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람들은 도덕적 상태와 지적 수준이 원시적이거나 형편없이 낮지 않는 한, 사랑할 때 낭만적인 사랑을 한다.
낭만적인 사랑은 기독교적 영향이 여러 세기 지속된 결과 발생한 극단적인 형태다.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의 본질과 전개 과정을 설명하자면, 낭만적 사랑이란 영혼과 상상력이 만든 옷이며 우연히 나타난 사람에게 입혀놓고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옷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옷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우리가 만든 이상적인 의상이 해어지고, 그 아래로 우리가 옷을 입힌 사람의 진짜 육신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으로 낭만적인 사랑이란 환멸에 이르는 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처음부터 환멸을 인정하고, 이상형을 끊임없이 변경해가며, 영혼의 공작소에서 새 옷을 계속 지어내 그 옷을 입는 사람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바꿔갈 때뿐이다.
- p151중에서
'페르난두 페소아'
1888년 리스본 출생
'사실 없는 자서전'
아무 연관성이 없고,
연관성을 갖추려는 의지도 없는 단상들 속에
나의 사실 없는 자서전,
삶이 없는 인생 이야기를 무심히 털어놓는다.
이는 나의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할말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불안의 책' 은 한동안 작가들 사이에 '페소아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1935년(80년전) 47세에 간질환으로 사망한 작가의 글이 지금도 생생하게 읽힌다
이 책말고 '불안의 서'도 있다.
600페이지 넘는 분량인데 넘기는 책장이 많아질수록 잘 읽혀지는 묘한 매력이 있다.
생각 생각 생각을 써내려간 문장들...
페소아의 생각을 문장과 문장, 행간에서 만나지만
또한 모래알처럼 흘러 버리는 기분이 된다.
분명 있었고 보았는데. 내 손엔 느낌만 남은....
아무 소용없다고 여기는 행동을 고수하기.
아무효과 없다고 여기는 규율을 지키기.
그리고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철학적,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그것이 바로 우월한 인간이 지닌 유일하게 가치있는 태도다
-p123 중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잊는 것이다. 문학은 인생을 무시하는 가장 유쾌한 방식이다. 음악은 마음을 달래고, 미술은 기운을 북돋고, 연극이나 무용 같은 행위 예술은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문학은 잠에 빠지듯 인생에서 멀어지게 한다. 다른 예술의 경우, 어떤 것은 눈에 보이는 데다 살아 있는 형식을 사용하고 또 어떤 것은 인간의 삶 자체를 살아가기에 인생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문학은 그렇지 않다. 문학은 인생을 모방한다. 소설은 일어 난적 없는 이야기이고, 희곡은 내레이션 없는 소설이다. 그리고 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표현하는 생각과 느낌이다. 운율을 맞춰 말하는 사람은없으니까.
- p 156 중에서
우리가 보통 박학다식하다고 말하는 지식의 박학함이 있고, 문화라고 부르는 이해의 박학함이 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감성의 박학함이 있다.
감성이 박학은 삶의 경험과 아무 관련이 없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듯이. 삶의 경험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진정한 경험은 현실과의 접촉을 제한하고, 접촉에 대한 분석을 심화할 때 얻어진다. 그렇게 할 때 감성이 확장되고 깊어지는데. 왜냐하면 이미 우리 안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 내는 것, 그리고 어떻게 찾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 내 안에 자유가 없다면 세상 어디에 가도 자유로울 수 없다.
- 우리는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도, 아무리 낮은 곳에 떨어져도, 결코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콩디야크
우리는 우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민감한 상상력을 동원해 우리 자신을 타자화하지 않는 한 타인의 존재에 닿을 수 없다. 진정한 풍경은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창조한 신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 존재하는 대로, 특히 창조된 모습대로 보는 것이다. 세상의 일곱 구역 중 내게 흥미롭고 내가 진정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내가 여행하는 곳은 여덟번째 구역이고, 그것은 내 안에 있다. P180
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무언가를 강렬히 느끼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다. 내 감각에 대한 완전한 집중이 흐트려져 불편해지고 나만의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위험이 있는 곳에는 결코 가지 않는다. 위험이 지루해질까봐 두렵다. 석양은 지성적인 현상이다.
-P105
내가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마음 깊이 절실히 느끼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낌을 가지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생각을 가지고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느끼는 것이 사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살지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고 느끼는 것을 생각을 키우는 양식일 뿐이다.
-P100
지금은 비록 불완전한 내 글을 보면 나는 눈물을 흘리지만, 먼 훗날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다면 내가 이룰수도 있었을 완벽함이 아니라 이 눈물에 더 감동받을 것이다. 완벽한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울지 않았겠지만 더이상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완벽은 결코 구현되지 않는다. 성인들도 눈물을 흘리고, 그래서 인간이다. 신은 침묵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은 사랑할 수 있지만 신은 사랑할 수 없다.- P 92
나는 이루어질리 만무하고 특별한 일을 꿈꾸는 사람보다 접근 가능하고 합리적이고 이루어질 법한 일을 꿈꾸는 이들이 더 딱하다.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들은 좀 미쳐 있기 때문에 자기가 꿈꾸는 것을 믿으며 행복해한다. 아니면 그들은 단순한 몽상가라 영혼의 음악 같은 공상이 별 의미 없이 그들을 달래준다. 하지만 가능한 것을 꿈꾸는 이들은 진짜 환멸을 느낄 가능성이 다분하다.
로마황제가 될 수 없는 건 크게 실망할 일이 아니지만, 매일 아침 아홉시경 거리에서 마주치는 재봉사 아가씨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못하는 일은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불가능한 꿈은 처음부터 우리의 접근을 막지만, 가능한 꿈은 우리 삶에 개입하고 그 꿈을 이루려는 방향으로 삶을 진행시킨다. 불가능한 꿈은 단독적이고 독립적인 반면, 가능한 꿈은 삶에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일들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불가능한 풍경과 결코 가보지 못할 넓은 평원을 사랑한다. 특히 과거의 역사 시대에 열광하는데, 거기에서 애초에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꾸며 잠든다.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꿈은 나를 잠에서 깨운다.
P186
한낮에 텅 빈 사무실에서 창가에 기댄 채 거리를 내다본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워낙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지라 그들을 보지 못한다. 나는 불편하게 난간에 팔꿈치를 걸친 채 잠들어버리고 이대로 아무것도 알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정신이 멀리 가 있지만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거리의 세부가 눈에 들어온다. 마차 위에 쌓아놓은 상자들, 창고 문 앞에 놓인 포댓자루, 그리고 길모퉁이 가게 맨 끝 진열장에 놓인 아무도 살 수 없을 반짝이는 포트와인병들. 이제 내 영혼은 물질적인 차원을 포기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탐구한다.
거리를 오가는 이들은 얼마 전 지나간 사람들과 언제나 같은 사람들이고, 항상 흘러가는 누군가이고, 움직임의 한 얼룩이고, 불확실한 목소리이고, 스쳐지나갈 뿐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다.
나는 감각이 아니라 감각에 대한 인식을 통해...... 무언가 다른 가능성을 감지하려는 찰나인데...... 별안간 내 뒤에서 사환이 사무실에 들어오는 소리가 형이상학으로 들린다. 내가 미처 하지 못한 생각을 중단시킨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몸을 돌리고 말없이 분노에 차서 그를 쳐다본다. 잠재된 살의로 긴장한 때. 내 마음은 이미 그가 건넨 말을 듣는다. 사환이 사무실 안 건너편에 서서 웃음 지으며 큰소리로 인사한다. 나는 우주를 증오하듯 그를 증오한다. 상상 때문에 눈이 무겁다.
나는 진정한 미덕은 손에 닿지 않는 것을 쟁취하는 데 있다고, 우리가 발 딛고 있지 않은 곳에 사는데 있다고,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후에 더욱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있다고 , 불가능하고 불합리한 것을 획득하는 데 있다고, 세상의 현실이라는 장애를 극복하는 데 있다고 항상 생각해왔다.
누군가 나에게 죽은 후에 명성을 누리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기쁨을 주겠느냐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우선 인간의 생존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나도 확실히는 모른다고, 그러고 나서, 미래의 명성이 주는 즐거움은 사실 현재의 즐거움이라고 말해주련다.
명성이 바로 미래다. 자부심이 주는 행복은 어떤 물질적인 소유로도 얻을 수 없는 행복이다. 그 행복은 환상일 수도 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지금 여기 있는 것들만 누리는 쾌락보다 훨씬 크다. 백만장자는 한편의 시도 쓰지 않았으니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시를 칭송할 리 없다. 영업사원은 한 장의 그림도 그리지 않았으므로 미래의 누군가가 그의 그림에 감탄할 리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덧없는 삶에서 아무것도 아닌 나는, 실제로 글을 쓰고 있기에 먼 훗날 내 글이 읽히리라 상상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적어도 내게는 명성을 가져다줄 것이 있기에.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듯 내가 누릴 명성을 생각하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디트로이트와 미시간 그리고 리스본의 모든 상업 지구 위로 보이지 않는 내 내면의 위엄 있는 풍채가 높게 솟아오르는 것 같다. P190
종교를 비판하는 글과 과학 서적에 매혹되기 쉬운 지성의 유아기 시절에 읽었던 생물학자 헤겔의 글을 아직도 기억한다. 대충 이런 내용인데. 평범한 인간과 우월한 인간(말하자면 괴테나 칸트 같은) 사이의 거리는 평범한 인간과 원숭이 사이보다 훨씬 멀다는 것이다.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이기에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사고하는 인간 중 하위에 있는 편인 나와 로레스 출신 농부 사이의 거리는. 이 농부와 고양이나 개(원숭이라는 말은 안 쓰겠다) 사이의 거리보다 틀림없이 더 멀 것이다.
고양이에서부터 나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든 주어진 삶 혹은 부과된 운명을 진실로 책임지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뭔가에서 파생된 존재이고, 타인의 행동이 드리운 그림자이고, 그 영향이 구현된 존재이며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추상적인 사고와 객관적인 감정이 있기에 나와 농부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한편 농부와 고양이의 영혼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우월한 인간은 역설법을 사용한다는 간단한 특징에 의해 열등한 사람 및 그들의 형제인 동물과 구별된다. 역설법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음을 의식할 때 나타나는 첫번째 신호다. 역설법에는 두 단계가 있는데, 첫번째는 소크라테스가 "내가 아는 모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단계이고 두번째는 산셰스가 "나는 심지어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말한 단계다. 첫번째 단계는 스스로를 독단적으로 의심하는 단계로 모든 우월한 인간이 여기에 도달한다. 두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의심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의심까지도 의심한다. 인류가 지표면 여기저기에서 낮과 밤을 지켜보며 살아온 길지만 짧은 시간 안에서 지극히 소수만이 여기에 도달했다.
자신을 알려는 일 자체가 오류다.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은 헤라클레스의 임무보다 어려운 과제이며, 스핑크스의 수수께기보다 더 난해하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모르는 것만이 길이다. 그리고 성심성의껏 자신을 모르는 것이 역설의 실질적인 과제다. P195
더이상 쓸 수도 없으면서 왜 나는 글을 쓰는가? 글을 씀으로써 지금보다 더욱 열등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쓸 수 있는 것을 쓰지 않는다면 무엇이 남을까? 뭔가를 이루려 하는 나는 열망에 찬 평민이다. 마치 어두운 방을 싫어하는 사람처럼 나는 침묵을 견딜 수 없다. 나는 메달을 얻으려는 노력보다 메달을 더 가치 있게 여기며, 외투에 달린 모피 장식이 명예롭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같다.
나에게 글쓰는 일은 스스로를 깍아내리는 행위이지만, 차마 글쓰기를 그만둘 수 없다. 나에게 글쓰기는 혐오하면서도 끊지 못하는 마약, 경멸하면서도 의지하게 되는 악덕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어떤 독약들은 아주 미묘한데. 그것은 영혼에서 뽑아낸 재료로 만들어진다.
그렇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실이기에 다들 스스로를 잃어버리며 산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기쁨 없이 나를 잃어버린다. 나의 상실은 알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나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파도가 높이 몰아쳤을 때 바닷가에 생겼다가 다시는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는 물웅덩이 같다.
P201
155
지루함을 견디려고 일하는사람이 있듯이, 나는 때로 아무 할 말이 없어서 글을 쓴다. 아무 생각이 없을 백일몽에 빠지지만 나는 글쓰기 형식을 빌려서 빠지는데. 산문으로 꿈꾸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진지한 감정과 진실한 감동을 많이 끌어낸다.
때로는 살아 있다고 느끼는 공허함이 깊어진 끝에 꽉 찬 긍정에 이르는 순간이 있다. 흔히 성인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인물들은 행동하는 사람으로, 감정의 일부만이 아닌 모든 감정을 품은 채로 행동에 나선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감정은 그들을 무한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들은 밤과 별빛으로 화관을 만들어 쓰고, 침묵과 고독의 성유를 스스로에게 붓는다. 한편 초라하게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의 인물들은 위대하지만 행동하지 않는다.
-나는 마치 죽어버린 자식을 미친듯이 흔드는 어미처럼 나 자신을 흔들면서 들을 쓴다. P204
160
뭔가를 뒤흔들어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의 지성을 고통스럽게 한다. 나에게 폭력은 어떤 종류가 됐든 인간의 어리석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방식일 뿐이다. 모든 혁명가들은 어리석다. 그리고 모든 개혁들도 마찬가지지만 혁명가들보다는 덜 성가시고 덜 어리석다.
혁명가와 개혁가는 같은 오류를 범한다. 자신에게 전부인 인생 또는거의 전부인 자신을 이해 행동을 하거나 혁신하거나 지배할 능력이 없는 들의 도피처. 그것이 바로 외부 세계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겠다는 노력이다. 모든 혁명가와 개혁가는 다 도피자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 자신과 싸울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개혁한다는 것은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바른 감수성과 곧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의 부당함과 악덕에 대해 고민한다면, 부당함과 악덕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가장 가까운 곳, 즉 자기 자신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이 과업을 수행하는 데는 평생이 걸릴 것이다.
모든 것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는 것은 우리를 위해 세상을 바꾸는 일. 또는 그냥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결국 우리가 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도록 하는 우리 내면의 정의, 죽은 감수성을 되살리는 진졍한 개력, 이런 것이야말로 진실이고, 우리의 진실이고, 유일한 진실이다.
-혁명? 변화 나의 진실한 영혼을 걸고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저 특징 없는 구름들이 더이상 하늘을 회색 거품으로 칠하지 않는 것이다. 구름 사이에서 솟아나는 푸른색,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에 확실하고 분명한 진실인 푸른색을 보고 싶을 따름이다. P210
167
우리가 노예라는 사실은 도망칠 수 없고, 반항할 수 없고, 따를 수밖에 없는 삶의 유일한 법칙이다. 어떤 이들은 노예로 태어나고, 어떤 이들은 노예가 되고, 어떤 이들은 노예로 있기를 강요받는다. 자유에 대한 우리의 비겁한 사랑-자유를 준다 해도 낯설어 거부할 게 틀림없는 -은 우리의 노예근성이 얼마나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인지 모여주는 징표다. P218
169
지금까지 쓴 모든 글을 한 문장, 한 문장씩 천천히 맑은 정신으로 다시 읽는다. 그러면서 전부 다 헛소리이고, 차리리 쓰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문장이든 제국이든 일단 성취된 것들은 이미 성취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물의 가장 나쁜 면, 즉 부패로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내가쓴 글을 다시 읽어가는 이 나른한 순간에 나를 정말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다. 나를 정말 괴롭히는 것은, 내가 쓴 글은 수고할 가치가 없는 글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글을 쓰는 시간을 통해 얻은 것은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환상뿐이었는데, 이제 환상이 깨졌다는 것이다. P220
170
산다는 것이 태양이 빛나는 날 바나나 장수가 있을때 거리에서 바나나를 사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글을 쓰는 편이 삶을 감행하는 것보다 낫다. P223
179
우리 중 가장 높이 올라간 이는 바로 모든 것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공허한지를 깊이 깨달은 자다.
아마도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은 환상일 것이다. 의식이 우리를 이끌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P234
180
언젠가 성공해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자유롭게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의 불안정한 삶, 책을 내지도 못하고 글을 자유롭게 쓰지도 못하는 지금의 삶을 오히려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삶이 비록 시시하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든 종류의 삶에는 나름의 특별한 성격이 있고 고유한 즐거움이 있기 마련인데 다른 삶을 살게 되면, 비록 생활이 더 나졌다 하더라도 그 고유한 즐거움은 원래처럼 좋지 못하고 그 특별한 성격은 더이상 특별하지 않아 결국 사라지고 놓쳐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P234
190
때때로 나는 서글프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언젠가 내가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은 미래에, 지금 내가 쓰는 이 글들이 찬사를 받는 날이 오고, 마침내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진정한 가족들 사이에서 태어나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기 한참 전에 나는 이미 죽어 있을 것이다. 죽은 자가 살았을 때 겪었던 냉대를 애정이 보상해줄 수 없을 때, 나는 단지 우표속 초상으로 이해될 것이다.
언젠가 사람들은 내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우리가 태어난 세기의일부를 해석하는 타고난 사명을 완수했음을 이해할 것이다. 그 사실을 비로소 이해한 이들은, 동시대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불행히도 내 작품을 홀대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내가 그렇게 살았다니 유감스럽다고 글을 쓸 것이다. 그런 글을 쓰는 이들은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동시대에 살고 있는 나같은 사람을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증조부 세대에게만 쓸모 있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리지 죽은 이들을 상대로나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P246
194
끔찍한 피로감이 내 마음속 영혼을 채운다. 내가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존재 때문에 슬프다. 그 존재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해질녘마다 내 희망과 부딪혀 쓰러진다. P251
196
우리를 가장 아프게 하고 우리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감정들은 실상 터무니없는 것들이다. 오로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품게 되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갈망,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일에 대한 아쉬움, 누군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한 데 대한 비탄, 이세상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만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어중간한 의식은 우리 안에 쓰라린 풍경을 만들고 우리를 영원한 황혼녘으로 만든다. 그럴 때면 우리 자신이, 넓은 강둑 사이에 강물이 검게 반짝이고 배가 지나가지 않는 강가의 갈대들만 서글프게 어두워져가는 황무지처럼 느껴진다. P253
208
알든 모르든 우리 모두가 형이상학적 사유를 하는 것처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모두에겐 도덕성이 있다. 나의 도덕성은 매우 단순하다. 어느 누구에게든 선도 악도 행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는 이유는, 나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 입지 않을 권리가 있고 세상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악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알지 못하는 어느 항구를 떠나 알 수 없는 다른 항구로 항해하는 한배에 오른 신세다. 우리는 여행 동반자로서 서로를 배려해야 한다. 선을 행하지 않는 이유는, 우선 선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고, 선을 행한다고 생각할 때 정말로 선을 행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동냥을 줄 때 사실은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나? 누군가를 교육하거나 가르칠 때 사실은 어떤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알 수 없으므로 나는 아무것도 안 하련다. 그리고 돕거나 뭔가를 밝혀 알려 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방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친절이란 우리 기분이 일으키는 변덕이다. 그것이 박애 정신이나 자비심의 귀결일지라도 우리에게 타인을 변덕의 희생자로 만들 권리는 없다. 선행은 부담을 주는 일이기에 나는 선행을 냉정하게 혐오한다.
도덕적인 이유에서 선을 행하지 않으니,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이 내게 선행을 베풀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만일 병이 난다면 누군가에게 돌봐달라고 청해야 할 텐데 이게 가장 싫은 일이다. 나는 아픈 친구를 찾아간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아플 때 누가 문안을 오면 항상 불편했고, 모욕당한 듯햇고, 단호하게 지켜온 내 사생활을 부당하게 침해당한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타인이 나에게 뭔가 베푸는 게 싫다. 그건 마치 당사자나 다른 이에게 같은 것을 돌려줘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다.
나는 지극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지극히 사교적인 사람이다. 절대로 남을 해치지 않을 사람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고, 그 이상이 되고 싶지도 않으며, 그 이상이 될 수도 없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에게 지성적인 관심을 기울이지만,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느 것은 하나도 없다.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동정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종류의 진지함을 고수하는 진지한 이들과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를 지키는 신비주의자들, 정확히 말해서 모든 진지한 이들의 진지함과 모든 신비주의자들의 신비주의에 구토감을 느끼고 아연실색한다. 그들이 이런 신비주의를 실행에 옮길 때면, 즉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간섭하려 들거나 진실을 발견하고 세상을 개혁하려 들 때면 구토감은 거의 육체적인 증상이 된다.
나는 일찍 가족을 잃었고 이를 행운이라고 여긴다. 덕분에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의무를 대단히 부담스러워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느 그리움은 그저 문학적인 것에 불과하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지만 그 눈물은 이미 문장으로 표현될 준비가 된, 즉 운율이 있는 눈물이다. 나에게 어린 시절은 어떤 외부적인 것으로 기억되고 외부적인 것들을 통해 기억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오직 외부로 드러난 모습들뿐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중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내가 살았던 시골 마을 저녁의 고요함이 아니라 식탁에 차가 준비되어 있던 방식, 집안에 가구가 놓여 있던 모습, 사람들의 얼굴과 신체적인 몸짓 등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건 장면들이다. 그렇기에 내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의 어린 시절도 나를 감동시킨다. 둘 다 내가 모르는 과거의 순수하게 시각적인 형상이고, 나는 여기에 문학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그렇다 내가 기억해서가 아니라 내 눈에 보이기 때문에 감동하는 것이다.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업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것은 나의 감각들, 의식적으로 보고 있는 상태, 귀기울일 때 받는 느낌. 그리고 세상의 소박한 것들이 과거(과거는 냄새를 통해 참 쉽사리 기억된다)의 일들을 상기시키며 내게 말 걸어오는 방식인 향기 등이다. 그것들은 이를테면 오래전 어느 오후, 나를 무척 아껴줬던 친척 아저씨의 장례식에서 돌아오던 길에 느꼈던 뭔지 모를 안도감처럼 근처 빵집 안에서 빵을 굽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이상의 사실적 느낌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나의 도덕성, 나의 형이상학, 혹은 바로 나다. 내 영혼을 비롯한 모든 것의 옆을 스쳐가는 나그네인 나는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보편적 감각의 추상적인 중심이며, 넘어진 상태로 세상의 다양성을 비추는, 지각을 가진 거울이다. 이런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P271
209
타인과 협조하고 관계를 맺고 행동하는 것은 형이상학저으로 보면 병적인 충동이다. 타인과 맺는 관계에 개인의 영혼을 빌펴줘선 안 된다. 존재란 신성한 것이므로 타인과 공존이라는 악마적인 것에 절대 항복하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려 들면 꼭 잃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홀로 행동하는 미덕이다.
내가 어딘가에 참여하고 있을 때 겉으로 보기에는 나를 확장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제약하는 것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죽는 것이다. 나에게는 나의 자의식만이 현실이다. 다른 사람들은 자의식 속에 불확실한 현상일 뿐이고, 이 현상에 진정한 현실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병적인 악취미나 마찬가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려는 어린아이들, 존재하기를 원하는 그들이야말로 신과 가장 가깝다.
어른이 되면 우리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적선하는 행위로 축소되고 만다. 우리 모두 다른 삶의 적선으로 살아간다. 우리의 개별성을 공생이라는 난잡한 잔치 속에서 낭비해버린다.
입밖으로 소리 내어 내뱉은 단어 하나하나가 우리를 배반한다. 그나마 참을 수 있는 소통의 매개는 글인데, 글은 영혼 사이에 걸쳐진 다리 위의 돌이 아니라 별 사이의 한줄기 빛이기 때문이다.
설명하는 것은 곧 믿지 않은 것이다. 모든 철학은 영원의 외투를 두른 외교술이고, 외교술이 다 그렇듯 실체는 없이, 자신을 위해서 아니라 완전히 그리고 순전히 어떤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
P273
212
의견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의견이 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의견을 다 가진다는 것은 시인임을 의미한다. P275
227
나는 예술 양식으로서 시보다 산문을 선호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개인적인 이우다. 내게는 시 쓰는 재주가 없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다. 두번째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이유 인데. 첫번째 이유의 그림자이거나 위장된 형태라고 볼 수는 없다. 이 두번째 이유는 모든 예술적 가치의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이므로 자세히 살펴볼 만하다.
- 산문을 쓸때는 보다 자유롭다. 시적 리듬을 집어넣으면서 리듬 밖에 머물 수도 있다. 우연히 발생하는 시적 리듬은 산문을 방해하지 않는다. 반면 우연히 발생하는 산문적 리듬은 시를 무너뜨린다.
산문은 모든 예술을 아우른다. 언어 안에 온 세상이 들어 있어서이기도 하고, 자유로운 언어는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P292
231
영혼의 비극 중 하나는, 완성한 작품이 조금도 훌륭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그 작품이 영혼이 이룰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깨달을 때 비극은 더욱 극대화된다. 하지만 영혼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문이자 모욕은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자기 글이 불완전하고 부족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아는 것. 그리고 쓰는 동안에 글이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라는 것을 때닫는 것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은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쓸 글 역시 결코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철학적으로 알고, 몸으로 알고, 글라디올러스 꽃 사이로 희미하게 엿보여서 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늘 포기한다고 선언하면서도 실은 온전히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와 산문에 끌리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러니 벌칙을 수행하듯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큰 벌은 내가 쓰는 글이 완전히 쓸모없고, 결함이 많아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P296
232
아무것도 나를 만족시키지 않고, 아무것도 나를 위로하지 못하며 존재했던 것과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것에 싫증이 난다. 내 영혼을 갖고 싶지도 않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며, 나에게 없는 것을 포기한다.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고,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나는 나에게 없는 것과 내가 원하지 않은 것 사이에 놓인 다리다. P298
235
사랑받는 것, 진심으로 사랑받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타인의 부담스러운 감정의 대상이 된다는 일의 피곤함! 항상 자유롭고 싶어하는 당신이건만, 타인의 감정에 무신경하고 인간의 영혼이 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감정을 거절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심부름꾼 신세가 되어 응대할 의무를 다하고 도망가지 않고 체면을 지키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타인의 감정과 연결된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존재가 돼버렸다는 피곤함! 어떤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느껴야하고, 반드시 받은 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돌려줘야 하기에 조금은 사랑해야 하는 피곤함! P302
"진실로 사랑받았던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로 시작하는
235번째 조각글 서두다.
페소아는 단 한번의 연애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오펠리아 케이로즈와의 추억에 대한 고백으로 보이는 문장이다.
236
사람이든 사랑이든 어떤 이념이든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것, 진실을 믿지 않고 진실을 안다는 것의 유용성도 믿지 않으며 초연한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늘 사고하며 사는, 내면이 지성적인 자가 갖춰야 할 바른 자세라고 본다.P302
255
이 삶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한 가지, 삶 자체에 대한 감사 외에 신에게 한 가지 감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지라는 선물이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무지와 서로를 모르는 무지. 인간의 영혼은 어둡고 끈적끈적한 심연이고, 땅의 표면에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우물이다. 자
우리는 서로 모르기 때문에 어울려 살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이 그 말의 위험을 모른 채 하는 말처럼, 만일 수많은 행복한 부부들이 상대방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서로를 정말로 이해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모든 결혼은 다 잘못된 결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있는 '악마'의 영역인 비밀스러운 장소에 간직된 남성상과 여성상은 배우자가 구현할 수도 없고, 상대를 만족시킬 수도 없는 이상형이자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가장 행복한 이들은 자신의 좌절된 욕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덜 행복한 이들은 그것을 알지만 무시하고 살기로 한 자들이다. 때로 불의의 습격이나 퉁명스러운 모욕으로 인해, 그들 안에 숨겨져 있던 악마, 고대의 이브, 기사와 요정 등이 행동과 언어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P327
260
예술의 역할은 우리가 느끼는 바를 타인들도 느끼게 하는 것, 우리의 개별성을 제공하여 이를 통해 타인들이 스스로에게서 해방되도록 하는 것이다.
예술은 사회적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위대한 예술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말을 걸고, 다른 하나는 우리 영혼의 깨어 있는 곳에 말을 건다. 첫번째가 시이고, 두번째가 소설이다. 시는 구조를 통해 거짓말을 하고, 소설은 거짓말을 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p336
271
사랑을 억제하면 실제로 사랑을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사랑이라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 오직 관념으로 접근할 때만 손상 없이 현실의 의미를 파악한다. p349
283
자유란 고립을 견디는 능력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 수 있다면, 즉 돈이나 친고 또는 사랑이나 명예. 호기심 등, 조용히 혼자서 만족시킬 수 없는 욕구들을 해결하려고 다른 사람들을 찾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자유롭다. 만일 혼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노예로 태어난 사람이다. 아무리 고귀한 영혼과 정신을 갖고 있다 해도 혼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귀족적인 노예, 지적인 노에일 뿐이고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p361
303
감정이 없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실용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감성의 결여다. 실용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행동을 추진하는 능력, 즉 의지다. 행동을 방해하는 두 가지 요소는 바로 감성과 분석적인 사고다.
-행동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개성과 아픔, 기쁨을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필요하다. 타인에게 잘 공감하는 자는 행동하지 못한다. 행동하는 사람은 바깥세상을 움직이지 않는 물질만으로 이루어진 장소로 간주한다. P381
313
자기들이 행복할 줄도 모른 이 모든 사람들의 행복이 나를 짜증스럽게 한다. 인간의 삶은, 참다운 감성을 갖춘 자라면 느껴야 마땅한 괴로움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들의 실제 상태는 식물이나 다름없어서 고통이 그들의 영혼을 건드리지 못하고 지나가버린다. P393
314
우월한 인간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쏟지 않도록 자기 영혼을 다스리는 데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돌보기 위해 할 수 없이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p395
328
모든 예술가의 작품에는 더 완벽해질 여지가 있었다. 한 줄 한 줄 읽어보면, 위대한 시에서 더이상 좋아질 수 없을 법한 구절은 얼마 안 되고, 더이상 강렬할 수 없을 법한 장면도 별로 없으며, 하나의 전체로서 더이상 훌륭할 수 없을 듯이 완벽한 작품 역시 하나도 없다.
- 나 자신도 듣고 있는 나의 말을 당신은 달가워하지 않는구나. 내가 큰 소리로 하는 말을 듣는 나의 귀는 내면의 귀가 내 생각을 듣는 것처럼 듣지 못한다. 심지어 나조차 내 말을 잘못 알아듣고 여러 번 나 자신에게 무슨 뜻인지 물어봐야 하는 판이니 다른 이들은 얼마나 많이 나를 오해하겠는가?
329
타인이여, 우리 모두는 서로를 보지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적 있는가? 우리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우리는 마주보고 있어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서로의 말을 듣고 있지만 각자 자기 안에 있는 말을 들을 뿐이다.P411
333
해결할 수 있느 문제는 없다. 어느 누구도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수 없다. 그저 포기하든가. 잘라버릴 뿐이다. 우리는 지성적인 문제들을 감정적으로 함부로 해결해버리곤 한다. 생각하기 지쳐서 혹은 결론 내리는 것이 두려워서다. 아니면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다는터무니 없는 욕구 때문이거나, 빨리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군서 본능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결코 어느 한 문제와 관련한 모든 요인을 알 수는 없으므로 절대 문제를 풀 수 없다.
진실에 도달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고, 이 자료둘을 철저히 해석하는 지성적 과정도 부족하다.
p417
337
지식을 갖추었거나 갖추지 못한 멍청이들, 행복이나 불행에 역겨울 정도로 괴상하게 반응하는 이들, 단지 존재하기에 끔찍한 이들,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권태, 그리고 나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만물이 일으키는 나와 동떨어진 파도....... p420
341
글을 쓸 때면 나 자신 안으로 경건하게 들어간다. 내 상상 속 틈새에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기억하는 특별한 방이 있다. 나는 그 방안에서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분석하며 즐거워하고, 어두운 구석에 걸린 그림을 보듯이 나를 관찰한다. p425
348
내가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소설 속에서만 인생을 살고 현실의 삶에서는 휴식을 누리는 것이다. 책에서 감정을 읽고 현실에서는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상상력이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은 소설 속 주인공의 모험을 통해 진정한 감정을 느낀다. 주인공의 모험은 곧 독자의 모험이 된다. 진실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맥베스 부인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근사한 모험은 없다. 그런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현실의 삶에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쉴 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p432
349
가장 비참한 욕구는 고백하고 싶다는 욕구다. 외부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영혼의 욕구다.
그래, 고백하되. 그대가 느끼지 않은 것을 고백하라. 당신의 비밀을 고백함으로써 비밀의 족쇄에서 영혼을 자유롭게 하되. 한 번도 품어본적 없는 비밀을 털어놓아라. 그 진실을 말하기 전에 그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라.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는 언제나 실수다. 반드시 기억하라. 그대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거짓말과 동의어가 되도록 하라. p434
363
적어도 우리는 감각이라도 소유하나? 적어도 사랑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 방법이 아닐까? 적어도 우리가 존재한다는 꿈을 더욱 생생히, 그리하여 더욱 눈부시게 꾸는 방법이 아닐까? 감각이 사라진 후에도 최소한의 기억은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남아 있으니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은....
- 이런 착각마저 던져버리자. 우리는 우리의 감각조차도 소유하지 못한다. 말하지 마라, 기억이란 결국 과거에 대한 감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든 감각은 환상이다. p447
내가 내 몸을 소유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 몸으로 뭔가를 소유할 수 있을까? 내가 내 영혼을 소유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 영혼으로 뭔가를 소유할 수 있을까? 내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 마음으로 뭔가를 이해할 수 있을까? p448
391
시간 날 때마다 명상하고 관찰해온 결과, 사람들은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하거나 유용한 진실을 알지 못하며 그것울 두고 합의를 이루지도 못한다는 걸 알게 됐다. p481
392
대중은 보통 사람들이다.
대중은 결코 인도주이적이지 않다. 대중이라는 집단은 근본 특징은 자신의 이익에만 편협한 관심을 쏟고 타인의 이익에는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등을 돌린다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나는 어제 살았던 것, 어제 살았던 나를 부정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부인하는 것이다. 같은 신문에 실었던 어제의 오보를 정정하는 오늘의 뉴스야말로 인생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원한다는 것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이룬 무엇인가를 원했던 사람은 그럴 능력을 가지기 전에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은 욕망으로 인해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결코 이루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그것이 기본 원리다.p483
446
타르트는 인생은 부질없는 것들을 통해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올들치 학장은 포도주의 행복을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에 우리에게는
술을 마시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좋은 술, 친구, 또는
갈증, 아니면 나중에 갈증이 생긱까봐
아니면 아무거나 다른 이유로.
P548
이 책은 작가가 사망하고 47년만에 출간(100년전에 쓴 글이지만)되었고,
집필당시인 1912년에 시인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은 '불안의 책'집필에 매진하라고 빌어붙인다네, 하지만 모두 조각, 조각, 조각들이야, 라고 말했다고 한다.
파편화되고 연결되지 않는 짧은 글만을 쓰는 '깊고 고요한 우울'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없는 자서전'이라는 부제가 달린 미완성 원고로 페소아 사후에 발견됐다.
481개의 조각 어느곳을 펼쳐봐도 독자는 작가가 말하는 불안의 정서를 감지할 수 있다,
정리도 리뷰도 불가능한 책을 옮겨 놓는 일로
페소아의 여러 모습에 조금 더 깊이 다가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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