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산도르 마라이, ‘열정’
산다는 것은 부정의 연속인 것 같다. 이건가 싶으면 아닌 것들이 나타나고 알아차렸나 싶으면 여전히 제자리다. 모를 뿐,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절로 나온다. 자신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시선도 바깥을 쫓기보다 내면으로 향하는 편이지만 내가 모르는 내가 계속 튀어나온다. 내가 늘 나를 실망시키고 배신하고 놀라게 한다. 이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애쓰고 구해야 하는 걸까.
이 지점에서 산도르 마라이의 문장이 떠오른다. ‘중요한 질문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라는. 헝가리 태생의 작가,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 ‘열정’ 속 주인공의 말이다.
주인공 헨릭은 아내와 친구 콘라드가 부정을 저지른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헨릭은 그 즉시 대응하지 않는다. 못 견딘 아내는 자살하고 친구는 도주한다. 헨릭은 41년을 은둔자처럼 산다. 그렇게 헨릭도 콘라드도 인생을 다 살아 노년이 된 어느 날 그 둘은 마침내 마주 앉고, 헨릭은 일생 동안 품었던 말들을 폭포수처럼 하룻밤에 쏟아낸다. 그것이 이 소설 ‘열정’이다. 중요한 질문은 전 생애로 대답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그야말로 전 생애를 바쳐 기다렸던 것일까. 친구 콘라드도 전 생애를 바쳐 대답하도록? 헨릭은 이어서 말한다.
‘다 지나간 지금, 자네는 사실 삶으로 대답했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그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어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한다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것일세.’
반생을 훌쩍 넘긴 이즈음 산도르 마라이의 이 문장이 벼락같이 떠오르더니 다시 확인하는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잘 살아야겠다!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전 제일기획 부사장
* 열정을 읽은지가 아마도 십오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위 글 '내가 누구인지. 삶의 흔적으로 말할 뿐'을 보면서 다시 읽게 된 '열정' 한 이틀 이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것도 열정일까. 작가의 인식에 공감하면서 수용하고 수렴하고 싶은 문장들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산도르 마라이'는 헝가리의 대문호다. '열정' 1942년 작품으로 발표당시는 주목을 못 받았고, 50년이 지난 다음에야 간행 될 수 있었다. 그는 고인이 된 뒤였다.
열정에 대한 비평은 "위대한 유럽 작가의 재발견" (라인 메르쿠어), "최고 수준의 재발견" (디 벨트) 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 로베르토 무질 같은 거장들과 산도르 마라이를 비견한다. 이소설 하나로 잊혀진 거나 진배없던 헝가리의 시민 작가 산도르 마라이는 뒤늦게 세게 문학사에서 제자리를 찾았으며 '열정'에 이어 그의 다른 주옥같은 작품들도 다시 빛을 보고 있다.
이 소설은 어린 시절부터 24년 동안 형제처럼 지냈던 두 친구가 헤어진 지 41년 만에 만나(만났을 때 둘은 75세였다) 하룻밤 동안에 나누는 대화가 소설의 주 내용이다. 이 소설의 배후에는 '삶과 운명, 사랑과 진실에 대한 마라이의 깊은 인식과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존재의 심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간이 본성과 심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묘사한 문학은 예로부터 시공의 제약을 뛰어 넘어 많은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힘을 발휘했다.
* 스토리- 주인공 헨릭은 열살무렵부터 형제처럼 지낸 절친한 친(콘라드)와 사랑하는 아내에게 기만당한 것을 안다. 존재를 뿌리까지 송두리째 뒤흔드는 이 갑작스러운 사건은 결국 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한다. 콘라드는 말 한마디 없이 세상의 다른 끝으로 종적을 감추고, 삶의 양지 쪽에서 부족함 없는 삶을 영위하던 헨릭은 배신감과 절망에 휩쓸려 고독으로 칩거한다.
그리고 헨릭의 아름다운 부인 크리스티나는 결국 죽음을 택한다. 헨릭은 친구를 기다린다. 오로지 이 기다림 때문에 그는 분노와 절망, 고독 속에서도 오랜 세월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는 보이는 현실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 즉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 본성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마침내 죽음을 앞둔 인생의 황혼에서 콘라드가 돌아오고, 헨릭의 독백이나 다름없는 대화를 통해서 41년 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세 사람을 파괴한 그 사건들이 서서히 우리 앞에 펼쳐진다.
왜 그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런 비극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마라이는 사랑과 우정이 빚어낸 비극의 원인과 비극 앞에 선 인간의 혼란과 갈등을 파헤치기 위해서 인간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여러 가지 존재론적인 문제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예와 신의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현실의 삶에 충실한 부류와, 현실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정신과 예술을 좇는, 삶의 다른 기숡에 선 부류, 두 부류로 인류를 가르는 인간 존재의 이원성, 운명과 삶과의 고난, 타고난 본성이나 성격이 삶에서 하는 역할의 문제 등이 집약적으로 전개된다. 결국 마라이는 우리 인간들은 살면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들에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 생애로 대답한다고 결론짓는다. - P285 옮긴이의 말 중에서
* 십오년 쯤 전, 내가 마흔이 되기 전, 그때 읽을 때는 몰랐다.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지
이제서야 속속들이 읽히는 경험을 했다.
주인공 헨릭의 인식, 그 나이쯤이라야 가능한 인식들이 거부감 없이 수긍이 갔다.
나도 그쯤 되면 지금 내가 당면한 문제들이 티끌같다고 여겨질까.
어떤 문제들에서도 초연해질까.
모든 것은 지나가고, 지나고 나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귀결되어 질까...
책속 주인공은 41년 동안 '운명'이라 여기며 고독하게 살아왔다
책을 통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대수롭잖게 여길 문장이 없다.
기적, 커다란 기적! 이백여 쪽 남짓한 이야기의 승리가
이미 고인이 된 거장을 20세기 문학에 선물했다는
표현이 책 뒷표지에 실려있기도 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이지만,
살다가 만나게 되는 '운명'이라고 여겨질 어떤 일로 상처받았을 때
어떻게 할지 어떤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들을 작가는 주인공 헨릭을 통해서 실감나게 들려준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았을 때
그때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까 싶은 문제들
온 몸으로 살아낸 이 책 속 세 삶에 대한 이야기가 진지하게 와 닿는다
그리고 상처(가해자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그 상처)라는 것
자존심 이라는 것,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 41년만에 찾아오는 친구를 기다리는 헨릭, 그가 하룻밤 동안에 쏟아내는 독백같기도 한 말들,
정제되고 성숙한 75세의 노인이 뱉어내는 인식들이 놓치기 아까워서 반짝이는 문장에 욕심을 냈다. 친구는 시종일관 듣는 역할만 한다.
세상은 아무것도 아닐 세.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은다네. 나이가 든 훗날에서야, 나는 그것을 깨닭았네. 사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꿈처럼 그냥 던져버릴 수 있어. 연대는 기억나지 않네.
얼마 전부터 나는 중요한 것만 기억하네.
참 신기하게도 기억은 쌀과 뉘를 골라낸다네. 십년, 이십 년이 지나보면. 커다란 사건들은 사람의 내면을 하나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어. 그런데 사냥 갔던 일이나 책의 한 구절, 아니면 이 방이 어느 날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이곳에 있었던 때는 세사람이었지. 그때는 크리스티나가 살아 있었어. 그녀는 저기 가운데에 앉아 있었지. 그때도 이 장식품이 식탁에 있었네.
P123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어찌된 일인지 책 속에도 비가 내려. 말 뜻 그대로는 아니지만 실제로 비가 내리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계속 빗소리만 들려오지. 피아노를 치려 들면, 비가 옆에 앉아 같이 피아노를 친다네. 그리고 나면 건기가 오지. 밝은 햇살속에서 김이 피어올라. 사람들은 빨리 늙는다네.P125
41년은 긴 시간일세. 자네도 깊이 생각했을 게야. 그렇지 않나? 그리고 돌아왔어.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나는 자네를 기다렸네. 나도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일세. 우리 두 사람은 언젠가 한 번 만나게 되고. 그러면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우리 존재의 내용을 이루고 긴장을 유지시켜주었던 모든 것과 삶의 끝 말일세.
자네와 나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비밀에는 특별한 힘이 있기 때문이지. 그것은 파괴적인 광선처럼 삶의 조직을 불태우지만, 동시에 삶에 활력과 정열을 주지. 그것은 목숨을 부지하도록 강요하네...... 지상에서 할 일이 남아 있는 한, 살아게게 마련일세. 자네가 열대와 바깥 세상에 있는 동안, 나 혼자 여기 숲에서 41년 동안 체험한 것을 자네에게 들려줄 생각이네. 고독이라는 것도 참 묘하네. 그것도 정글처럼 이따금 위험과 놀람에 가득 차 있어. 나는 온갖 고독을 알고 있네. 삶의 질서를 아무리 엄격하게 좇아도 헤어날 길 없는 권태. 그 뒤를 잇는 갑작스러운 폭발, 고독도 정글처럼 불가사의하다네.
수도승이 차라리 낫네. 수도승에게는 믿음이 있지 않은가. 영혼과 운명을 고독에 맡긴 사람은 믿음조차 가질 수 없네. 그에게는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지. 자신을 고독으로 몰아넣는 모든 것에 대해 그러한 처지에 몰아넣는 사람과 한 번 더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나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 그는 십 년, 아니 사십년, 정확히 말하면 사십일 년 동안 결투를 준비하듯이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하네.
그리고 결투에서 지는 경우를 대비하여 주변을 정리하지. 그는 직업 검객들처럼 매일 훈련을 한다네. 무엇으로 훈련하냐고? 회상으로 하지. 고독과 시간이 정신을 흐리게 하거나 심장과 영혼을 무디게 하지 않도록 회상으로 훈련을 하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같은 생각일세
자네도 같은 생각이라니 기쁘구먼
이 기다림이 목숨을 부지시켜주지. 물론 그것도 이 세상 다른 것들처럼 한계가 있지만 말일세. 자네가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몰랐더라면.. ....정말로 결정적인 것은 그냥 알게 되지.
P135
호감? 두 사람이 인생의 험난한 기로에 설 때마다 서로 지켜주는 것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약한, 공허하고 진부한 말이 아닐까. 호감?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모든 인간관계 깊숙히에는 에로스의 불티가 존재하지 않을까. 여기 숲 속에 혼자 고독하게 남아 삶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네. 우정은 병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성별이 같은 사람에게서 찾는 만족과는 다르네. 우정의 에로스에는 육체가 필요 없어. 육체는 흥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지. 하지만 에로스는 에로스일세. 모든 사랑. 모든 인간 관계에는 에로스가 숨쉬고 있어. 이보게 나는 많은 것을 읽었네. P141
사람들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밀함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한동안 일종의 우정으로 보였던 친밀함을 후회하게 되지. 이런 것들은 물론 전부 진실한 것이 아닐세.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하셨듯이. 우정을 일종의 직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사랑하는 사람처럼 친구도 자신의 감정에 대한 보답을 기대하지 않네. 어떤 응답도 원하지 않으며, 친구로 선택한 사람을 환상으로 보지 않고, 잘못을 알면서 그 결과까지도 받아들이지. 이것은 이념일 수도 있네.
그러나 그러한 이념이 없다면 산다는 것. 인간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나? 친구가 올바른 친구가 아니라서 친구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면. 그의 성격이나 약점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 덕행이나 신의, 변함없음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이런 우정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신의를 기대하는 사랑이라면, 그런 사랑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자신을 희생하는 신의 있는 친구와 똑같이 신의 없는 친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상대방에게서 어떤 것도, 정말 어떤 것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은 사리사욕 없음. 많이 줄수록 기대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모든 인간 관계의 진실한 내용이 아닐까?
청소년기의 신뢰와 장년기의 희생 정신을 몽땅 선물하고 결국 인간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 곧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열렬한 신뢰를 바친 다음. 상대방이 신의 없고 비열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들고일어나 복수를 꾀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들고일어나 복수를 기도하는 경우, 기만당하고 버림 받은 그는 과연 진실한 친구였을까? 이보게, 나는 혼자 남아 이런 문제들에 이론적으로 파고들었네.
물론 고독은 해답을 주지 못했어. 책들도 만족할 만한 답변을 주지 못했지. 옛 고서들, 중국, 유대인, 그리스 로마 사상가들의 명저들뿐 아니라, 진실보다는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문제삼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최근의 책들도 마찬가지였네. 그런데 과연 진실을 말하거나 글로 쓴 사람이 언제 있었던가?.... 어느 날 이런 책들과 내 영혼을 연구하기 시작하고부터, 나는그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했어. 세월이 흐르고 내 주변의 삶이 황혼에 접어들었지.
책과 회상 들이 쌓이면서 농축되었네. 책마다 한 알의 진실이 들어 있었고, 그것에 대해 회상은 인간 관계의 진실한 본성은 아무리 애써도 알 수 없고, 또 그런 것을 인식하더라도 더 현명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어. 그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조건 없는 성실과 신의를 요구할 권리가 없는 것일세. 여러 가지 사건들로 보아 이 친구가 신의가 없었다는것이 확실해도 마찬가지이지.P144
자네는 사실 삶으로 대답했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던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이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진정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어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한다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것일세. P155
-인간 관계에서 되돌릴 수 없은 결정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말이나 행위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네.
현재의 자기와 달라지고 싶은 동경,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인간의 심장을 불태우는 동경은 없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세상에서 차지하는 것하고 타협할 때에만 삶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일세.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타협할 줄 알고, 또 이렇게 현명하게 굴어도 삶으로부터 어떤 칭송도 받지 못하는 것을 알아야 하네.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어. 그것이 바로 비결일세. 자신의 성격과 본성을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지. 제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하고 부족한 점이나 이기심, 탐욕을 인식해도 변할 수 없기 때문이야. 우리의 동경에 현세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참아야 하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사랑하지 않아도 참을 수밖에 없네. 배반과 신의 없음도 참아야 하고, 자기보다 인품이나 지성이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 참아야 하지. 이 가운데 마지막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일세. 여기 숲 한가운데서 일흔다섯 해 동안 나는 그런 것들을 배웠네. 그런데 자네는 이
모든 것을 참을 수 없었지.
P173
사람은 고독 속에서 모든 것을 배우게 되네. 그리고 두려운 게 없어지지.
누구나 스스로 일을 자초하기 마련이지. 스스로 자초하고, 불러오고, 피할 수 없는 일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네. 인간이란 원래 그렇다네. 자신의 행위가 치명적이라는 것을 처음 순간부터 알면서도 그만두지 않아. 인간과 운명. 이 둘은 서로 붙잡고 서로 불러내서 서로를 만들어간다네. 운명이 슬쩍 우리 삶으로 끼어든다는 말은 맞지 않아. 또 우리가 운명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청하는 걸세. 근본 심성이나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불행을 행동이나 말로 막아낼 수 있을 만큼 현명하거나 강한 사람은 없네.p 220
삶의 가장 큰 비밀과 최대의 선물은 '비슷한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일세.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네. P223
사람은 한편생 살면서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고, 또 세상과 주변의 모든 것을 쟁취할 수 있지. 삶은 인간에게 무엇이든 줄 수 있고, 또 인간은 삶에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네. 그러나 인간의 취향, 성향 삶의 리듬은 바꿀 수 없어. 자네에게 아무리 가깝고 중요한 사람이라도. 그를 특징짓는 다르다는 것만은 변화시빌 수 없지.
그녀는 마치 동물 같았네. 정성 어린 양육, 기숙사 학교, 아버지의 교양과 애정은 크리스티나의 행동거지만을 바로잡았지. 그녀의 내면은 길드이지 않은 야성 그대로였어. 내가 줄 수 있었던 모든 것. 재산과 사회적 신분은 사실 그녀에게 별 가치가 없었네. 이 내적인 자유 분방함. 그녀의 본질을 이루는 자유에의 충동 때문에, 내가 그녀를 인도한 세계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
자네도 알겠지만 이 여인은 내적으로 구속이라는 것을 몰랐네. 오늘날 그런 사람을 보기는 어려워, 구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아주 드물지.
그녀는 정열과 오만, 조건 없는 감정을 좇은 자유로운 자의식을 가져왔지. 그 이후로 나는 세상과 삶이 선사하는 모든 것에 그렇게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네. 음악, 숲에서의 새벽 산책, 꽃의 색깔과 향기. 예지에 찬 인간의 말 한마디. 우아한 천이나 동물을 크리스니타처럼 어루말질 수 있는 사람은 없네. 나는 삶이 주는 소박한 선물에 이 여자처럼 기뻐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어. 삶이 보여주고 선사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애정을 가지고 인생을 즐기는 삶의 선입견 없는 기쁨이었지. 이 선입견 없는 친밀함에는 겸손, 삶이 커다란 은총이라는 인식이 배어 있었네.P
자네도 알아두게. 그날 저녁 자네만이 아니라 나도 마지막으로 크리스티나와 식사를 했지. 우리 두사람이 크리스티나를 알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했어. 자네는 열대로 갔고, 크리스티나와 나는 두 번 다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 그래, 그녀은 팔 년을 더 살았네 우리 두 사람은 이곳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지만, 말을 나눌 수는 없었어.
나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차츰 이해했네. 음악이 있었어. 인간의 삶에는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운명적인 요소들이 있지. 이를테면 음악이 그런 것일세. 우리 어머니. 자네와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음악은 서로를 묶어주는 끈이었어. 음악은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자네들에게 말하고 또 자네들은 필시 음악을 통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게야. 이 대화, 자네들에게는 분명한 이 음악의 언어를 우리 아버지와 나 같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그래서 우리는 자네들 사이에서 끝내 고독했지. 그러나 음악은 자네와 크리스티나에게는 말을 했네. 나하고는 대화가 끊겼을 때에도 자네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 나는 음악을 증오하네.
크리스티나의 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셨네. 그분은 사실 음악에 대해 뭔가를 이해하셨지. 그리고 내가 음악, 자네와 크리스티나에 관해 한 번, 단 한 번 모든 것을 이야기한 유일한 분이셨네. 그때 벌써 연세가 아주 많으셨지.
자네가 원하는 게 무언가? 자네는 살아 남지 않았는가. 판결을 내리는 어투였네 마치 비난하는 것 같았지. 그리고는 잘 보이지 않는 흐릇힌 눈으로 어스픔한 방 안을 응시하셨어. 그때 벌써 여든이 넘은 고령이셨지. 그 자리에서 나는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비난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네. 살아남은 사람은 소송에서 이긴 거나 다음없네. 그러니 비난할 권리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그는 더 영리하고 끝질긴 강자일세. 우리 두 사람이 그렇다네. P232
인간의 본성은 아주 강한 것일세. 그것은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물음에 반드시 대답을 하거나 대답을 받아야만 하네. 그것은 다른 길을 모르네. 자네가 돌아온 것도. 내가 자네를 기다린 것도 다 그 때문일세.
어쩌면 우리가 태어난면서 물려받았고 잘 알고 있는 생활방식. 이 집과 음식. 심지어는 오늘 저녁 우리 삶의 문제들을 논의하는 이 말들까지도 전부 과거의 것이 되어버릴지 모르겠네. 인간의 마음속에 긴장과 불만, 복수심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 우리 마음을 한번 들여다보세. 무엇이 들어 있는가? 시간이 누그러뜨리긴 했지만 지금도 불만이 묽게 달아오르고 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은 그러면서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왜 다른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 우리 두 사람 인생의 황혼을 맞아 어느 정도 세상 이치에 눈뜬 우리도 복수를 원하는가? 도대체 누구를 향한 복수인가? 상대방에게. 아니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한 인간의 추억에 대한 복수인가. 다 부질없는 충동일세. 그런데도 그것은 우리 심장 안에 살아 있네. 그렇다면 왜 세상을 다르기를 기대하는가. .....P236
자네를 비난하는 것은 아닐세. 그보다는 차라리 자네에게 동정을 느끼네. 내적으로 묶여 있는 아주 가까운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든지 죽이기 위해 총을 겨누는 시련이 닥친다면 틀립없이 몹시 끔찍할 게야. 그 순간 자네가 바로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이지. 자네 부정하지 않나? 침묵을 지키는가? 어두워 자네 얼굴이 보이지 않는구먼.... 촛불을 새로 밝혀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어쨌든 지금 복수의 순간이 온 지금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또 잘 알고 있네. 우리 끝까지 마무리를 잘 지어봄세.
지난 수십 년 동안 단 한시도 나는 자네가 나를 죽이려한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네. 그리고 항상 자네를 불쌍하게 여겼지. 그 끔찍한 시련의 순간을 자네 입장이 되어 체험한 것처럼. 나는 자네가 느꼈을 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네. 그것은 자아 상실의 순간. 지하 세계의 힘이 세상과 심장을 지배하고 밤의 사악한 입김을 내뿝는 새벽의 순간이었어. 아주 위험한 순간이지. 나는 그 순간을 알고 있어.
내가 원하는 것은 진실이네. 이 진실은 벌써 옛날에 공소 시효가 지난 몇 가지 사실. 티끌이 되어 사라진 육신의 은밀한 정열이나 방황과는 상관이 없어. 이 육신이 사라진 지 오래고 남편이고 연인이었던 우리가 노인이 된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우리 함께 지난 일들을 한번 돌이켜보고, 진실을 알아내려는 것일세. 그리고 나서 죽는 게야. 나는 여기 집에서. 자네는 런던이나 열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죽겠지.
인생의 종착역에서 진실과 거짓. 기만, 배반, 살인 미수나 살인이 다 무슨 소용이 있고. 나의 아내. 내 다시 없는 사랑, 삶의 희망이, 내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와 언제. 어디서 몇 번이나 나를 속였는가 하는 문제가 뭐가 대수겠는가? 자네가 이 슬픈 천박한 진실을 말하고, 모든 것을 자백한다고 치세. 그리고 또 어떻게 시작했으며, 어떤 시기와 질투심. 그녀를 안으면서 자네가 무엇을 느꼈고, 그 무렵 크리스티나 영혼과 육신에 어떤 복수욕과 수치심이 살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이야기한다고 하세. 하지만 그런 것이 다 무슨 가치가 있겠나?
결국 모든 것은 아주 단순하네. 실제로 일어난 것과 어쩌면 일어날 수 있었던 것까지도 단순하기 그지없어. 우리 스스로 목숨을 잃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마음을 불타오르게 했던 것, 이런 것은 다 티끌조차 못 되네.- 입에 올리기 조차 창피하고 무의미한 짓이야
이 하잘것 없는 진실. 썩어 없어진 육신의 비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조란 무엇이고, 우리는 사랑한 여인에게서 무엇을 기대했던가? 나는 살 만큼 살았고. 이것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네 정조는 가공스러운 이기주의가 아닐까? 인간이 좇는 대부분이 그렇듯이 허영심의 산물이 아닐까? 우리는 정조를 요구하면서, 과연 상대방이 행복해지길 원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정조라는 것에 구속되어 행복할 수 없는데도 정조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데도 정조나 희생 같은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일까?
죽음을 앞둔 이제는 사십일 년 전 그때처럼 감히 이러한 문제들에 단호하게 대답할 용기가 없네. 크리스티나가 나를 자네 집에 혼자 두고 갔던 사십일 년 전 그때 말일세. 내 발길이 닿기 전 그녀는 수없이 그 집에 들렀고. 자네는 크리스티나를 맞아들이기 위해서 그 집에 온갖 것을 끌어 모았지. 그 집에서 내게 가장 가까웟던 두 사람이 그렇게 굴욕적이고 저속하게. 그래. 진부하게 나를 배반하고 기만했지. 그래. 지금은 그것을 진부하다고 느끼네. 그렇게 일어났기 때문일세.
젊은 나이에. 아내가 형제보다 가까운 둘도 없는 친구와 자신을 속였다면, 당연히 주변이 세계가 붕괴했다는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네. 어쩔 수 없어. 누구나 다 그렇게 느끼는 법이지. 질투심과 실망, 허영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네. 그렇지만 다 지나가네. 다 이해할 수 없고. 또 내일 당장은 아니지만 아니. 몇년이 지나도 분노는쉽게 수그러들지 않지. 그렇지만 어쨋든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네.
나는 성으로 돌아와 크리스티나를 기다렸네.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였든지. 아니면 그녀 입에서 진실을 듣고 용서하기 위해서였든지... 어쨌든 나는 기다렸네. 저녁까지 기다렸지. 그래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수렵용 별장으로 갔네. 어린애 같은 짓이었어....
그리고 팔년동안이나 나는 크리스티나를 보지 않았어. 죽은 시신이 된 다음에야 다시 보았지.
나는 크리스티나를 도울 수 없었어(아프다는 소식들 듣고도...) 비밀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것은 용서할 수도 없고,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때가 되기 전에 열어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어.
고통이나 죽음보다도 더 나쁜 것이 있네. 자부심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더 나쁘다네. 내가 크리스티나와 자네. 그리고 나 사이의 비밀을 두려워했다면 바로 그 때문일세. 죽음마저도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아프게 하는 것이 있네. 인간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존심을 한 사람 아니면 두 사람이 함께 상처입히는 경우라네. 자네는 허영심이라고 말하겠지. 그래. 허영심.... 그렇지만 인간으로서 영위하는 삶의 깊은 의미는 바로 이 자존심에 있네. 그래서 나는 그 비밀을 두려워했네. 사람들은 저속한 짓, 비겁한 것. 가리지 않고 않고 온갖 타협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일세.
수렵용 별장으로 건너가 팔 년 동안이나 말 한 마디. 소식 한 줄이 오기를 기다렸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끝내 오지 않았어....
나는 그런 사람이네. 나는 그렇게 교육 받았고 그래서 매사가 그런 식이었지. 크리스티나가 소식을 보냈더라면, 어떤 소식이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었을 것이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어. 그녀도 그녀 방식대로. 여성적인 방식으로 인격이 있었기 때문일세. 그녀 역시 사랑한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았네. 한 사람은 운명적인 결합에 자신을 불태울 수 없었기 때문에 정열 앞에서 도망쳤고, 다른 한 사람은 진실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침묵했지.
우리 남자들이 아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크리스티나도 지조가 있었네. 그 당시 자네와 나만이 아니라 그녀도 시련을 겪었어. 운명이 우리를 덮쳐 강타했고, 우리 세 사람은 함께 운명을 짊어졌네. 팔 년 동안 나는 그녀를 보지 않았고, 팔 년 동안 그녀는 나를 부르지 않았지.
-자네는 바깥 세상에서 살았고 크리스티나는 죽었네. 나는 자존심이 상해 고독하게 살았고 크리스티나는 죽었지. 그녀는 우리 두 사람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대답했네. 이 보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최후의 올바른 대답을 하기 때문일세.
이보게 그녀는 우리와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어. 나는 이따금 우리 세 사람 중에서 배반당한 사람은 그녀라는 생각을 하네. 그녀와 자네에게 기만당한 나나, 그녀와 함께 나를 기만한 자네가 아니고 말일세. 기만이라니 이 무슨 당치 않은 말인가! 한 인간이 처한 상황을 깊은 듯 없이 기계적으로 정의내리는 낱말들이 있네...
기다림이 지나가고 복수의 순간이 온 지금, 놀랍게도 우리가 서로에게 알아내고 고백하거나 부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무가치한가를 느끼네. 사람은 오로지 실제 현실만을 붙잡을 수 있어. 지금 나는 그것을 붙잡네. 시간의 속죄 과정이 분노의 기억을 정화시켰지. 요즘 들어 이따금 크리스티나가 다시 눈에 보이네. 꿈속에서뿐 아니라 깨어 있을 때도. ....P250
크리스티나의 아버지는 살아남았다고 나를 비난하셨네. 그분의 말씀은 그냥 모든 것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이었어. 사람은 죽음으로만 대답하는 게 아니기 때문일세. 죽음은 좋은 대답이지. 하지만 살아 남는 것으로도 대답할 수 있네. 그녀는 죽었어도 우리 두 사람은 살아남았지.
자네는 떠나고 나는 여기 머무르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남았네. 비겁했는지 맹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자존심이 상했는지 현명했는지 모르지만, 어쨋든 우리 두 사람은 살아남았어.
그녀는 우리 두 사람보다 훤씬 인간적이었어. 우리 두 사람은 살아 있는데. 그녀는죽음으로 우리에게 답변했기 때문에 더 인간적일세. 이것은 변명의여지가 없네. 엄연한 사실이지. 더 오래 사는 사람은 언제나 배반자라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그래서 그녀가 죽었기 때문일세. 자네는 떠났고, 남아 있는 나는 그녀에게 가지 않았지. 그녀의 일부나 다름없었던 우리 두 남자가 여자로서 참아낼 수 있는 이상으로 비열하고 거만하고 비겁하고 오만하게 침묵했기 때문에 그녀가 죽었네.
우리 두 사람은 그녀에게서 달아났으며, 살아남는 것으로 그녀를 배반했지. 이것은 진실이네. 런던에서 자네는 모든 것이 끝나는 최후의 고독한 순간에 그것을 알게 될 게야. 이 집에 있는 나도 그것을 알게 될 걸세, 아니, 나는 벌써 알고 있네.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고 목숨을 바칠 만큼 가까운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것은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은밀한 범죄이네. 형법서에는 그런 것이 없지,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알고 있어.
우리 세 사람은 죽으나 사나 어떤 식으로든 서로 결합해 있는데 결국 세상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만이 중요하네.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남아 있나?
우리가 과연 우리의 영리함, 오만, 자만심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하는 것일 세.
우리 삶의 진실한 내용은 죽은 여인을 향한 이 고통스러운 그리움이 아닐까.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의미는 우리를 누군가에게 묶는 결합에 있지 않을까.
결합이든 정열이든 그것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부르게.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이것이 질문일세.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한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우리를 상대방에 결합시키는 졍열의 강도는
그 삶의 특성이나 행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까?
할 수 있으면 대답해주게.
- 왜 나에게 묻나
- 그렇다는것을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P273
* 이것으로 소설은 끝이다
이 소설의 제목을 관통하는 열정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고 답이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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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바칠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죽게 내버려둔 그의 회한어린 고백에는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과 이 본성에서 비롯되는 운명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 깔려있다.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안다 해도 대부분은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한다.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나머지 인생을 보내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는, 죽음을 앞둔 노인의 고백 앞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라이는 인물과 사건을 가차없이 냉정하고 정밀하게 해부하고, 의식적으로 정확하게 언어를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언어는 수식이 없이 간결하면서도 낱말이나 문장 하나 하나에 깊은 뜻이 응축되어 있다. 이 시적인 깊이로 인해서 그의 문장들은 더 없이 아름답게 느껴지면서도 한 편의 시와도 같이 독자를 빨아들인다.
감동적인 선율이 인간의 마음을 울리고 긴 여운을 남기듯이 그의 글은 마음 깊이 파고들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과연 우리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삶의 많은 장벽을 뛰어넘어 사랑과 우정의 법칙에 충실했는가?
P286 옮긴이의 말 중에서...
* 사랑에 배신 당한 사람이 전생애에 걸쳐 배신감에 치를 떨지만, 칠순이 넘어 그것들이 티끌에 불과하다는 걸,.... 그리고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사랑은 더 깊어졌던 세월에 대한 아이러니...
아내가 살아 있을 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할 수 있었다면
또한 그 아내역시 용서를 빌었더라면, 한번 뿐인 그들의 삶은 조금 더 달라졌을까.
"내가 누군인지. 삶의 흔적으로 말할 뿐"라는 명대사가 가슴을 찌른다.
지금,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는 중일까.
20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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