 진솔하고 치열하게 사고하는 비평가의 반대와 그저 염세와 질투심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비평가의 반대를 똑같은 비중으로 취급하려 해서는 안된다.
--모든 이의 의견을 다 존중할 필요 없이 단지 몇 명만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해도 된다는 사실, 훌륭한 의견은 존중하되 나쁜 의견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 그것 참 멋진 원칙이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는가? 훌륭한 의견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의 것인 반면, 나쁜 의견은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것이지.......,
그러니 나의 친구여, 우리는 민중이 우리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마음 쓸 필요가 없소, 하지만 전문가들이 정의와 불공평의 문제에 대해 하는 말에는 신경을 써야 하오.
-소크라테스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진실과 동의어로 보는 것은, 인기 없음을 잘못과 동의어로 믿는 것만큼이나 고지식한 짓일 터이다.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이 유효하냐 아니냐는 그것이 폭넓게 믿어지느냐 아니면 매도당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논리의 법칙을 지키느냐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에게 두가지 강렬한 환상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했다. 두 가지 환상이란 바로 대중의 여론에 늘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고, 절대로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소크라테스의 예를 따라 늘 이성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최고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 에피쿠로스
우정
우리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켜봐줄 누군가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내뱉는 말은 다른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지낸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것이다. 친구들은 우리를 알아봐주고 돌봐줌으로써 우리에게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불어넣는다.
사색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그것을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동, 문제의 악화, 준비 없이 당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등을 에방할 수 있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않은 쾌락을 제공한다.
- 필요하지 않는 물건을 사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또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위해서 우리는 값비싼 물건을 갈망하게 되는 순간에 그것을 사는 게 옳은지를 자신에게 엄숙히 물어봐야 한다. 우리는 장래 있음직한 행복의 정도를 측량하기 위해 우리의 욕망이 현실로 채워지는 그 순간으로 우리 자신을 투영해놓고 일련의 사고로 실험을 거쳐야 한다.
* 모든 욕망에는 다음과 같은 조사 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내가 갈망해 마지않는 것들이 성취될 경우 나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약 그 욕망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구체적인 예는 전해오지 않지만, 그 조사 방법은 적어도 다섯 단계는 넘었을 것임에 틀림없고, 교육용 책자나 요리책자의 언어로도 아무 문제 없이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을 위한 설계르 한 가지 세워라.
휴일에 행복해지기 위해 나는 빌라에 살아야 한다.
2, 그 설계가 잘못일 수도 있다고 상상해보자. 욕망의 대상과 행복을 연결하는 것에 예외적인 경우들을 찾아보가, 욕망의 대상을 소유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빌라를 구입하는 데 돈을 쓰고도 여전히 불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빌라에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 붓지 않고도 휴일에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3, 한 가지 예외라도 발견된다면 그 욕망의 대상은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예컨데, 친구가 없어 외로움을 느낀다면 빌라에서도 비참한 시간을 보낼수도 있는 것이다.
예컨데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하거나,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나는 텐트에 묵는다 해도 행복할 수 있다.
4, 행복을 엮어내는 데 정확성을 기하기 우해서, 최초의 설계는 지금까지 나타난 예외까지 고려하여 수정되어야 한다.
호화 빌라에서 나는 행복해질 수 있다. 단, 그 행복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게하고 내가 누군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게 있고 누군가의 평가를 느끼는 한에 있어서는 나는 빌라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
5, 이제 진짜 필요한 것은 혼돈에 빠쪘던 애초의 욕망과는 매우 다른 것 같다.
행복은 멋지게 장식한 빌라보다는 마음이 맞는 동료가 있느냐에 더 많이 좌우된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위하여 - 니체
쾌락과 불쾌감은 서로 단단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한 가지를 가능한 한 많이 누리려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다른 한 가지도 그만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선택해야 한다. 불쾌감을 가급적 적게 맛보면서 고통 없는 시저를 누리든지 아니면 이제까지 좀처럼 맛보기 힘들었던, 형언하기 어려운 쾌락과 환희를 누리고 그 대가로 불쾌감을 한껏 맛보든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만약 전자의 길을 결정하고 인간적인 고통의 정도를 줄이거나 낮추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또한 그 고통이 줄 수 있는 환희에 대한 기대치도 줄이고 낮춰야 한다.
가장 완성적인 인생 설계는 어느 정도의 고통과는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에게 가장 큰 환희를 안겨다주는 원천들은 역시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다 주는 원천들에 바짝 다가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 아픔을 참고 감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조화처럼 달콤하고 거칠고 예리하고 무던하고 부드럽고 떠들썩한, 다양한 음식뿐 아니라 서로 조화하지 않은 것으로도 구성된다. 만약에 어느 음악가가 한 음색만을 좋아한다면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음악가는 모든 음색을 활용하여 조화를 일궈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역시 삶을 구성하는 산과 악을 가지고 그렇게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다고 느끼게 한다고 해서 모두가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르 아프게 만드는 것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닐것이다.
니체는 시골교회 목사였던 아버지와 목사의 딸로 자란 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그가 단호하게 주장한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최악의 비난을 한다.
나는 기독교에 대하여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최악의 비난을 해야겠다. 나에게 기독교는 가장 극단적인 부정의 형태다. 기독교는 이 세상 모든 것에 타락의 손길을 뻗쳤다. 나는 기독교를 가장 무서운 저주라고, 그 자체로 가장 무서운 타락이라고 부르겠다.
사람들이 신약성서를 읽을 때 장갑을 끼는 것은 당연하다. 더 없는 불결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어쩔 도리 없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 그 속에 다민 것들은 전부가 소심함이나 자기기만, 시 자신에 대해 눈을 감는 것들이다.
- 오늘날 기독교 인이 되는 것은 가장 상스러운 것이다.
- 기독교 정신과 알코올은 그것들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자신 혹은 이 세상과 결합된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것들이 돌연 관심을 기울일 필요조차 없는 것이 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문제들을 잘 다듬어 좋은 결과를 일궈보려는 인간의 결심을 약하게 만들고 또 우리에게서 성취의 기회까지 앗아간다.
- 말하자면 자신들이 원하기는 하지만 싸움을 벌여가며 얻기에는 역부족인 대상들을 거부하는 반면에, 그들이 굳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어쩌다 손에 넣게 된 것들을 찬양하는 식이었다. 무력함은 선함이 되었고, 천함은 겸양이 되었고, 자신이 혐오하는 사람에 대한 풍속은 복종이 되었고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복수할 수 없는 것은 용서로 둔갑했다. 허약함을 나타내는 모든 감정은 신성한 이름으로 덧씌워 '자발적인 성취, 뭔가 갈망해 마지 않아 선택된 것, 하나의 행위, 하나의 완수 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위안의 종교에 빠진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가치체계에서 바람직한 것보다는 쉬운 것에 우선권을 둠으로써 그들의 삶의 잠재력을 모두 다 낭비해버렸다.
인간이 걸리는 병중에서 가장 나쁜 병은 사람들이 병을 다스리는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치유로 보이는 것이 결국에는 그 치유의 대상이 되었던 병 보다 더 독한 무엇인가를 낳았다. 즉각적으로 효과를 나타내는 수단들, 마취와 도취, 소위 말하는 위안들은 무지하게도 치유책으로 여겨졌다. 여기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고통을 즉각적으로 진정시키는 방법들은 그 고통을 낳는 불만을 악화시키는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풍부한 결실을 남긴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앞으로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을지를 한번 물어보라. 불운과 외부의 저항, 어떤 종류의 혐오, 질투, 완고함, 불신, 잔혹, 탐욕, 그리고 폭력, 이런 것들이 사실은 호의적인 조건에 속하지 않는지 곰곰 따져보라.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떠한 위대한 미덕도 성장도 좀처럼 이룰 수 없지 않는가 말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약간이라도 인연을 맺고 있는 인간 존재들에게 나는 고통과 절망, 질병, 냉대, 경멸이 내리기를 바란다. 나는 그 사람들이 지독한 자기경멸과 자기불신의 고문, 패배당한 자의 열등감과 동떨어져 지내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장 분별력 있는 인간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애쓴다"- 니체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는 어떤 것일까.
고통속에 있을 때 우리 대부분은 분별력을 잃기가 쉽다.
니체가 말한 가장 분별력있는 인간은 어떻게 할가.
그 고통을 직면하고 가장 바람직한 최선을 찾아내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 고통의 깊이만큼 성취감을 맛보는 사람 아닐까.
벗어날 줄 아는 자유는 그런 것 아닐까.
고통은 위장된 행복이라고 했으니...
"고통과 절망, 질병, 냉대 결멸이 내리기를 바란다"는
니체의 역설이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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