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권의 책을 한꺼번에 펴낸 시인 이성복씨가 16일 출판 기념회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 열화당]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정든 유곽에서’, ‘남해 금산’ 등 날카롭고 낯선 그의 시편들은 시대의 무감각과 안일함을 둔중하게 내리쳤다. 지금 읽어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그의 시를 읽으며 사람들은, 또 당대의 시인들은 허둥지둥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인은 서울의 ‘중앙 문단’과 물리적·심정적으로 동떨어진 ‘변방’ 대구에서 시 창작과 후학 교육(계명대 문예창작과 명예퇴직)에 힘써 왔다. 꼿꼿한 시의 성채(城砦) 같다고 하면 지나친 걸까.
그런 이씨가 한꺼번에 책을 세 권이나 냈다. 그동안 출간한 일곱 권 시집에서 빠진 시 150편을 묶은 『어둠 속의 시』, 단편소설 ‘천씨행장’ 등 76년∼2014년 사이에 쓴 산문 21편을 모은 『고백의 형식들』, 시인의 육성(肉聲) 시론(詩論)을 확인할 수 있는 16개의 대담을 묶은 『끝나지 않은 대화』다.
출판사 열화당이 문학 분야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내놓은 첫 작품이다. 요란한 책 디자인이 많은 요즘 출판계에서 보기 드물게 장식 없이 차분한 모습으로 세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16일 오전 파주출판단지 내 열화당 사무실. 출판사 이기웅 대표, 이인성·정과리 등 후배 문인, 대담 필자로 글을 썼던 시인 이문재·김민정씨, 이씨의 자녀 등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조촐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이씨는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77년 등단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생산한, 그의 문학의 원재료라고 할 자료들을 샅샅이 뒤져 책으로 냈으니 말이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했다. 농담이었지만, “소회를 소상하게 밝히라고 하면 울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평론가 정과리씨는 “78년 스승 김현 선생이 ‘이성복이 제대했으니 한 번 만나보라’고 해서 나간 자리에서 느닷없이 ‘나뭇가지에 시체 걸린 것 봤냐’라는 이상한 질문을 해 당황한 적이 있다”는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그 이상한 ‘삶의 언어’가 80년 출간된 첫 시집 『뒹구는 돌은…』에 고스란히 들어 있더라는 것. 정씨는 “시집을 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이 선배의 마술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믿는다”고 덕담을 건넸다.
80년대 시인들은 그의 문학적 상상력에 감수성을 빚졌고, 독자들은 그의 시 한줄에서 따뜻한 위로를 구했다. 세 권의 두툼한 두께만큼이나 마음이 풍성해질 수밖에 없다.
동시대인들을 사로잡은 이씨 시의 화두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불가능성의 시학’이다. 언어로써 사물이나 사건을 제대로 묘사하는 일은 영영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옮기려는 시인의 노력에 중단은 있을 수 없다. 시의 매혹에 한번 사로잡힌 시인에게 시 쓰기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에 가깝기 때문이다. 평소 궁금한 점을 물었다.
세 번째 시집 ‘그 여름의 끝’, 지난해 출간된 ‘래여애반다라’ 등에서 슬픔은 여지 없이 나타나는, 시인에게는 익숙한 감정이다. ‘시의 바탕에 항상 깔려 있는 슬픔의 감정은 시 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인간적 한계에서 오는 슬픔을 극복할 길은 없다. 항상 벼랑 끝을 따라 걷는 심정으로 삶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근사치’에 가까운 대답을 내놓으며 슬픔을 줄일 수밖에…”. 평생을 시로 인해 몸살 앓아온 시인의 덤덤한 고백이었다.
신준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