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향기

바다의 기별

구름뜰 2017. 3. 20. 08:57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 오지 않은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내가 사는 곡룡천은 파주평야를 구불구불 흘러서 한강 하구에 닿는다. 여름내 그 물가에 나와서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다. 마침내 와서 닿는 것들과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들을 생각했다. 생각의 나라에는 길이 없어서 생각은 겉돌고 헤매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고, 생각되어지지 않은 생각은 아프고 슬펐다.


바다는 멀어서 보이지 않은데,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이 그 물가에 와 닿는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그 갯벌은 가르쳐 주었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 썰물일 것이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중략...


다시 '사랑'의 메모장을 연다. '시선'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강'이라는 단어도 적혀 있다. '시선'을 적은 날은 봄이었고, '강'을 적은 날은 가을이었다. 봄에서 가을 사이에 아무런 메모도 없었다. 메모가 없는 날들이 편안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시선' 밑에는 '건너가기'라고 적혀 있고, '강' 밑에는 또 '혈관' 이라는 말이 적혀 있다. '농수로'도 있고 '링거주사'도 보인다. 불쌍해서 버리고 싶은 단어들인데. 버려지지가 않는다.


내가 당신과 마주앉아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보았고, 당신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당신의 시선은 내 얼굴을 뚫고 들어와 몸속으로 스미는 듯했고,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목소리에 이끌려, 건너와서 내게 닿는 당신의 시선에 경악했다. 내가 당신이 이름을 부르는 그 부름으로 당신에게 건너가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당신의 시선이 내게 와 닿을 때, 나는 바다와 내륙 하천 사이의 거리와, 나와 코끼리 발바닥 사이의 기간과 공간이 일시에 소멸하는 환각을 느꼈다. 그것이 환각이었을까? 환각이기도 했겠지만, 살아 있는 생명 속으로 그처럼 확실하고 절박하게 밀려들어온 사태가 환각일 리가 없었다.


-중략..

내 빈곤한 '사랑'의 메모장은 거기서 끝나 있다. 더 이상의 단어는 적혀 있지 않다. '관능'이라고 연필로 썼다가 지워버린 흔적이 있다. 아마도, 닿아지지 않는 관능의 슬픔으로 그 글자들을 지웠을 것이다. 너의 관능과 나의 관능 사이의 거리를 들여다보면서 그 두 글자를 지우개로 뭉개버렸을 것이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은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바다의 기별 중에서


쓴다는 것은 불완전한 언어로 불완전한 세계에서 사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서 쓴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사명이 있다면

인간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언어로서 증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세상의 악과 폭력과 야만성 속에서 함께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이 세상의 온갖 야만성을 함께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김훈의 책 '바다의 기별' 에세이 표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한때 1분에 오백타가 가능했던 내 워드 스피드에 감탄한 조카는 '이모처럼 빨리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라고 할만큼 내 워드 속도는 생각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기에 알맞은 스피드였다


오늘 아침 삼십분 정도 남은 시간에 나는 이 글을 타이핑해 두고 길을 나서고 싶었다. 에세이 보다 산문시에 가까운 이 문장들, 책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문장 올리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어릴적 나만 이런 생각을 할까 다른 사람들도 할까, 나만 고민하고 살며, 내 눈에만 보이는 걸까. 다른 친구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걸까.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애매한 숱한 생각들을 떠올렸다가 잊어버리고 그렇게 나는 늘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글을 쓰면서 그 생각들이 요긴하게 쓰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상상력이 그리 무용하지 않다는 것도, 지금은 되려 내 상상력이 빈약하다는 걸 알게된다.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건 어쨌거나 부러운 일이다. 사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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