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지국을 하는 그와 칼국수 한 그릇 할 요량으로 약속 시간 맞춰 국숫집 뒷방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터억하니 두 그릇 든든하게 시켜놓고 기다렸는데 금방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국수는 퉁퉁 불어 떡이 되도록 제사만 지내고 있는 내 꼴을 때마침 배달 다녀온 그 집 아들이 보고는 혹 누구누구를 만나러 오지 않았냐고 은근히 물어오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홀에 한 번 나가보라고는 묘한 미소를 흘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마당을 지나 홀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아연하게도 낯익은 화상이 또한 국수를 두 그릇 앞에 두고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안상학 (1962~ )
* 이 시를 보면 국수 두 그릇 시켜놓고 나를 기다려준 것 같은 숙맥도 보입니다.
차 시간을 잘 못 확인한 지인이 미리 전화했다면 5분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걸 알면서도,
한 시간 일찍 도착할 걸 알고도 기다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 그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 한 시간은 그의 이미지로 남았습니다.
만나서 나누었을 정담에서는 느낄 수도 채울 수도 없었을 시간,
한 시간은 함께 한 몇 시간 보다 더 소중한 시간으로 남았습니다.
그는 모를테지만 그 시간은 그가 내게서 발효되고 숙성되는 시간이었음을 정작 뒤늦게 알았지요.
편지를 쓰고 우체국으로 가고 우체통을 거쳐서 그 편지가 오는 시간 같은 것,
금방 쓴 편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발효의 시간이 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설 익은 말이나 글은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발효된 마음까지야 그럴 필요가 없지요.
불어가는 국수를 앞에둔 것 같은 사람,
오늘은 그 숙맥같은 사람을 생각하며 국수를 먹어야 겠습니다.
불어도 좋은 국수 한 그릇 앞에 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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