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제도

구름뜰 2012. 8. 29. 09:46

 

아이는 하루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칠이 나갈가봐 두려워 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동자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곷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묵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김승희

 

 

 

성공 지수로 나를 재지 말고 사랑의 지수로 나를 측량해야 한다. 성공의 시계에다 맞춘 나의 삶을 사랑의 시계에다 다시 맞추어야만 우리는 인간다운 사람, 인정이 있는 사람, 자신의 인간성을 복원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대시인 T.S. 엘리엇은 “나는 나의 인생을 커피 스푼으로 계산해 왔다”고 쓴 적이 있다. 이 시구는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겠지만 우리의 인생이란 뭐 그리 요란한 성공이나 불멸의 광채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고 부질없고 하찮은 일상의 허드렛것으로나 계산될 수 있는, 그저 그런 부질없는 허무라는 뜻도 담고 있는 듯하다.

 

 

커피 스푼으로나 계산되는 인생, 커피 스푼으로나 계산될 수 있는 인생이라면 뭐 그리 욕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죽기살기로 탐욕을 부릴 것이 무엇이 있는가. (중략) 한없이 소진시키는 성공 지수로 살지 말고 너그러운 사랑 지수로 살자. 어리숙한 사람이 되자. (김승희,)

 

- 김승희(金勝熙, 1952년 3월 1일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광주 출생으로 서강대학교 영문과,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현재 서강대학교 문학부 국어국문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불의 여인’, ‘언어의 테러리스트’, ‘초현실주의 무당’으로 불린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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