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해도 괜찮아'의 부제는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다.
저자가 경대 법대 교수라서 제호가 더 눈길을 끈 책이다..
마흔 중반 남성의 진솔한 고백,
그 엿보기에 책이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이 간 책.
할 일 제쳐두고 하루만에 통섭한 책이다.^^
'욕망'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풀어갈 지 '괜찮아'는 또 어떻게.
솔직한 피력에 기분 좋았다.
'불혹을 '불면 혹 하고 날아가는 세대'라는 표현도 인상적이다.
중년에게 욕망은, 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무의식속에 억압된 '한마디로 제때 불태우지 못한 소년의 열정'이
잠복되었다가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모르더라도 공감이 쉽다.
욕망, 그것이 육체적인 것에 한하고 보면,
대체로 억압뿐이었던 세월을 살아온 세대고,
지금 젊은 세대는 이해가 쉽지 않을만큼 세상이 급변했지만,
그 사회적 환경에서 알아서 형성된 억압이나 고정관념은 어른 즉
자유인이 되고도 틀을 깨기가 쉽지 않은 사유(인식)이며 선택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에서도 그렇고, 어느 분야에서건 요즘은 고정관념 탈피가 화두다.
알게 모르게 형성된 틀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라는 얘기다.
'금기'가 사람의 사물화 경향을 막고 에로티즘을 발생시킨다고 했던가.
공론화는 아니더라도 저자의 견해를 통해서 가지게 되는 인식은 독서의 보람이다.
읽다가 인상적이었던 곳 몇 군데 올려본다.
프롤로그
1
욕망과 규범이 충돌하는 매일의 삶은 그 어떤 소설보다 재미있습니다. 더 상쾌하고 더 박진감 넘치며, 때로는 더 무섭고, 더 지리멸렬합니다. 불확실하기에 더 재미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데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일수록 주변에 털어놓기가 힙듭니다.
욕망과 규범이 충돌하는 매일의 삶. 소설보다 재밌는 삶,
사랑 말고 또 있을까. 사랑이되 그안에서 지켜야 하는 규범들
규범과 충돌하는 욕망,
그 욕망이 금기일 때.
금기여서 더해가는 욕망들,
누구나 일탈은 꿈꾸지만 일탈 지 않는 것처럼,
'욕망해도 괜찮아'는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는 삶을 살라는 권고다.
욕망을 인정하면 행복해지고, 즉 행복해지는 용기가 생긴다는 취지다.
혼자있을 때 행복한 사람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고,
다른사람과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내 욕망에 솔직해지라는 얘기다.
또하나 '나도 꿈꾸는 일탈'이라면
'누군가의 일탈에 그렇게 핏대 세우지 말기를 바란다'는 취지도 좋다.
이해하기, 포용하기, 그럴수도 있었을 거라는,
그것이 고백이 되었을 때는 더욱 돌을 던지지 말라는 당부에서
바람직한 인간애가 느껴진다.
사람은 자신을 닮은 사람을 제일 못견뎌 한다는 말이 있다.
도매급으로 매도하는 마녀사냥에 흥분하는 사람들일수록
먼저 돌을 드는 사람일수록,
사회적인 책임의식을 반드시 져야 하며,
그가 지은 죄보다 더 큰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고백이 없는 사회가 억압이 활개치기 좋은 토양입니다. 속마음을 터놓을 곳을 찾지 못한 개인들은 깊은 고립감 속에서 음습한 구석을 찾아 헤맵니다. 욕망이 건강한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감시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엿보고 돌을 던지는 왜곡된 방법으로라도 은밀하게 욕망을 배출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게 인간인 까닭입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일탈을 꿈꾸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남몰래 행복한 놈이 있는지 감시하는 사냥꾼의 매서운 눈길을 가지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한방에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몸을 떠는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고백!
'비는 데는 무쇠도 녹인다'는 말이 있다.
고백도 같은 범주 아닐까.
고백이 없어서 억압이 활개치는 사회.
욕망이 건강한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들,
누군가의 고백을 관용(똘레랑스)으로 표용할 수 있는 사회는 못되더라도
고정관념에 익숙한 중년이 달라져가는 사회 되었으면 좋겠다.
2
저 역시 욕망을 극복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끝없이 통제하는 문화속에서 평생을 보냈습니다. 욕망을 잘 통제하는 사람만이 성공적인 학교, 직장, 가정, 종교 생활을 영위하는 게 우리 사회입니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른다는 것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깊숙한 방에 자신의 욕망을 감추어두고 반복하여 자물쇠를 채워나가는 과정입니다. 하도 많은 자물쇠를 채우다보니 어느 순간 그 방의 존재 자체를 아예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자물쇠로 채워놓은 욕망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언젠가는 반드시 치명적 역습에 나섭니다. .
그런 치명적 결말을 피하기 위해 저는 오래 채워놓았던 제 마음의 자물쇠를 '살아 있는 이야기'혹은 '고백'이라는 열쇠로 열어보고 싶습니다. 살아 있는 이야기에는 힘이 있습니다. 당장 뚜렷한 해법은 없어도 살아 있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야기를 나누는 단순한 행위 자체로 치유와 회복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이야기는 대개 욕망과 규범의 갈림길에서 나옵니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진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 규범이 완벽하게 내면화된 사람에게서는 살아 있는 이야기는 나올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도 막상 만나보면 이상하게 매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규범만 남았을 뿐, 살아 있는 이야기가 빠진 사람들입니다. 존경스럽기는 하나, 사랑스럽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내뱉는 어떤 고상한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저도 오랜 세월 그런 사람 행세를 하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는 이야기
뚜렷한 해법이 없어도 살아 있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치유와 회복이 가능하다.
존경스럽기는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
관념속에서만 살아 있는 사람들
제도나 환경 고정관념....
상상력,
사유의 폭 만이라도 넓힐 수 있는 삶을 살 자신은 있는데
과연 나는 살아있는 이야기나 고백앞에서 자유로율 수 있을까.
문제는 그런 살아 있는 이야기,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가장 부러웠던 것은 소설가들이었습니다. 영민한 소설가들은 자기 욕망을 정직하게 털어놓기 위해 거짓말이라는 우회로를 선택합니다. 어떤 작가도 자기 경험을 완전히 벗어난 작품을 쓸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나 수천년 후를 묘사한 공상과학 혹은 판타지 소설이라 해도 크게 댜르지는 않습니다. 거짓말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하는 소설 장르는 현실속에 발을 담그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지혜로운 타협책입니다. 그러나 진짜 같은 거짓말을 줄줄이 이어갈 재주는 아무나 타고나지 않습니다. 그런 재주가 없는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실패할 것이 분명한 줄타기지만, 일단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겠지요.
김수영은 자신의 산문집 '나의 연애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인지는 몰라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빈도가 잦아진다.
모든 것과 모든 일이 죽음의 척도에서 재어지게 된다.
자식을 볼 때도 친구를 볼 때에도 아내를 볼 때에도
그들의 생명을 그들의 생명만을 사랑하고 싶다.
화가로 치면 이제 나는 겨우 나체화를 그릴 수 있는 단계와 와 있는지도 모른다.
잘하면 이제부터 정말 연애시다운 연애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여편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연애시를,
여편네가 이혼하자고 대들 만한 연애시를,
그래도 뉘우치지 않을 연애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수필은 68년에 쓴 글이고 그해 6월 김수영은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생전에 연애시는 한 편도 못 남긴 시인
이제 연애시좀 쓸수 있을 것이라는 이 글이 애잔하다.
나이와 함께 살아온 세월에서
치유와 위로가 된 확언같기도 하다.
4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만, 무엇보다 제 시선이 남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점을 미리 고백합니다. 예전에는 여성에 대해 아는 척을 많이 했고, 한때는 나름 '여셩에게 잘하는 남성'축에 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먹어갈수록 알 수 없는 게 여성이더군요. 여성독자들께서 다른 의견을 들려주시면 제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남성 독자들의 반응도 대환영입니다.
프롤로그의 분량이 많다.
프롤로그 마지막 부분에 독자들의 반응에 대환영이라는 글을 보면서
구구절절 격없이 생각들을 풀어보았다.
본문 내용 한 편,
살로 소통하기
약간 표현을 달리하면 이렇습니다. 흔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수단에는 세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말과 글과 살입니다.. 만약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매일 대화를 나누고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눴다고 합시다. 물론 기분 나쁘겠죠. 하지만 당장 이혼하자고 할까요? 대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말과 글을 그리 깊이 주고받은 관계는 아니지만 살을 주고받은 사이가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죠. 모두들 말과 글의 소통이 살의 소통보다 중요하고 고상하다고 믿는 분위기지만, 실상 인생을 흔드는 것은 살의 소통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살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거죠.
과거에 표면적으로 몸을 무시할 때는 내면에서 몸이 저의 정신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의식적으로 몸의 중요성을 인정하자 제 무의식은 몸에서 조금씩 자우로워졌습니다. 사람을 일탈자와 사냥꾼으로 만드는 근본원인도 몸에 대한 억압입니다. 억압과 낙인이 없다면 일탈자도 사냥꾼도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 한번 했다고 사람이 죽지 않습니다. 섹스를 하는 순간 몸의 저 아래 어딘가에서 악한 기운이 뿜어져나와 영혼을 잡아먹는 것도 아닙니다. 말과 글처럼 인간에게 주어진 중요한 소통수단 중의 하나가 살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까지 읽고 '흠...... 역시 남성들은 살의 문제가 여성들보다 훤씬 중요한 모양이군' 생각하고, 불쌍한 남성들을 이해해주기로 작정한 여성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성의 성욕이 남성의 성욕보다 약하다는 속설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까닭이죠. 윌리엄 마스터즈와 버지니아 존슨의 연구가 그 속설에 도전한 지 벌써 50년이 다 되어갑니다.
-- 남성은 오르가슴 후에 다시 발기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여성은 자극만 지속되면 언제든지 오르가슴이 증가한다는 사실도 이제는 널리 알려져 있죠. 성적 욕망도 생리적 능력도 여성이 남성보다 한참 앞서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성의 성욕부족이 아니라,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입니다.
순결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마음을 얻어도 결혼전까지는 육체적 사랑을 나눌 방법이 없습니다. 영화평론가 허지웅 선생이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건축학개론> (2012)같이 잘 만든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성기가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걸 본 관객들도 역시 "성기가 없었던 것처럼 과거를 호출"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마음 얻기도 힘들지만 몸을 얻기는 더욱 힙듭니다. 게다가 '88만원 세대'의 경우 사회경제적 여건 때문에 결혼길이 막혀버렸습니다. 순결지상주의 사회에서 결혼길이 막히면 욕망을 해소할 길도 막혀버립니다. 여성의 건강한 욕망의 해방을 가로 막은 가부장제도가 결국 남성들 자신을 말려 죽이는 셈입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젊은이들이 살이라는 중요한 소통수단을 잘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너무 가볍지도 않게 살의 소통을 배우다보면 삶이 훨씬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물론 '순결'을 지키겠다는 결심도 가치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어야겠죠. 다만 그런 선택이 타인을 감시하고 심판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곤랍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만이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자는 거죠.
정신적 사랑, 육체적 사랑, 깨진 사랑, 이루어진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결혼을 전제로 한 사랑, 그렇지 못한 사랑, 무거운 사랑, 가벼운 사랑, 뜨거운 사랑, 차가운 사랑, 그 이름이야 어떻든 사랑은 아름다운 겁니다. 살의 소통을 즐기되 남이 어떻게 즐기는지에 대해서는 레이더를 꺼야 합니다. 남의 욕망을 엿보는 데 쏟는 에너지를 줄이는 대신, 내 욕망을 관찰하고 탐닉하는 모험에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개된 건강성과 은밀한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몸의 문화입니다. 몸을 누르는 사회에서는 여성도, 남성도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고백에 귀 기울이기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고백에도 내공이 필요합니다. 희생양을 양산하는 문화에서는 작은 고백을 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고백을 통해서 고백자가 더 강해지기도 합니다. 이혼과 재혼 과정이 인터넷에 갑자기 폭로되자 바로 사실관계를 인정하고 자기 입장을 밝혔던 정혜신 선생이 좋은 예입니다. 인터넷에 고백의 글을 올린 후에 엄청난 악플 세례를 받고 처음에는 그걸 모두 읽으며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밤새 읽다보니 어느 순간, '아, 이 사람들이 지금 내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얘길 하는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실재로 사냥꾼들의 악플 대부분은 사안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쏟아놓은 넋두리일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억눌린 욕망과 분노를 그렇게 폭력적으로 풀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불쌍한 거죠. 그걸 깨닫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사냥꾼들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고백과 함께 내면의 힘을 다져가는 게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잘 다독이며,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고, 깊은 내면을 이웃과 나누다보면, 나도 모르는 내 주변에는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이 하나씩 늘어납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 혼자서도 행복할 줄 아는 개인, 사냥꾼의 광기 속에서 남을 지켜주려는 따뜻한 이웃,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동지들이죠. 그런 개인들과 아주 작은 연대가 싹트고 나면, 이 험한 정글 속의 삶도 한결 견딜 만합니다.
고백이 내면의 힘이 되는 것을 본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동지들,
.
자신과 타인에 대한 신뢰가 전제된 고백은.
욕망과 규범안에서도 자유로운 에너지가 된다.
혼자서도 행복한 사람은 존재자체가 보석이다..
인간은,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은,
그 대상에 따라서 날마다 변화해 간다.
개인적으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을 때 가장 인상적이 었던 부분이 이 책에도 나온다.
내용인즉, 죽은 엄마가 이승의 하직 인사겸 자기 삶의 주변들을 영혼이 되어 돌아본다.
큰 딸, 작은 딸, 큰 아들까지 그리고 자신이 살던 시골집
그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남편도 내려다 보고, 그리고 그리고,
그 남자네 집으로 간다.
생전에, 손 한 번 잡은적 없지만 의지가 되었던 사람,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특별한 존재
엄마는 그 남자네 집을 내려다 보면서 이렇게 회고한다.
"당신은 내 비밀이었네
누구라도 나를 생각할 때 짐작조차 못 할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네.
아무도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다고 알지 못해도
당신은 급물살 때마다 뗏목을 가져와 내가 그물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는 이엿제.
나는 당신이 있어 좋았소.'
저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누구에게나 이런 비밀의 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욕망과 조심스럽게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게 안전합니다.
"욕망아 네가 숨 쉴 곳을 찾는 구나, 꼭 그래야만 한다면 좋은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이 나이에 이런 책을 쓸수있는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글이 주는 해방구랄까 카타르시스만으로도 이분은 홀가분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풀어준 이야기들이
우리가 억압해두고 쉬쉬해온 이야기들에 직면하여 드러낸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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