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정리하다가 그제 눈에 띈 책!
표지도 내용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 책을 사 놓고 안 읽었구나 하고 들쳐보니,
이런, 두어 달 전에 감명 깊게 읽은 책이다.
다시보니. 새록새록 스토리가 떠올랐다.
기억이란 게 뭔지 실마리를 잡으면 줄줄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놓치고 마는 것인지
이렇게라도 한번 더 읽고 정리해두게 된다.
건망증이 늘고 통합력도 떨어지지만
기록 습관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이 책은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을 돌아보게 한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같기도 하고, 다큐처럼 팩트처럼 읽히는 힘이 있는 책이다.
'마음'의 작가 강상중은 1950년 재일 한국인 2세다.
일본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분석을 제시하며 비판적 지식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책 '마음'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독일 문학의 거장 괴테의 '친화력'
구조와 이야기를 모티브로 작가 개인의 경험과 대참사로 이어진 동일본대지진 사건을
중측적으로 엮어내며 삶과 죽음 사랑과 관계 자연과 개발에 대해 성찰하는
독특한 소설이다.
끝이 없는 발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때에만 가치고 있는 일시적인 것밖에 배울 수 없고 결국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따라서 확실한 것을 얻지 못한 죽음은 의미가 없는 시간에 불과하고 무의미한 죽음밖에 얻을 수 없는 삶 또한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사는 의미는 다른 사람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이 그때그때 그 장소에서 주어진 질문에 답해 감으로써 발견하게 되는 것 아닐지요.
제 친구는 대략 쉰 살에 생애를 마쳤습니다. 저는 친구보다 오래 살면서 환갑을 맞았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다른 걸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제 인생에는 의미가 있고 요지로 군에게는 의미가 없으며, 제 친구에게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이런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각각 비교할 수 없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1장
'요지로' 중에서
단독성에 대한 이야기다
우린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라서
나니까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건 비교할 필요도 없으며
비교목록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는 이런데 저런데
하는 것이 얼마나 비단독적인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뭐지?
-원래 자기 의견이라는 건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닌가 생각해 버리는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들어 주는 쪽입니다.
단독적이되
상대적이다
매우
여기서 들어주는 쪽이란 건 그대로 수용해준다는 것이기 보다
그냥 봐 주는 정도 아닐까.
나쓰메 소세키는'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고양이의 입을 빌려 "거울은 나르시시즘을 빚어내는 양조기인 동시에 자만을 없애주는 소독기"라고 했지요.
봐 주는 것!
거울은 나르시시즘을 빚어내는 양조기인 동시에 자만을 없애주는 소독기!라는 건 무슨 말일까
아마도 이건 매우 상대적인 인간이 상대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나타낼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아닐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서 확고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바깥세상에 자기 몸을 드러내고 그들과 관계를 맺지 앉고서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과의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되지만, 또 자신의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 있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바로 그러한 고독 속에서 자기 나름의 캐릭터나 자기 자신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찾아 내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끌리는 일과,
서로 반발하는 관계가 생기는 일과
사랑과 우정과 배신과 양심과
그리고 그런 집합체인 자신이라는 것.
-1장 세사람 중에서
'친화력'은 1809년 괴테가 60세에 쓴 작품이다.
많이 알려진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다음에 집필한 작품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즈음 괴테는 어떤 여성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두 쌍의 남녀에 얽힌 인간 군상을 그려 냈다고 한다.
경제 발전을 최고로 여기는 가치관이 전국을 뒤덮고 있었으며 국제 사회에서도 주목받던 시기. 수도권의 발전과 지방도시의 쇠락이라는 명암이 교차하고 있었다.
- 2장 지령 중에서
인간이 행동을 하거나 무언가를 판단하려고 할 때 '자연의 소리'에 따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옳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회의 규칙이나 질서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2장 네사람 중에서
제 2부
2011년 3월 11일, 미야기현 동북쪽 바다를 진원으로 하는 '동일본 대지진'은 죽은 사람과 행방불명된 사람을 합쳐 2만 명 정도의 희생자를 냈다. 2주일이 지난 지금, 나는 피해 참상을 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리포터로 이 지역을 찾았다
모든 것이 침묵하고 있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뿐, 폐허위에 선 나는, 한순간 소리 없는 세상에 잘못 빠져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거대한 자연의 파괴력을 눈앞에 두고 있자니, 나는 텅 빈 그릇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마음은 어디론가 멀리 가 버리고 몸뚱이만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소리 높여 울고 싶지도, 절규하고 싶어지지도 않았다. 격정이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무감동에 가까운 평탄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상흔 중에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리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도서'
-bady 중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삶을 빛나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는 죽음 가운데에는 인생의기적이 있고 그 사람의 과거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의해서 그 사람은 영원이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의해서 그 사람은 영원이 된다고 말입니다.
텔레비젼 화면에도 신문이나 잡지에도 사진에도. 죽은 이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나도 찍혀 있지 않은 것을, 그러니까 나오히로 군이나 동료들과는 달리.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는 은폐된 죽음, 아니면 깨끗하게 소독된 죽음밖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애도의 마음이나 외경의 마음을 느끼겠습니까. 어떻게 눈물을 흘린다든가 또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한다든가 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5천 명의 죽음과 5천 한 명의 죽음은 단 한 명 차이일지 몰라도, 그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죽은 이의 존엄 같은 건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됩니다. 죽은 이를 통계적인 숫자로 치환하는일이. 실은 그 둘의 차이를 싹 지워 버리고 삶만으로 가득 찬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구완 중에서
우정이나 연애, 가족을 둘러싼 관계, 또는 잇속을 둘러싼 흥정이라든가, 자연스러운 본능이 샘솟는 것을 억누르고 사회에 적응하려 하는 양식이나 합리성 같은 인위적인 행위도 일종의 개발입니다. 그런 것 또한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을 되찾기 위해 파괴력이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에게서 마음을 받아,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을 살아갈 힘으로 만든다. 죽은 이를 마주하고 그 경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을 피해지역에서 수많은 죽은 사람들과 마주하는 가운데 깨닫지 않았던가요?
-자연의 소리 중에서
사람의 죽음은 어떤 것일까.
삶이란 어떤 것일까
또는 인간은 무엇일까.
솔직히 아직까지도 확실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강하게 실감한 점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과 접하면 접할수록 살아가는 것의 중요함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것의 존엄함 감사함 같은 것이 가슴에 사무치는 거예요.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제대로 살아야 해.
-나는 살아 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어디 있나.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분명 돌아가신 분들에게서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깨닫고 나서는 제가 하는 일은 돌아가신 분들의 뜻을 받아 살아갈 힘으로 살려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저 뿐만이 아니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살아가는 힘'을 얻었을 때 돌아가신분들의 '죽음'도 빛나게 됩니다. 그분의 '죽음'이 빛나는 듯한 '영원'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접하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잘못을 추궁하는 것도, 그들을 묻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키를 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을 포함한 그들의 삶을 제대로 받아들여서 우리들 속에 그것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아마도 흑이냐 백이냐의 선택은 아닐 겁니다. 제 선생님의 말씀처럼 죽음은 삶 속에. 삶은 죽음 속에서 서로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 중에 나오는 '자연'이라는 것은 자연과 인공의 양극단의 대비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잘못'이라는 것은, 정답인가 오답인가 하는 양극단의 대비가 아닙니다.
O냐 X냐가 아니라는 겁니다.
더러워진 흑을 포함하고 있기에 백이 한층 더 빛납니다. 자연속에는 이미 부자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옳은 것을 소중히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틀어진 것일까 하는 의문을 평소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는.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라이프 세이빙이라는이름의 데스 세이빙을 하면서, 제 둔한 머리로 깨달은 점입니다.
-승화 중에서
역시 내가 좋다고 생각한 걸까. 역시 나와 살아가고 싶다고 여긴 걸까. 그게 아니면 아주 조금 나한테서 위안을 받고 싶어서 아주 잠깐 돌아온 걸까. 그중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느쪽이든 좋습니다. 그런 건 확실히 해 두지 않아도 좋아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모에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으니까요.
어떻게 해도 방법이 없다면 있는 그대로를 전부 받아들여서 적어도 서로 상처를 입히는 일 없이 살아간다. 그것이 선생님께서 지난번에 말씀하신, 통째로 받아들이라는 것 아닌지요?
선생님. 모에코는 다시 가 버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런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런 것은 건져 내지 않을래요. 그야, 지금 제 품 안에 있는걸요. 지금 모에코의 모든 것을 품어 주고 싶으니까요.
-인양 중에서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품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음영으로 넘실대는 하나의 성취였다
-아들 중에서
어떻게 보면 '마음'은 '노르웨이 숲'(하루키 작)이 끝난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세상을 뜬 뒤 젊어 방황함을 자위하는 씁쓸한 고독에 몸을 맡긴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음'의 나오히로는 직접 선생님을 찾아 나서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삶의 의미란, 그저 나만이 아는 실존적인 고민이나 내밀한 아픔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뗄 수 없는 무언가로 자리매김된다.
내 삶은 타인의 죽음을 통해 질문에 부쳐지고 또 다른 이들과의 소통 속에서 모색된다.
하루키의 일인칭 화자들이 말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회의를 바탕으로
대중문화적 취향의 세련화가 이끄는 고립된 내면으로 침잠하는 경항을 보인다면
'마음'의 청년은 서툴지언정 시종 질문하고 친구들과 고민하고
나누면서 스스로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 진솔한 말 걸기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새로이 엮이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선생님과의 교우를 통한 두 사람의 성장과 치유 스토리가 시작된다.
-해설. 마음으로 가는 다섯 갈래의 길 중에서-정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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