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벽- 김수영 산문집 중에서..

구름뜰 2012. 6. 9. 10:56

 

 

 

 우리집 예편네의 경우르 보니까, 여자는 한 마흔이 되니까 본색이 드러난다. 이것을 알아내기에 근 20년이 걸린 셈이다. 오랜 시간이다. 한 사람을 가장 가까이 살을 대가며 관찰을 해서 알게 되기까지

이만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니 여자의 화장의 본능이 얼마나 뿌리 깊은 지독한 것인가에 어안이 벙버해진다. 헤세의 <향수>라는 소설에 나오는 꼽추모양으로, 사람을 알려면 별로 많은 사람을 사귈 필요가 없다. 나의 경우에는 여편네 하나로 족한 것 같은 생각조차도 든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벽>을 보면 된다. 숙명이다. 이 <벽>이란 한계점이다.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숙명이다. 이 <벽>에 한두 번이나 열 번 스무 번이 아니라 수없이 부닥치는 동안에 내딴에는 인간 전체에 대한 체념이랄까- 그런 것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본의 아닌 철학자가 된 셈이다. 속은 것은 성품만이 아니다. 육체에 대해서도 속았다. 그녀의 발가락을 보면 네 번째 발가락이 세 번째 발가락보다 더 길고 크다. 이것은 젊었을 때는 보변서도 보지 못한 흠점이다.

 

 그런데 이런 <벽>은 여편네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일이면서도 너무나 불행한 일로는, 자식에게까지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큰놈은 발가락은 제 어멈을 안 닮았는데 성미는 닮은 데가 많다. 어멈은 로션 마개를 노상 돌려놓지 않고 그대로 걸쳐만 두는데, 큰놈은 잉크병 마개를 노상 그 식으로 해두어서 책가방과 손수건이 꼴이 아니고 나한데 노상 구박을 맞고는 했다. 그놈을 구박을 할때는 제 어멈에 대한 불만까지가 가중 해서 나는 거의 반미치광이처럼 화를 내는 때가 많았다. 그래도 어멈은 그런 루스한 성격이 자기를 닮았다고는 하지 않고 오히려 내 쪽의 조상의 탓으로 민다. 여편네의 루스한 성격의 또하나의 유전은 방문을 꼭 닫지 않고 나가는 버릇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편네와 큰놈이 닫고 나가는 방문은 언제나 10센티가량 열려 있다. 그래도 큰놈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사내놈이 되어서 그런지 다소 나의 교훈으로 교정이 되었다. 그러나 여편네가 머리를 빗고 나간 자리에는, 그렇게 말을 하는데도 아직도 기다란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고, 비닐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축축한 걸레로 훔쳐낼라치면, 방바닥에 필사적으로 달라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 품이 자개장에 박힌 자개를 떼내기보다도 더 어렵다. 나중에는 걸레로 떼려다 못해 손가락으로 떼어보려고 하지만 매끈거리는 비닐 장펀에 붙은 머리카락이 손톱으로 쥐어질 리가 없다.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쥐어도, 안 잡힌다. <벽>이다. 이렇게 되면 화를 내는 편만 손해를 본다. 그래도 눈앞이 캄카해지도록 화가 날 때가 많다. 이것도 또 나의 <벽>이다.

 

 둘째놈은 제 어멈의 희미한 성격은 단 닮았는데 발은 어멈 발하고 똑같다. 그래서 나는 어멈으 발을 보기 싫게 보지 않으려고 둘쨋놈의 발에 자주 입을 맞춰본다. <네 발을 이쁘게 보면 어멈 발도 이쁘게 보이겠지. 네 발을 이쁘게 보기 위래서 어멈 발을 이쁘게 보아야지. 어멈 발을 이쁘게 보면 네 발도 이쁘게 보이겠지........> 하고 이런 부부의 철학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죽은 박인환이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그놈이 누구한데 들었는지 나한데 이런 말을 제법 정색을 하고 한 일이 있었다. <부부란 자식 때문에 사는 거야. 여기 성냥갑이 두 개 있지. 이 성냥갑 사이에 성냥개비를 하나 놓자. 이 성냥개비는 두 쪽의 성냥갑에 실을 동여매고 있어. 그래서 한쪽의 성냥갑이 멀어질때면, 이 성냥개비가 실을 잡아당기는 거야. 너무 멀리 가면 안된다구> 그때는 또 시시한 말을 하는구나. 하고 대수롭게 들어주지 않은 말이, 이상하게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또한 이상하다.  인환이가 이 말을 실천하지 않고 죽은 것을 보면 그놈도 진정으루 믿고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놈은 멀리 떨어져 나간 성냥갑이 아니라 멀어 떨어져 나가다가 자폭을 해버린 성냥갑이 되었다. 봉래하고 진섭이 하고 소주를 마시고 난 이튿날 아침에 죽었으니까, 소줏불에 점화된 성냥감이 되었다. 그가 생전에 뇌까리던 조니웥커를 마시고 자폭을 하지 모한 것이 한스러웠을 거라. 자폭이라면 요즘 읽은 책중에서 두 가지 상징이 생각이 난다.

 

 하나는 아동물 소화를 번역하다가 읽은 얘기, 러시아의 어떤 주망나니가 보드카를 마시고 난 입으로 담배를 피우려고 성냥불을  붙여 대고 그것을 입으로 불어 끄려고 한 순간에 입가에 묻은 독한 화주에 불이 점화가 되어서 그것이 위장 속에 술까지 폭발을 일으키게 해서 죽었다는 얘기, 하나는 노먼 메일러의 <마지막 밤>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 우주선을 극도로 발전시킨 나머지 미국의 대통령과 소련 수상이 공모를 하고, 지구를 폭파시켜 가지고 그 힘을 이용해서 태양계의 밖에 있는 별나라로, 세계의 초특권인 약 백 명을 태운 우주선이 떠난다는,인류를 배신하는 미국의 정치가의 위선적인 휴머니즘을 공박한 얘기, 전자는 아동잡지의 부탁을 받고 번역을 해주었지만 후자는 아직 번역을 못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을 정면을 공박한 얘기라 <반미적 운운>에 걸리까 보아서가 아니라 이 소설의 텍스트가 없고, 일본 잡지에 번역된 것을 가지고 있어, 그것이 뜨악해서 번역을 못하고 있다. 원본이면 된다. 일본 말 번역은 좀 떳떳하지 못하다. - 이것이야말로 사대주의라면 사대주의 일 것이다. 이 사대주의의 <벽>을 뚫는 의미에서도 굳이 일본 말 텍스트로 <마지막 밤>을 번역해 보고 싶다.

 

 이 수필을  쓰기 전에 사실은 나의 머릿속에는 르 클레지오의 소설의 청사진이 박혀 있었다. 이 정도의 훙내는 낼 것 같다. 이 정도의 흉내는 안 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정도의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다. 구라파의 아방가르드의 새 문학에 면역이 되기까지도, 여편네의 면역을 하기만큼의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개무량하고 대견한 생각이 든다. 그래도 노먼 메일러의 소설을 읽고 나서는 약간 눈앞이 아찔했다. 방바닥에 붙은 여편네의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떼는 셈이다. <벽>이다. 그 수에 메일러의 <대통력의 백서>라는 저서에 대한 어떤 평론가의 평문을 우연히 하나 읽고 얼마나 초조감이 누그러지기는 했다. 그러나 여편네의 방바닥의 머리카락에 대한 분격과는 달리, 이런 초조감은 누그러지는 것이 좋지 않다. 더구나 외부로부터 누그러뜨리는 것은 좋지 않다. <1966년>

-김수영(1922~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