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와 제니>
여동생과 친정엘 가면 마흔이 넘은 동생의 헤어스타일에 엄마는 아직도 간섭을 하신다. 잔소리 듣는 동생이나 엄마의 강권이나 참 어지간하다 싶은 생각이 들지만, 내 일이 아닌지라 허투루 지내왔다. 단지 엄마가 "언니 좀 봐라, 이마를 내 놓으니 얼마나 이쁘냐?" 라는 말은 귀에 걸려서 '내 머리는 맘에 드시는 가보다' 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언제나 이마를 드러내는 스타일이고, 동생은 이마를 덮는 스타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인 조카 '제니'가 요즘 질풍노도! 그야말로 물오른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 저희 집에선 세상에서 둘도 없는 착한 딸이었고, 그도 모자라 내겐 딸 있는 동생을 부럽게 만들었던, 때로는 딸없는 설움!을 전혀 못 느끼도록 존재감 만으로도 우리가족까지 행복하게 해 주었던 녀석이 요즘 쏴~한 공기를 몰고 다니는 주범이 되었다. 어느날 농담 삼아 "언니,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라고 하는 바람에 그간의 속앓이를 짐작하고 웃었던 적이 있다.
방학이라 시간 날 때마다 셋이서 도서관엘 자주 가는데, 준비하는데 10분이나 20분이면 되는 동생에 비해, 제니는 화장실 들어가서 딱 한시간 걸린다고 한다. 기다리며 지켜보는 동생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지만 엄마야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바쁠 것이 없으니 서두를 필요도 없고, 앞머리 내리는 것이 자존심 세우는 일인양 거울앞에서 앞머리만 잡고 있단다. 어쩌겠는가. 빨리 준비하라고 하면 더 늦게 준비하고 싶은 이 사춘기를.
어제 같은 경우 동생은 늦잠에다 또 한 시간 걸릴 것이 짐작되어 화장실 들어가는 제니 뒷꼭지에 쐬기를 박았단다. "오늘은 앞머리 내리지 말고 핀 꽂아!" 라고, 잠시후 앞머리만 아니면 상관 없잖냐는 투로 옆머리(귀밑머리)를 중국영환가 일본 영환가에 나오는 귀신머리처럼 내리고 나오더라고, 그러고선 내내 팅팅 부어 갈 때부터 벌에 쏘인 모양이더니, 점심먹을 때까지 결국 점심 먹고 내가 자리 비운 사이, 잔소리 한 번 듣고도 끄떡 없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저기압이었다. 이럴땐 나처럼 적당히 무관심하면 되지만 엄마야 그리 되던가 그게 쉬운가, 어쩔까. 엄마는 이모가 아닌걸...
제부와 동생이 못 견뎌 하는 건 자기를 쏙 빼닮은 모습을 보일때라고 하는데. 제니가 아빠를 더 닮아서 제부와 얘기하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최근에 '두손 들라'는 벌을 세우고 맘이 짠해서 아빠도 함께 손을 들었다고 한다. 한 30분 쯤 지나니 제부가 팔이 아파 내리자고 하고는, 너가 잘 못했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이라고 해도 뚜한 표정으로 입을 열지 않더라고, 어느날은 제부가 " 다크(동생집 개)라도 알아 듣겠다!" 라고 고함을 치는 바람에 옆에서 놀던 다크가 깜짝 놀라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며칠전에는 "엄마도 할머니가 머리 내리지 말라고 해도 내리잖아요" 하더란다. 동생은 그제야 엄마 맘이 이해는 가더라고 하지만 저는 머리를 내리는 것이 훤씬 동안으로 보이니 내릴 수 밖에 없다고 하니, 원, 제니가 앞머리 내리는 이유는 동생말에 의하면 요즘 유행이어서 라는데. 내 보기에 제니에게 앞머는 자신의 정체성 내지는 존재감의 척도 쯤으로 여기는 어마어마한 의미를 두고 있는 일 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앞머리만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제니와, 앞머리가 제일 거슬리는 동생, 두 모녀의 신경전을 보면서 지나가야할 시기니 만큼 잘 지나야 할 텐데 하는 마음뿐이다. 아직 미숙한때라, 나 처럼 한발 물러나기가 쉽지 않다는 동생 말도 맞는 것 같고, 그런 시기라 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밖에 모르는 제니 모습(어떤 날은 도살장 끌려가는 표정이고, 어느 땐 똥 밟은 얼굴)도 이해가 간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안전핀 뽑은 수류탄 정도까지는 가지 말았으면.
제니 맘이 '다크처럼 나를 내버려 두세요'싶은 맘일지. 그동안의 가족애를 보더라도 동생집에 일어난 이상기류가 이변인지라 신기하기도 하고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또 동생이 우리집 아이들 사춘기 때는 으아해하던 것들을 경험해가는 과정도 보기 좋다. 사춘기라는 시기가 다크가 말기를 알아듣는 것 만큼 힘든 시기인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면 알아질 것들인데 어쩌랴, 잘 지내길 잘 발효되길 바라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