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민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 자살인지도 모르겠다고 얘기해 준 건 바로 민의 남편이었다.
- 그럴 이유, 스스로 생을 버릴 이유, 감정의 색깔이 묻어날까 봐 전화를 끊기까지 한마디도 못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전화를 받은 게 한 달 전쯤이었을까. 그날 이후 시간은 순서 없이 내 머릿속에서 엉기고 있었다.
그가 말하던 목요일 저녁, 민은 내게 전화를 했었다. 저쪽의 목소리는 잘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사무실은 소란했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피로해 있었다.
나야.
서울이, 한강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몰랐어.
사랑해.
민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듯했다. 만나는 동안 한번도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민이 전화를 끊고서야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땀에 젖어 내 가슴에 안겨 있을 때도 하지 않았던 말을 나는 두 인간이 수다를 떨며 커피를 마시는 더러운 복도에서 듣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목이 메어왔을 것이다. 그게 목요일 저녁이었다. 민이 존재하기를 그만두려던 그 지독하게 외로웠던 저녁에 민이 보내왔던 메시지를 끝내 읽어내지 못한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민의 남편으로부터 그 전화를 받은 이후 내 속에서는 무언가가 빠져나가 버렸다. P15
* 정미경의 장편 '장밋빛 인생' 은 주인공 나(영주)와 그가 사랑한 민(자살인것 같은 사고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민이 떠나고 나의 일상은 민과 지냈던 시간들이 환기되어 현실과 섞이면서 소설은 진행된다. 위 도입부 "그날 이후 시간은 순서 없이 내 머릿속에서 엉기고 있었다." 는 표현처럼,
떠난 사람, 떠난 사랑에 대한 남은자가 가지게 되는 어떤것,
자신의 삶, 사랑하는 대상, 관계망, 우리는 매 순간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면
이후 우리가 맞게 되는 시간은 달라질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을 살지만 지나온 날들과 미래를 조금만 더 배려한다면
관계망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소설을 통해 나(영주)의 독백과 성찰을 통해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싶은 문장들 올려보려 한다.
스토리보다, 울림 주는 문장 위주로....
민을 보지 않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내가 결혼하고 난 후 민은 전화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 때문에 만나는 공식적인 자리까지 정리했었다. 내 마음속에서야 태풍이 불든 말든 일상에선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나도 어린아이는 아니니까.
내 맘속에 태풍이 불든 말든,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일상을 침범했을 때, 평정심이란 것이 필요할 때
일상은 매우 유효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가장 힘센 것이 일상이라는걸 살면서 종종 느낀다.
사랑도 그렇고 그 어떤 특별한 일 특별하다고 느끼는 것들도
일상의 수레바퀴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러나 그 사람(민의 남편)의 전화를 받고 난 후 나는 어쩐지 다리 사이로 무언가 흘러나가면서 나 자신이 방전되고 있는, 그러나 충전 불가능한 기계인간처럼 삐걱거리는 걸 느낀다. 그날 이후 세상은 변경될 수 없는 걸로만 가득 차 있는 불행한 숙제치럼 내게 남겨져 있다. P23
행복한 순간보다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서 사람들은 살갑게 가까워진다. 이렇게. 패배의 뒤풀이에서, 누군가 술을 엎질러 작은 술렁거림이 일고 창밖에 조금씩 내리는 어둠만큼 사람들은 부드러워진다. 밤이 내리는 걸 막을 수 없듯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며..P27
민이 그 목요일 저녁 차를 타고 달려 들어간 곳은 초여름의 강물이 아니라 내 머릿속인 것 같다.
- 나를 만나는 동안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도 그녀였고, 내게 정애와 결혼하라고 거의 편집증적으로 몰아세운 것도 그녀였다.
그랬는데 그녀가 못 견딘 것이 무엇이었을까. 기어이 견딜 수 없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나는 견뎌냈던 것을 민은 견뎌내지 못했다. 누군가와 연인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그걸 못 견딘 것은 그녀의 연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이다. 나는 끝내 가질 수 없었던 강인함이다. P36
하천이 범람하는 순간처럼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민에게 경도되어 가던 그 기억 속에 편집되어 있는 가을날들 이전으로.
민을 만나기 이전에 나는 내가 사람 때문에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P43
그래, 소용없는 게 있다. 젖어버린 신발처럼, 범람하는 제방처럼, 누군가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이 강물은 도저한 양츠강의 범람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
- 우리는 낮에 보았던 풍경의 이면으로 건너와 버린 듯했다 내가 여태껏 혼자 지내왔던 그 일상의 이면 말이다. 카누를 돌려 호수의 기슭으로 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이 여자를 만나기 이전의 그 시간과 공간 속으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P49
그럴 것이다. 사랑은. 내 혀에 와 닿는 입술의 느낌으로 그 분량을 측정할 수 있는 저울일 것이다.
p57
지금처럼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살기 전의 일이다. 정애는 좋은 여자다.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모르는 관계를 복원해 보겠다고 혼자 애를 썼었다.
-나는 광고는 잘 몰라, 그런데 영주 씨는 설득의 천재였어. 그 광고 속의 상품을 사는 순간 누구라도 금방 행복까지 덤으로 받을 것 같은 그런 확신을 주는, 그런데 왜지?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를 순식간에 납득시키고 설득시키고 마는 당신이 왜 가장 가까이 있는 나 하나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거야? 영주 씨한데 나는 불특정한 한 명의 광고 시청자보다 무의미한 존재야? 말해봐요
- 집에 와서까지 또 누군가를 설득해야 해? 힘 들여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필요해 내겐
- 그게 왜 나여야 하는 거지?P59
사람을 마음에 담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도 능력이 아닌가.
사랑이란 소통에 대한 갈망
무심한 들꽃 한 송이에도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는 것. P70
마음이 통한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무언가를 교환하고 싶어하는 이 연약한 습성
- 사랑이란 교환에 대한 광기가 아닐까. 사랑하는 두 사람이 그토록 강박적이고 교환하고 싶어하는 건 왜일까? 서로의 존재를 꿰뚫어보려는 눈길, 손끝에 느껴지는 갈증, 너 없이 혼자 지냈던 날들과 퇴적된 내 기억의 편마암에 새겨진 그림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어지는 것. 그러고 보면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 누군가 바라보아 주어야만 하는, 누군가 내 체온을 점자처럼 읽어주어야만 안도하는 그토록 연약한 존재.
-눈빛을 입술을 혀를 성기를 정액을 나누고 기억까지 뒤섞고 마는, 서로를 존재의 바닥에 닿고야 말리라는 간절함. 그에게 내 기억을 이식해 놓으려는 간절함, 그리하여 누군가의 영혼 속에 내 영혼의 일부를 저장해 놓으려는 그 안타까운 몸짓.
사랑하는 두 사람이 영혼과 육신의 모든 것을 기어이 교환하려는 그토록 간절한 몸짓들을 누군가 옆에서 지켜본다면 말할 것이다. 미친 것들, 이라고. P89
명백히 잘못된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갈 때가 인생에도 있다.
살면서 나 자신이 치정의 주인공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연애는 감정과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했다. 나는 연애 감정에 잘 빠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필요할 때면 만나는 여자들은 주위에 흔했고 일을 할 때는 그런 여자들을 완벽하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민을 만나면서 나는 내 이성적인 가치관과 순간적으로 변하는 감정이 마치 다른 두 사람의 것인 양 내 속에서 갈등하는 풍경을 어이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민이 결혼한 여자이고 그래서 당연히 남편이라는 존재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내가 민에게 다가가던 그 몰입의 강렬함에 대해 거의 무력했다 해서 민도 그러했다고 애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P94
평온한 표정 아래 감추어두기에 너무 지독하고 가혹한 통증. 내 앞에서 그 남자와 웃으며 애기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민이 알았다면 민은 자신을 때리는 내 머리통을 안고 울어야 했다.
테러 전문가인 '제시가 스턴'은 테러리스트의 영혼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은 극도의 모멸감과 박탈감이라고 했다. 겉으로 드러난 폭력성 안에 감추어진 그 영혼의 상처를 이해하지 않고는 결코 테러를 없앨 수 없다던가. 그날 밤 내가 민에게 폭발시켰던 폭력 뒤에도 모멸감과 박탈감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폭력에 대해 민이 내린 결혼해. 라는 결론은 더할 나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장 무서운 건 자신에 대한 사디즘이 아닐까. 일 때문에 알게 된 푸드 스타일리스트인 정애와 결혼한 건 그야말로 나를 향한 사디스틱한 폭력이었다. P98
무언가에 매혹되고 도취된다는 것은 결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P100
둘이 함께 달려가는 곳이 낭떠러지인 줄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밀어붙여 주기를 민도 원했던 것일까.
사람을 위로해 주는 건 늘 사소한 것들이죠. P102
나는 견뎌냈던 것을 그녀는 견뎌내지 못했던 것일까. 누군가와 연인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아무래도 그걸 못 견딘 건 그녀의 연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이다. 나는 가질 수 없는 지독한 강인함이다. P104
손닿지 않은 심장의 깊숙한 곳까지 바로 스며들던 그 목소리. 나는 인화성 물질처럼 순간적으로 불타오르는 질투심에 휩싸였다. 자신에게만 주어야 할 것을 아무에게나 던져주는 걸 본 어린아이처럼 그 분노는 터무니없었다. 나는 그 목소리만은 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달콤한 피로속에 행복이 침전물로 가라앉아 있는 듯한 그 목소리만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민의 몸뚱어리는 괜찮지만 그 목소리만은 안 되는 것이었을까.
관대해질 수 있는 정서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다투는 연인들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때때로 유치한 질투심에 휩싸일 만큼의 거리감을 상실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마음은 연약한 근육이라고 말했던 건 우디 앨런이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불수의근이다. 내 것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앞뒤가 전부 선한 사람이나 안팎이 모두 악한 인간이란 없다. 인간의 내면이란 수없이 많은 겹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겹겹의 얼굴은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도무지 파악할 수 없다. P115
민은 정애가 보는 앞에서 모델의 입술선을 고치고 파우더를 발랐으며 브러시로 얼굴을 다시 손질하곤 했다. 그러니까 민은 정애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정애는 민의 의미를 몰랐었다. 모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민은 정애를 읽고 있었나 보았다.
그 저녁 그 흔들림 없던 민의 표정이 한 여자가 기를 쓰고 붙들고 있던 단단함이란 걸 나는 이 저녁, 먼 대륙의 한복판에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날 저녁 민의 정서가 두겹이었고 세 겹이었음을 나는 처음 보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서야 알게 된다. 감각의 극점 위에서 춤추는 듯한 광고판에서 일하면서 내가 그토록 아둔한 남자였다는 사실을 지구의 반대편 땅위에 서서야 깨달았다. P124
사랑한다 해서, 둘이서 죽도록 사랑한다 해서, 다시는 나누어지지 않을 것처럼 서로의 몸속으로 파고들며 뜨겁게 엉긴다 해서 그 사랑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고통과 두려움과 고뇌의 무게까지 같이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나는 내게 결혼하라고 말하던 민의 쓸씀함에는 무심했다. 나를 밀어내던 민 앞에서 느꼈던 내 외로움만 컸지, 민의 아픔은 몰랐다. 사랑한다고 한번도 말하지 않았던 민이 마음속에 얹고 살았던 돌의 무게를 나는 몰랐다. 민이 우울해 있으면 그저 나도 우울해했고 민이 밝아지면 같이 밝아졌다. P127
삶이란 정색을 하고 저울질하기엔 너무 무거운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누구였으며 지금은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었고 지금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붉은 펜으로 깨알같이 일정이 메모된 다이어리 속에? 내가 만든 광고의 장면 속에? 돌이킬 수 없는 민과의 시간 속에? 아니면 이제 소통의 필요성과 방법을 잊어버린 채 공간에서 견뎌가고 있는 정애와의 갈등속에?
정애의 말처럼 가장 가까이 있는 함 사람과 소통할 능력도 없으면서 무수한 불특정 다수를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심감을 나는 여전히 지닐 수 있을 것인가? 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내가 민을 사랑했던 것인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던 민의 사랑과 사랑한다고 말했던 내 사랑의 질량은 각각 얼마나 되는 것일까? P140
나하고 와이프는 한집에 살면서 말을 안하고 지내지
일시적인 거 아니에요?
글쎄 달라질 거 같지 않아, 불편하지가 않거든
이유가 뭐예요?
나도 모르겠어
하기야 프랑스의 핵실험이나 아프간 사태 같은 걸로 싸우는 부부는 없겠죠. 너무 사소해서 도무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구분이 안 되는 일로 다투는 거 아닙니까?
윗도리를 들추고 여윈 갈비뼈 아래 패여 있는 상처의 흔적을 서로에게 보여주면 위로가 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약간은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바보처럼 윗도리를 들추고 서로의 상처를 보여줄 만큼 그렇게 연약해질 때가 있으니.
사랑의 상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알기에. P145
과장된 낙천성으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상처를 부끄러워한다. 하자 있는 상품처럼, 이 거리에서는 운명이 지워준 상처까지 인격의 결함이 되어버린다. P160
형, 장밋빛 인생이란 영화나 로맨스 소설 속에나 있다는 것쯤 알나이가 됐잖아요. P166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너는 너의 일을 한다.
나는 너의 기대를 채우려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 역시 내 기대를 채우려고 있는 게 아니겠지.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만약 우리가 우연히 서로를 발견한다면 아름다울 테지.
오래전 읽은 게슈탈트 심리 치료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P171
영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그저 행복한 한 순간일 뿐, 소멸되지 않는 것은 기억이다. 시간 속에서 바래지 않고 간절함 속에 후광마저 얻게 되는 것이 다만 기억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다. 추억만이 영원할 뿐. P183
죽어가는 나무는 미친 듯이 열매를 맺는다더군요. P196
,정애와는 행복하지 않다. 민은 끝내 풀 수 없는 수수께끼만 던져놓고 떠났다. 이 나이의 일상이란 변경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할 뿐이다. P203
너도 고통스럽구나. 늙은 잉어와도 같이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며 한 공간을 떠도는 것이 너도 괴로웠구나. 조용히 흔들리는 정애의 어깨를 보며 그러나 나는 문을 다고 돌아서서 나왔다.
우리는 그 기슭을 떠나와 버렸다. 왜냐고 묻거나 소리를 지르기에는 너무 멀리 떠나와 버렸다. 그랬는데도 너는 어쩔 수 없이 울게 되는구나. 나는 한 마리 잉어가 그러하듯 누군가에게 내밀 손을 가지고 있지 않다. 피 흘리는 외상이 오히려 치유가 쉬운 상처이듯, 눈에 보이는 환부가 없는 우리의 상처는 도무지 손댈 곳을 알 수 없다. P206
입장을 바꿔봐, 하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건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인지. 제가 겪기 전에는 작게 찔린 상처조차 결코 내 것으로 느낄 수 없는 게 인간인데.
상처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 아픈 인간의 본능이다. 나는 그가 보여주는 상처가 아무리 끔찍하고 혹독하다 하더라도 그가 원한다면 같이 들여다 보아야 한다.
'민이 아이를 가졌다는 거 알고 있었습니까? 지난 봄에 임신했다가 실패한 것 알고 있었습니까?
'민은 내가 아이를 웒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지만 아니에요. 난 아이를 낳을 수없고 민에게 그 이야기를 하질 못했어요. 아이를 가진 것도 유산한 것도 민은 내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확실한 건 모르죠. 내 느낌일 뿐이니까. 때로 한집에서 살다 보면 진술보다 명백한 느낌이란 게 있으니까요. 민의 죽음도 마찬가집니다. 경찰에서조차 사고라고 결론지었죠.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우리 곁에 없습니다. P207
메세지를 보낼 줄만 알고 받을 줄은 모르는 사람. 광고 속에서 사랑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는 일은 광고와 다른 거야. 인생은 30초에 끝나는 게 아니지.
나에겐 30초 만이 의미 있었다. 누군가 불쾌한 소의 식도를 주물러 씻고 습자지처럼 얇게 썰어내는 마음의 풍경을 외면했고 푸른 사과를 먹고 싶다고 말하는 식욕 너머의 간절한 메세지도 외면했다. 푸른 사과를 먹고 싶다는 민의 말을 스쳐들은 나는, 민의 등뒤로 보이던 꽃무늬벽지와 터진 가죽 소파와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못까지 기억하던 그 질병 같은 집중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 무렵 민은 내가 집중할 수 있는 30초 바깥의 편안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 P203
일에 몰두한 남자의 모습은 때로는 아름답지만 너무 오랫동안 어떤 시간의 몫도 나누어주지 않은 남자는 짜증 나고 정 떨어진가고 말했던 건 정애였지.
몸을 돌려 어두운 복도를 앞서 걸어가며 여자가 말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이 세상과 맞서는 칼 하나쯤은 있어요. 어떤 일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나의 전부를 걸지 않는 거지. 어느 날 내 것인줄 알았던 어떤 것이. 내 사람인 줄 알았던 누군가가 혼연히 떠나갈 때. 깃털처럼 가벼이 날아가 버릴 때 그 칼이 얼마나 날 편하게 해주는지 몰라요"
세상과 대결한다는 건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것조차 흔적없이 잘라낼 수있는 잘 벼린 칼 하나쯤 간직하는 것인가. 칼을 가진다는 건 지난밤 사라진 호수를 발견하곤 며칠 동안 상실감과 알 수 없는 우주의 신비에 고즈녁해하던 소년이 어느 날, 이놈의 호수가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군. 아무런 감정없이 중얼거리며 오늘치 이윤을 계산기로 두들기기에 골몰하는 중년이 되어 있는 것인가
사진의 이면을 볼 수 없듯 사람의 마음이 풍경 이면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여자는 내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이 거리에서 우연히 스쳤던 한 남자에게 필요 이상 기울어져 있었던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거이다. 일에 빠져 있는 난 나보다도 날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먼저 지쳐버리게 하는 모양이다.
이 안개, 꼭 우리 두사람 사이를 흐르는 강물 같네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두 개의 역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거예요. 상처를 주는 쪽과 상처를 받고 피흘리는 쪽, 난 그 어느 쪽도 되고 싶지 않아요.P218
마음속에 뷰파인더 위에 또 하나이 풍경이 만들어진다. 나는 병이야. 질병에 걸렸어. 아무것도 날 아프게 하지 못하고 누구의 상처도 같이 느낄 수 없어. 모든 게 내 감각 속에선 풍경으로 변해 버려.
P221
사랑후에 오는 것들,
그(또는 그녀)가 떠난 경우와 그(또는 그녀)가 죽은 뒤에 오는 상실감은 다를 것이다.
사랑은 떠나고 '추억만 영원히 남을 뿐'이라는 문장이 공감갔다
사랑을 하고, 사랑한 만큼 그 대상이 함께이기를 바라지만
내 바램대로 되는 대상은 없다.
부부간이든 연인간이든 그 어떤 대상도 기억만 남을 뿐
사람이 덜 외로운 건, 삶이 덜 누추한건,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일까.
지나간 사랑이라도 내 가슴에 있다면, 존재하는 것.
그것 또한 그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그 대상의 마음과는 상관없기도 한 것이다.
민은 떠났고
그녀를 떠나보낸 나(영주)가 느끼는 상실감
사랑후에 떠난 후에 느끼는 꾸밈없는 독백 같아서 공감하며 읽었다..
사랑후에 오는 것이 설령 상실감 뿐일지라도
그래도 사랑을 후회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가지고 갈 추억하나 갖고 사는 일
봄을 사랑해 본 사람은 안다
봄날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
.
* 이 책은 200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책이다.
'책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사적인 도시 (0) | 2017.12.08 |
---|---|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ㅡ알랭 드 보통 (0) | 2017.11.13 |
열정 - 내가 누구인지, 삶의 흔적으로 말할 뿐 (0) | 2017.08.01 |
신간 <논어 : 삶에서 실천하는 고전의 지혜> (0) | 2017.07.21 |
숨결이 바람될 때 /폴 칼라니티 (0) | 2017.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