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에 대한 편리한 지침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이 퍼스낼리티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ㅡ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노력이 없는 한, 또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주려고 한다.- 머리말 중에서
첫 문장이다.
가슴의 문제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랑!
그래서 사랑은 감정이라 여겨왔는데
작가는 감상적으로 접근해서는 사랑도 이 책도 아니라는 단호함이 보이는 머리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였던가
'사랑의 기술'을 선물로 받았다.
처음으로 받은 책 선물이었고, 남학생이 준 거였다.
상 하 두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목은 기막힌데 내용은 도무지 무슨말인지 어려웠던
책도 몇권 없는 책꽂이에 꽂아두고 모서리 제호를 보면서 그렇게
에리히 프롬과 '사랑의 기술'은 읽히지도 읽어지지도 않았지만 내게 익숙한 책이었다
삼십 년도 더 지난 지금 이번달 토론 도서라 정독을 했다.
여전히 쉬운 책은 아니지만 잘 읽혔다
나이 때문일까 사랑에 대한 경험 때문일까
젊은 날 이 책을 탐독했다면 그때 좀 더 성숙했다면
내가 보낸 사랑들은 좀 달라졌을까.
아니 내 삶은 달라졌을까.
토론을 위해 더욱 몰입하여 읽은 책이다.
혼자 읽기에 아까운 문장들이 많다.
사랑은 '가슴'의 문제도 '대상'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
우리는 '멋진 사람'을 만나면 '멋진 사랑'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환'상이라는 것을 작가는 심도있게 독자에게 알려준다.
1956년에 출판, 고전에 반열에 오른 책답다.
고전이 좋은 이유를 이번기회에 또 알게 된다.
각설하고, 탐나는 문장들 잘 읽히고 이해가 쉬운 문장들만 골라서 올려본다
.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리겔수스
1 사랑은 기술인가?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사람은 거의 없다.
이 특별한 태도는 몇 가지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전제는 단독으로 또는 결합되어서 이 태도를 뒷받침해준다 .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P13
두번째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P14
이 반어법 문장들은
사랑은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라고 풀어주고 있다.
이 생각은 20세기에 일어난 변화라고 한다.
이전 낭만적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낭만적 연애는 인류 역사를 봤을 때 역사가 짧다.
정략결혼처럼 누구와 짝을 지어주어도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1
사랑,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
분리 경험은 불안을 일으킨다.
인간이 분리된 채 사랑에 의해 다시 결합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 이것이 수치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이것은 죄책감과 불안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이 목적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실패할 때 광기가 생긴다. 우리는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분리감이 사라질 때에 완전한 고립이 공포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외부 세계도 사라져 버린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지 못한다.
도취적 합일의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강렬하고 심지어 난폭하다는 것
둘째는 퍼스낼리티 전체에, 몸과 마음에 일어난다는 것,
셋째는 일시적이고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독자성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예컨데 탈무드에도 표현되어 있다. 곧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전 세계를 구한 것과 같고, 한 생명을 파괴하는 자는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평등은(칸트에 의해 가장 명백하게 표현되어거니와) 인간이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만인은 각기 목적이고, 목적인 한에서만 동등하며, 서로 수단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가학적 음란증(사디즘 sadism)적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고독과 갇혀 있다는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다른 사람을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팽창시키고 강화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에 의존하듯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도 복종하는 자에게 의존한다. 양자는 한쪽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 차이점은 오직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하고 착취하고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가히고,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받고 착취당하고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다. P37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P38
남성의 성 기능의 절정은 준다는 데 있다. 남성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성기를 여자에게 준다. 오르가슴의 순간에 남자는 정액을 여자에게 준다. 그는 능력이 있는 한, 정액을 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만일 줄 수 없다면 그는 성적 불능자이다.
여자의 경우, 비록 약간 더 복잡하기는 하지만, 사정은 다르지 않다. 여자도 자기 자신을 준다. 여자는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중심을 향해 문을 열어준다.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그녀는 주고 있는 것이다. 주는 행위가 불가능하다면, 받기만 한다면, 그녀는 불감증이다. 여자의 경우, 준다는 행위는 애인으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기능을 나타낸다.
물질적 영역에서는 준다는 것은 부자임을 의미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다. 그는 자기를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P41
준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에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을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 P42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존경의 어원(respicere=바라보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와 같이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 (또는 그녀)와 일체감을 느끼지만 이는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이지 내가 이용할 대상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그와 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목발 없이, 곧 남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 될 수 있다. 프랑스의 옛 노래처럼,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며 결코 지배의 소산이 아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 알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고 모든 사람을 안다 -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오직 한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인간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사고가 제시하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일의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P50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상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를 통한 지식, 곧 심리학적 지식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 충분한 지식을 얻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P51
프로이트는 성적 본능을 몸속에 화학적으로 생긴 고통스럽게 해방을 갈망하는 긴장의 결과하고 보았다. 성욕의 목적은 이 고통스러운 긴장을 제거하는 것이고 성적 만족은 이러한 제거에 성공하는 것이다.
유기체가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할 때 굶주림이나 갈증이 생기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욕이 생긴다고하는 점까지는 이 견해에 타당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욕은 갈망이고 성적 만족은 갈망의 해소다. 이러한 성욕의 개념을 갖는 한, 사실상 자위는 이상적인 성적 만족이리라. P56
분리 불안, 인간의 불안은 분리에서 온다는 얘기다
아기는 원래 엄마와 한몸이었다가 분리되므로 분리되지 않기를 갈망하게 되고
분리 자체가 외로움 고독이라는 감옥이라는 것인데.
이것을 극복하고 싶어 말하자면 잊고 싶어 사랑을 갈구하고 누군가와 함께하기를 원한다는 것
그것이 본능인것 같지만 반드시 본능도 아니라는 얘기가 뒤에 나온다
스스로 외로움이나 고독감을 극복했을때
다시 말해서 '온전히 혼자있을 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은 외부세계를 차단시킬 수도 있고
스스로 외부세계를 객관적으로 보는 자신을 볼 수 있기도 하단 얘기다.
2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는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P62
무조건적 사랑은 어린아이만은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 가운데 하나다. 한편 어떤 장점 때문에, 다시 말하면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경우, 언제나 의심이 남는다. 내가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언제나 남아 있다.언제나 사랑을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랑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즐겁게 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받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분석해보면 사랑받는 게 다니라 이용당하고 있다는 쓰라린 감정을 쉽게 일으킨다. P63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는 어머니다운, 그리고 아버지다운 양심을 갖게 되어야 한다 .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떠한 악행이나 범죄에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 고 말하고,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네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하고 내 마음에 들고 싶다면 너는 너의 생활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다.
자기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어머니다운 양심을 간직하고, 자신의 이성과 판단에 아버지다운 양심을 간직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성숙한 사람은 어머니다운 양심과 아버지다운 양심이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데도 이러한 두 양심을 모두 가지고 사랑한다. P67
3
사랑의 대상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서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 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믿고 있다. - P69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성격의 방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받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가지 사랑의 형태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P70
형제애
시몬느 베유(Simone Weil)가 아름답게 표현한 바와 같이 같은 말도(예컨데 남자가 아내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라고 말하는 것) 그 말을 하는 태도에 따라 평범할 수도 있고 특별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인간 존재의 핵심에 있는영역 -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의지 없이 이 말이 나오게 하는 영역- 의 깊이에 달려 있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일치에 의해 이 말들은 이 말을 듣는 사람의 동일한 영역에 도달한다. 따라서 듣는 사람은, 약간의 분별력이라도 있다면, 이말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가려낼 수 있다.
무력 상태는 일시적 상태고 스스로의 발로 서서 걷는 것은 영원하고 공통된 상태다.
육친을 사랑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 아니다. 짐승도 새끼를 사랑하고 보호한다. 무력한 자는, 그의 생명이 주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주인을 사랑한다.
어떤 목적에 이바지하지 않는 사랑에 있어서만 사랑는 펼쳐지기 시작한다. 구약성서에서 인간이 사랑해야 할 중요한 대상이 가난한 자, 이방인, 과부, 고아 끝으로 국가의 적, 곧 이집트인과 에돔인이라고 한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목적없이 사랑하는 것,
이기적인 사랑을 넘어선 사랑을 얘기한다.
육친을 사랑하고 내 가족 친척을 사랑하는 것은 자랑도 무엇도 아니며
목적 없는 사랑, 나보다 가난하고 어려운자에게 도움을 주는 것,
신이 원하는 사랑도 그런것이라는 걸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만
실천의 문제에서는 늘 벽에 부딪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도 인간은 도움이 필요한, 곧 약하고 위태로운 자기를 사랑한다. 동정에는 지식과 동일시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P72
모성애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무리 심하게 말해도 과장이 될 수 없다. 삶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불안도 감염된다. 이 두 태도는 어린아이의 퍼스낼리티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P73
사랑하는 어머니인가 아닌가를 가려내는 시금석은 분리를 견디어낼 수 있는가. 분리된 다음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P76
성애
우선 성애는 흔히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경험, 곧 그 순간까지도 낯선 두사람 사이에 있던 장벽이 갑자기 무너져버리는 경험과 혼돈한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갑작스럽게 친밀해지는 이러한 경험은 본질적으로 오래가지 못한다.
낯선 사람들이 친밀하게 아는 사이가 되면 이미 극복해야 할 장벽도 없고, 더는 갑작스럽게 접근할 수도 없다. '사랑받는'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잘 알게 된다. 어쩌면 거의 모른다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상대방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경험을 한다면, 그의 퍼스낼리티의 무한성을 경험할 수 있다면, 상대방이 이와 같이 친밀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장벽을 극복하는 기적은 매일 새로 일어날 것이다. -P77
에리히 프롬이 주장하는 실패하지 않은 사랑의 핵심은 이 문장이 매우 가까이 다가가 있다.
상대방이 퍼스탤리티의 무한성을 경험하는 일.
그리하여 서로 친밀해진다면 그 어떤 장벽도 극복할 수 있는 시랑을 만들수 있다는 얘기다.
즉 사랑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장이다.
절대로 섣불리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
설사 그런 감정이 번개처럼 다가왔더라도 오래 두고 두고 아껴서
서로의 퍼스낼러티를 지켜가면서 사랑하라는 것
열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랑이 얼마나 헛헛할 수 있을지의 위험성,
실패가 뻔한 그 위험성을 이렇게 프롬은 부드럽게 실패하지 않을 사랑을
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분리의 극복을 나타내는, 또 다른 요인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개인 생활, 자신이 희망과 불안을 말하는 것, 자신의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면을 보이는 것, 세계에 대해 공통된 관심을 확립하는거 - 이런한 모든 일은 분리를 극복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신의 분노, 증오, 그리고 자제심의 완전한 결여를 드러내는 것도 친밀감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흔히 부부가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변태적인 매력- 이 부부는 잠자리에서 들었거나 서로에게 증오나 분노를 발산할 때에만 친밀하다- 을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형태의 친밀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타인과의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이 타인은 다시금 '친밀한' 사람으로 변하고,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다시금 유쾌하고 강렬하지만, 이 경험은 다시금 차츰 덜 강렬한 것이되고 마침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 언제나 새로운 사랑은 이전의 사랑과는 다르리라는 환상을 품고-바라게된다. 성적 욕망의 가만적 성격은 이러한 환상에 많은 도움을 준다.
육체적으로 결함하려는 욕망이 사랑에 의해 자극되지 않는다면, 성애가 동시에 형제애가 아니라면, 이러한 욕망은 도취적이며 일시적인 합일 이외의 합일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성적 매력은 순간적으로 합일의 환상을 일으키지만 사랑이 없는 한, 이러한 '합일'은 낯선 사람들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 - 환상이 사라질 때 그들은 이전보다도 더욱 뚜렷하게 격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애에는 형제애와 모성애에는 없는 독점욕이 있다.
성애는, 만일 이것이 사랑이라면, 한 가지 전제를 갖고 있다. 나는 나의 존재의 본질로부터 사랑하고 있고, 다른 사람을 그의 또는 그녀의 존재의 본질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전제를,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한 부분이고 우리는 모두 하나다. 이와 같다면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든 차이는 없을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행위. 곧 나의 생명을 다른 한 사람의 생명에 완전히 위임하는 결단의 행위여야 한다.
우리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 곧 '의지'라는 요인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감정일 뿐이라면, 영원히 사랑할 것을 약속할 근거는없을 것이다. 감정은 생겼다가 사라져버릴 수 있다. 내 행위 속에 판단과 결단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내가 이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견해를 고려할 때, 우리는 사랑이 철저하게 의지와 위임의 행위이고 따라서 기본적으로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이 없다는 태도에 도달할 수 있다. 결혼이 다른 사람에 의해 주선되든, 개인적 선택의 결과이든 일단 결혼이 성립하면 의지의 행위가 사랑의 계속을 보증할 것이다. 이 견해는 인간성과 성애의 역설적 성격을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
우리는 모두 하나지만 우리는 각기 독특하고 복제할 수 없는 실재이다. 우리와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동일한 역설이 되풀이 된다. 우리가 모두 하나인 한, 우리는 형제애라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서로 다른 한, 성애는 어떤 사람들 사이에는 있지만 모든 사람 사이에는 없는, 특수하고 매우 개별적인 요소를 요구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견해, 곧 성애는 특수한 두 사람 사이의 독특하고 완전히 개인적인 매력이라는 견해와 성애는 의지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견해는 모두 옳다. 혹은 더욱 적절하게 말하면, 진실은 전자에도 후자에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한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관계라는 사랑도, 또한 어떠한 환경 밑에서도 이 관계는 해소되어서는 안된다는 사랑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P82
성애!
형제애로서 누구나 사랑해야 하지만
성애 부분에 다면 그렇게 되지도 그럴수도 없다는 개념을 잘 성명한 문장이다.
사랑 대상이 아니고 태도의 문제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지만
또한 누구나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 성애이므로
한 인간이 가진 독특한 그만의 무엇,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특수한 무엇.
어떤 개별적인 요소가 성애에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감정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사랑 특 대상에 대한 의지와 책임의 문제도 병행된다.
자기애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랑, 기쁨, 행복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하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전도력이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P88
신에 대한 사랑
어머니의 사랑이 있으면 사랑받는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어머니의 사랑이 없으면 상실감과 궁극적인 절망감이 생긴다.
'도'를 알고 있는 자는 '도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고, 도에 대해 언제든 말할 용의를 갖추고 있는 자는 도를 알지 못한다.
인간은 비록 어떤 것이 인이 아닌가를 잘 알고 있더라도, 신이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다. ..... 이와 같이 무에 만족하더라도 정신의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선한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P104
현대 종교에서 우리는 초기의 가장 원시적인 발달 단계에서 최고의 발달 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가 현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이라는 말은 '절대무'뿐 아니라 부족장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개인도 자기 자신 속에, 곧 프로이트가 밝힌 바와 같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무력한 갓난아이 이후의 모든 단계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가 어느 경지까지 성장했는가 하는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곧 그의 신에 대한 사랑의 본성이 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본성과 대응하고, 더 나아가 그의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성질이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더욱 성숙한 사고에 의해 은폐되고 합리화됨으로써 흔히 의식되지 않은다는 것이다. P109
3 현대 서양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주도권은 자본의 분야에서나 노동의 분야에서나 개인으로부터 조직으로 옮겨졌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성을 잃고 거대한 경제적 제국의 관리자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 근대 자본주의는 원할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 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P119
양친의 소원한 관계는 동시에 자녀와의 사이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사소한 결점까지도 낱낱이 비판하고 자기 자신의 결점을 천연덕스럽게 무시해버린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개조하기에 바쁜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이와 같이 하면- 아주 흔히 있는 일이지만- 사랑의 관계는 상호 투사의 관계로 변한다. -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그들 자신의 문제를 무시하는 데 성공하고 따라서 그들 자신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 조치를 치하는 데 실패한다.
투사의 또 다른 형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어린아이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어서나 자식들에 대해서나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실존의 문제는 각자에 의해 스스로의 힘으로만 해결될 수 있고 남이 대신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자식들로 하여금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인도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실패한다. 불행한 결혼을 해소하려고 할 때에도 자식들이 투사의 목적에 이용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버이들이 흔히 벌이는 논쟁은 화목한 가정이 주는 행복을 자식들에게서 빼앗지 않기위해서는 헤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검토하면 '화목한 가정'안에 감도는 긴장과 불행의 분위기가 공공연한 결별보다도 자식들에게 더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공공연한 결별은 적어도 자식들에게 인간은 용감한 결정에 의해 참을 수 없는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음을 가르쳐줄 것이다.p138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이와 같이 경험되는 사랑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그것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곳이다. 거기에 조화, 갈등, 기쁨, 슬픔 중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에센스 차원에서 경험하는 것이요, 각자가 자신들에게서 도망치치 않고 자기 자신가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합일되는 것이다. 사랑의 현존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증거가 있을 뿐이다. 곧 관계의 깊이, 관련된 각자의 생기와 힘이 그것이다. 이것은 사랑을 인식하게 하는 열매이다.p139
4
사랑의 실천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 혼자서 몸소 겪어야 하는 개인의 경험이다.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슬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그 기술이 최고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견습공은 이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 이 기술 분야에서 명장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삶의 모든 국면을 통해 훈련, 정신 집중, 인내를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정신집중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상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사랑의 능력의 불가결한 조건이다.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한다면, 그 또는 그녀는 생명을 구조하는 자일 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는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홀로 있으려고 해본 사람은 누구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집착하지 못하고 조바심을 느끼며 심지어 상당한 불안까지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훈련은 가치 없고 어리석으며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그는 훈련을 계속하기 싫은 자기 마음을 합리화하기 쉽다. 또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온갖 상념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관찰할 것이다. 그는 마음을 비우기보다는 오히려 그날 이후의 계획을 생각하고 처리해야 할 업무를 생각하고 저녁에는 어디에 갈까 생각하고 마음을 흡족하게 할 여러가지 일을 생각할 것이다.
적어도 매일 20분 동안(가능하다면 더 길게) 그리고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러한 정신 집중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순간 하고 있는 활동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하고 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 만일 정신집중이 되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일이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나, 우리는 충분한 주목을 받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현실성을 갖게 된다.
정신집중을 배우려면 되도록 쓸데없는 대화, 다시 말하면 순수하지 못한 대화를 피해야 한다. 두 사람이 둘 다 잘 알고 있는 나무의 성장에 대해, 또는 방금 함께 먹은 빵의 맛에 대해, 또는 직업상의 공통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대화는, 그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일을 이미 경험했고 또 이일을 추상적 방식으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대화일 것이다.
정신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정신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실행해야 한다. 그들은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도피하지 말고 서로 친밀하게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모든 일에는(이루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고)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 이를 알지 못한다면 사실상 우리는 결코 정신 집중도 또한 사랑의 기술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만일 어른이 중요한 일을 추구하면서 어린아이 같은 인내(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와 정신 집중에 도달한다면, 무슨 일인들 성취하지 못하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민감하지'못하면 정신 집중도 배우지 못한다. p156
온갖 형태의 정신병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무능을 보여준다.p157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내가 객관성을 잃고 있는 상항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객관성과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면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가는 길은 절반은 걸어온 셈이다 . 우리는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객관성과 이성의 능력을 획득해야 한다.
사랑의 능력은 자아도취나 어머니나 가족에 대한 근친상간적 애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사랑의 능력은 성장하는, 곧 세계와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 생산적인 지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탈피, 탄생, 각성의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 조건으로서 한 가지 성질, 곧 '신앙'을 요구한다. 사랑이 기술의 실용은 신앙의 실천을 요구한다. p163
다른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의 기본적 태도의 불변성, 그의 퍼스낼리티 핵심의 불변성, 그가 가진 사랑이 불변성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만이 미래에도 오늘과 같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지금 기대하는 바와 같이 느끼고 행동할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의 조건이고, 니체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으므로, 신앙은 인간의 실존의 한 조건이다. 사랑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곧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과 그 신뢰성에 대한 신앙이다.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의 또 한 가지 의미는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관계된다.
P166
사랑은 활동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그나 그녀만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 관심을 갖는 상태에 놓여 있다. 내가 게으르다면, 내가 끊임없는 각성과 주의와 활동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나는 사랑받는 사람과 능동적으로 관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자는 것만이 비할동에 적합한 상태다. 각성 상태는 게으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태다.
완전히 깨어 있다는 것은 싫증을 느끼지 않기 위한, 또는 싫증내지 않기 위한 조건이다. P171
현재의 체제 밑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예외다.
사랑의 본성을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러한 결여 상태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이다. 개인의 예외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이 본성 자체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 신앙이다. P177
에리히 프롬의 삶과 사랑 / 라이너 풍크
프롬은 성숙한 사랑을 설명하려고 칼 마르크스의 발언에 빗대어 이렇게 썼다.
"나는 눈이 있기 때문에 보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귀가 있기 때문에 듣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뇌가 있기 때문에 생각하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그리고 나는 심장이 있기 때문에 느끼고 싶은 욕구를 갖은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내겐 인간과 세상이 필요하다."
프롬은 자신의 사랑이 능력을 방해하는 내면의 장애물을 알아차리고 극복하는데 성공하면 할수록 그만큼 사랑하는 능력을 마치 감각적 욕구처럼 실용할 수 있었다. 프롬의 생애 후반기에 가까이 알고 지냈던 사람은 누가 됐건 그가 사랑하는 능력을, 다른 사람들과 사랑하면서 관련되어 있으려는 욕구처럼 느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그에게는 실제로 포기할 수 없는 욕구가 되었고, 그는 가능한 순간마다 그욕구를 충족시켰다.
좋은 책은 좋은 방향을 제시해준다.
어제 독서토론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는 다양했다
-어려웠다. 두번 읽으면 좋겠다, 사랑! 그냥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형제애는 동등한자 사이의 사랑이다.
수직적 사랑이 아니라 수평적 사랑이기에 가장 이상적이다.
-제목만 보고 통속적 사랑이나 기술을 예측했다면 완전 빗나갔다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인상적이었다.
부모의 사랑이 욕심에서 비롯된건 아닌가
-책을 읽고나서 "죽을 때까지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성애-자녀에게 일반적으로 사랑을 주는 것보다
자녀가 효를 행할 때 표현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 보여주는 것이
사랑의 모습으로 느껴진다.
-사랑에 기술이 필요한 이유를 먼저 알아보자
책이 발표된 1956년의 사회 구조를 보면 자본주의가 들어옴으로서
사랑이 붕괴되어 가고 있으므로 사랑의 기술이 필요한 책이 발간된 것 같다.
-과연 우리는 사랑에 대해 알고 있는가 라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었다.
한 사람의 사랑으로 전체가 변한다.
사랑의 대상은 개인이 아닌 포괄적인 존재, 우주적으로 나아간다.
-작가가 이책을 쓴 이유는 우리가 기초적(이기적 사랑 때문에)사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서술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 이야기다.
톨스토이의 구두장이 마틴 -이야기가 생각났다
불특정 다수에게 목적이나 기대 없이 베푸는 사랑, 주는 사랑을 해야한다.
-현실과 책의 내용이 갭이 크다.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랑은 10프로 정도 인것 같고, 책속에 90프로 있는것 같다.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기대하고 실망하고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좁게 보았다
자기 분화를 통해서 성숙한 자기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다.
-습관이라는 내용과 비슷하다.
내 행동이 66번의 횟수를 겪어야 습관으로 형성되고
좋은 습관으로 일상생활이 편해진다고 한다.
사랑도 좋은 습관처럼 반복되면 좋겠다
엄마의 역할이 자녀에게 중요하다.
-사랑의 이론과 실천 부분으로 구분해서 본다면
이론은 상당히 어려웠고
실천부분은 자기개발서로 다가왔다.
제대로 정독후에 여러번 훓어 볼 수 있다면 사랑의 이론도 내것이 될 수 있겠다.
두시간의 토론 시간이 후다닥 지나갔다
프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랑은
홀로선 둘이가 서로를 존중하면서(바라보면서) 손잡고 가는 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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