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나는 나쁜 시인

구름뜰 2012. 10. 17. 09:49

 

꾀 / 오탁번

 

우리는 너무 빨리 사랑을 하고

너무 빨리 이별을 하네

논꼬 보러가는 늙은 농부처럼

미꾸리 잡아먹던 두루미가

문득 심심해져서

뉘엿뉘엿 날아가는 것처럼

사랑하고 이별할 수 있다면!

솔개가 병아리 채가는 것처럼

쏜살같이 빠르게는 말고

능구렁이가 호박넌출 속으로 숨듯

허수아비 어깨에 그림자 지듯

느려터지게는 말고 그냥 느리게

 

한평생이라야

구두끈 매는 것보다 더 금방인데

우리는 너무 빨리 이별을 하고

너무 빨리 사랑을 하네

이메일메시지야

한 손가락으로 단숨에 지울 수 있지만

수많은 새벽과 노을녘은

눈썹처럼 점점 또렷해지는데

메뚜기떼 호드득호드득 뛰는

고래실 고마운 논배미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

꾀 중에서는 제일인데 말이지

 

 

 

나는 나쁜 시인/ 문정희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봐.

민중 시인 K는 유럽을 돌며

분수와 조각과 성벽 앞에서

귀족에게 착취당한 노동을 생각하며

피 끓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는데

 

고백컨대

나는 유럽을 돌며

내내 사랑만을 생각했어

목숨의 아름다움과 허무

시간 속의 모든 사랑의 가변에

목이 메었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지.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성벽을 바라보며

오래 그 속에 빠지고만 싶었지.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봐.

곤돌라를 젓는 사내에게 홀딱 빠져

밤새도록 그를 조각 속에 가두려고 몸을 떨었어.

 

중세의 부패한 귀족이 남긴

유적에 숨이 막혔어.

그 아름다움 속에

죽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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