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삶과 인격을 존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며,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인간은 내가 나를 위하는 것같이 서로가 사랑함으로 행복과 희망을 창조할 권리와 의무를 갖고 태어났다.
<영원과 사랑의 대화> 이후에 씌여진 글들을 선별해 모은 것이 이 한권으로 묶인 것이다.
누구나 주어진 현재가 최상의 사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통해 행복을 찾아 누리려는 신념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보람 있는 삶을 사모하는 이들에게 소중한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머리글을 대신하며
2018년 정월, 백수를 맞이하면서 중에서
7,8년 전, 존경하는 지인에게 누구를 존경하냐고 물은적이 있다.
그녀는 대학시절 김형석 교수를 존경했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때부터 어떤 분일까 궁금증이 생겼었다
신문에 교수님 기사가 나오면 아는 사람 만난 듯 집중해 읽곤 했다.
작년에 백수를 맞아 책이 나온다는 기사를 보고
노장 철학자의 현주소는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서 구입했다.
책은 그 동안 써온 글을 백수를 맞아 한데 묶은 거였다.
오래전에 쓴 글도 있다. 집중해서 읽었다.
제호 '남은 시간을 위하여'가 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내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기대감이 큰 책이었다.
최근에 인간극장에서 교수님 일상이 방영되었다.
책 속처럼 담담한 일상 무엇보다 건강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과 이야기 할 줄 아는 삶의 여정
혼자가 아닌 것 같지만 혼자인
삶의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책이다.
탐나는 문장 두번 세번 반복해서 읽고 싶은 문장들만 올려본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동행을 요청할 수도 없다.
외로움은 밖에서 찾아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독에 관하여
인간은 정신적 존재이다. 정신적 존재의 특징은 사귐이 있다는데 있다. 가족 친구 들이 사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나는 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내가 나에게 묻고 내가 나에게 대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린애들이 소꿉장난하는 것 같은 일이지만, 위대한 철학자들도 그와 같은 자신과의 대화를 해왔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그렇게 생긴것이며, 지금도 많은 사상가는 자신과 대화를 거듭하는 동안에 정신적 발전과 향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사귐, 사귐의 한 방도인 대화, 이것이 정신적 존재의 특징인 동시에 인격의 본바탕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귐과 대화가 끊어졌을 때 느끼는 마음 상태를 우리는 고독이라 부른다. 쉽게 말해 고독은 홀로 있는 마음 상태이다. 이때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또는 정신이 홀로 있는 상태가 고독이라는 것이다. 육체가 혼자 앉아 있다고 해서 그대로 고독인 것은 아니다. 자신과 대화가 가능한 때는 고독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사색을 하든가 음악을 듣든가 그림을 보는 때, 이런 때는 내가 혼자 있는 것 같아도 어떤 사상, 예술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때이므로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그 대화가 끊어지면 고독을 느끼게 되지만......
정신생활이 빈약한 사람들은 혼자만 있게 되면 곧 고독을 느낀다. 자기 자신과 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생활이 풍부한 사람은 언제든지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항상 자신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력이 빈약한 반면 생리적인 자아가 강하기 때문에 또 하나의 육체를 가진 타자를 찾아 스스로의 고독을 메우지 않을 수 없다. P45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을 피한다. 또 결코 오랜 시간을 군중속에서 보내지 못한다. 대중 속에서는 정신적으로 깊이 있는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가나 실업가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지만 학자나 사상가가 그렇지 못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요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깊은 사상은 정신적 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읽기 전에는
고독은 선택이고 외로움은 타인과의 단절 정도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외로움이 고독이었다.
고독을 즐긴다는 말은 어째 교수님이 말하는 '고독'에선 즐기기가 쉽지 않을 듯 하다.
혼자있으나 기분 좋은 일
혼자서 잘 지내기 하는 일이 고독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고독이 마음의 상태라는 말 속에서 '마음'은 인간적인 내용의 표현이다. 따라서 모든 고독은 인간적인 것이다. P46
나를 대하는 어머니에게도 고독은 자라고 있으며 어머니를 대하는 나에게도 고독은 자라고 있다. 정신이 자란다는 것은 이렇게 고독이 자란다는 뜻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그가 지니고 있는 고독의 척도가 곧 그의 인간의 척도'라는 뜻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P52
무소유의 삶을 생각한다.
옛날부터 침묵은 웅변보다 귀하다는 말이 있으나, 정치인들이 웅변에는 거짓과 명예욕이 깔렸기 때문에 불필요한 언변보다는 침묵을 지키는 인품이 고귀하다는 판단은 옳으나, 선하고 아름다운 대화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즐거운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않는가?
가장 값있는 인생은 어떤 것인가, 사랑이 있는 고통과 고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우리가 존경하며 감사히 여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를 위해 사랑의 짐을 져준 사람들이다.
(*****)
- 그 대표적 인물들이 공자, 석가,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P66
선하고 아름다운 대화
사랑이 있는 고통과 고뇌
우리가 진정으로 감사해야 하는 것에 대한 노 척학자의 담담한 사유가 편하게 와 닿는다.
나보다는 주변을 먼저 볼 줄 아는 겸손과 지혜가 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옳은지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가치 있는 인식이란 어떤 것인지... 한번더 돌아보게 된다.
산다는 것의 의미
정신적 자각이 없는 동물은 죽을 때까지 자아의식을 갖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보거나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교육이 계속되는 동안 인간은 꾸준히 자아를 찾아 성장하는 것이다. 교육이 그치면 성장도 그친다. 체험이 멎으면 삶이 끝난다. 새로운 사색을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키워갈 능력을 잃는다.
100의 자아의식과 20의 자아의식을 갖는 사람이 같다고 볼 수가 없다.
이렇게 명쾌하게 풀어낼 수가 있을까
자아의식을 동물과 인간으로 나뉘어 놓은 것도 재밌다.
그리고 교육의 목적이랄까
성장을 넘어 주체적 자아를 키워가야 하는 우리 삶의 여정에 대한 얘기도 재밌다.
그러면 강렬한 자아의식을 갖는 사람은 어떤 성격의 인간인가. 자아 속에 남다른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깊고 중요한 문제를 갖는 사람은 그만큼 자아의식이 뚜렷해진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문제로 만족하는 사람은 자아의식도 빈곤하며 그에게는 확실한 개성이나 뚜렷한 자아성이 없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한 문제의식이 강렬하기 때문에 그만큼 자아의식도 뚜렷해진다. 사상가는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남보다 다른 자아성을 지니고 산다. 이 문제는 육체나 본능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자기통일과 성장을 위해 불가피하게 찾아 누리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성격의 교육도 두 가지 책임을 가진다. 처음 과정은 자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며 다음은 스스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끄는 노력이다.
-진정한 자기발견은 자아의식에서 오며 그 자아의식은 문제의식에서 싹튼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사느냐가 어떤 인간이 되느냐이며, 어떤 문제를 해결 지었는가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가와 통한다.
우리가 젊은 지성인들에게 문제의 소유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성인이 된다는 것은 정신적 문제를 갖는다는 듯이며 대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를 사회 속에서 발견한다는 뜻이다.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죽은 물고기가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같이 생명력이 없는 인간에 그치게 된다. P73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지양했던 명문에 닿아 있다.
만족할 줄 아는 인간이 되지 말라는 얘기와
문제 의식을 갖는 삶의 상반성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생명력이 없는 인간은 문제의식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문장이 걸린다.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내 가까운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인생의성숙기는 언제로 체험했는가를 정리해본 바가 있다. 모두의결론은 60세부터 75세까지였다는 얘기였다. 중요한 저서가 쓰인 것도 칠십 대 초반이었고 자신의 사상과 정신적 위상이 형성된 것도 같은 기간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육십이 되기 전까지는 인생의 의미도 깨닫지 못했는가 하면 삶의 보람도 터득하지 못햇던 것이 사실이다. 인기를 따라 움직이지 않고 소수이기는 해도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육십 이전에는 불가능했다는 것이 일생에 대한 회고담이었다.
-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은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 하나는 신체가 늙으면 면 인생 자체가 늙어버린다는 착각이다. 그래서 소중한 정신적 건강과 성장을 일찍부터 포기해버린다. 그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하는 일이다. 신체적 건강도 그렇다. 사십까지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머문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십이 넘으면서부터는 강건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법이다. 육십을 넘긴 뒤부터는 더욱 그러하다. 또 하나의 잘못된 관념은 내 늙음과 성장을 주변적 환경에 맡겨버리는 일이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운명적으로 주어져 있는 신체적 늙음 속에 어떻게 강력한 정신적 활력을 충당시켜 인간적 보람과 젊음을 유지하는가에 달려 있다. P82
늙어보지 않아서
젊음은 젊음이 귀한 줄을 모르고
늙어봐서 젊음이 귀한 줄을 안다는 말이 있다.
교수님이 말한 65세에서 75세가 성숙기라면
나이들어 돌아본 젊은 시절처럼
그때 쯤에 돌아본 나는 지금 젊음 아닐까.
성숙기란 어떤 의미일까.
지금보다는 잘 익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데
나이는 들수록 단맛이 더한다는 뜻일까
들어보지 못했으니 섣불리 무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욕심과 의지는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욕망 또는 의욕을 지니고 있다. 그 욕망이 자기중심이 되며 이기적인 것으로 굳어지면 욕심이 된다. 그러나 그 의욕이 객관적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면 의지로 나타난다. 그래서 같은 본능을 갖고 출발하나 자기 욕심의 노예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생의 차이가 생긴다.
이 둘은 한 개인의 삶 속에 공존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자기 욕심을 멀리하고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공동체에 이바지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P83
노인의 자산은 지혜이다
독서는 계속되어야 한다.
노인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이 젊은이들을 선도하는 바른길이다. 나는 내 자녀나 후배들과 식당에 가는 때가 있다. 그때는 자녀나 후배들보다도 더 정중하게 서비스하는 이들을 대한다. 그것도 후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P97
처음과 마지막 시인
나는 윤 형(윤동주)과 한 학년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그의 곧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까이서 느끼곤 했다. 윤 형은 그때부터 시를 쓰고 있었다. 황순원 선배와 더불어 학교 잡지인 <숭실활천>편집에 정성을 쏟던 흔적은 지금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작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P115
내가 있다는 것
내가 있으니 우주도 세계도 역사도 우리의 사회적 현실도 이렇게 있는 것이지 내가 없었더라면 이 모든 것은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없어도 태양은 그 궤도를 돈다지만, 그것은 다른 어떤 사람의 태양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미 내 것은 아니며, 나와 더불어 태양은 없는 것이다.
나는 우주를 생각할 수 있어도 우주는 나를 생각할 수 없으니 내가 우주보다도 더 중요하고 값진 존재일지도 모른다. -파스칼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며, 빛의 근원이며, 존재의 바탕이다. 나는 하나의 내던져진 존재일지 모른다. 이유도 조건도 없는 하나의 우연한 산물일지 모른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었던 한 우연의 결과인지 모른다.
-그야말로 유아독존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며, 이로부터 세계와 우주의 모든 무게가 나라는 초점 위에 머물고 있다 .나의 존재는 이렇게 귀중할 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전체 세계의발달과 근원이 되고 있다. P123
정의냐 사랑이냐
독일의 젊은 신학자 본회퍼가 생각납니다. 그는 히틀러를 트럭을 몰고 질주하면서 많은 시민들을 죽이거나 부상시키는 정신병자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은 그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바라보고만 있지 그 정신병자를 트럭에서 끌어내려 더 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줄 생각은 못하고 있다는 견해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히틀러 제거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고 사형을 당한 것은 양심적인 애국자로서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성직자들은 그러나 목사가 어떻게 암살음모에 가담할 수 있었을까는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제 2 제 3의 방법도 있었을 텐데....
P151
본회퍼 목사님은
작년에 읽은 마그누스에서 감명깊게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어서 무엇보다도 반가웠다.
사람은 다 같은 생각을 갖고 살 수는 없습니다. 목사님이나 스님 같은 분들까지도 정치인이나 법관과 똑같은 생각을 갖는다면 성직자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겠지요. 나 같은 교수들은 정의의 편에서 서서 비판도 하고 욕도 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고요. 목사님 같은 이들은 그대도 용서하고 구원할 수 있는 사랑의 길을 찾아보자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 둘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한 가지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만일 본회퍼 같은 목사가 '하나님' 저는 히틀러를 죽여야 하겠습니다. 그가 죽지 않으면 수많은 백성들이 살아남을 수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틀러 대신 제가 희생되어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면 저는 직접 히틀러를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성직자가 살인을 범할 수는 없지 않습니다. 목사가 살인을 했다는 모순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희생의 재물이 되겠습니다. 하는 소원을 했다면 그가 히틀러를 살해했다고 해도 정당성이 인정될 거 같다는 의문을 던져본 것입니다. 나를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정신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밖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어떻게 되든지. '내가 죽어서 저들을 살릴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이 십자가를 선택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P153
내가 받아본 상장은 생각 밖의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제일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 이 상장을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상장을 읽으면서 웃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 꼴지를 했으니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뛰었음에는 틀림없다.
딸이 살고 있는 미국에 가서 체육을 못하는 손자가 받은 상을 보고 적은 글이다.
-꼴지에게 칭찬할 수 있는 사회라면 그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그러니까 모든 꼴지가 귀히 여김을 받으면서 즐겁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한두 학생을 제일로 삼기 위해 수많은 학생을 열등감과 좌절감에 몰아넣는 일은 얼마나 비교육적인가.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잘못된 가치관이 많은 어린 생명에게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만들어주고 있다.
교육이란 어린이들의 능력을 계발해주며 선한 의지와 신념을 뒷받침해주는 일이다. 그 선의의 뒷받침은 모든 학생에게 필요하며 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열등감과 좌절을 느끼는 학생들일수록 더 많은 칭찬과 성장을 위한 후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앞서는 학생들보다는 처지는 학생들이 더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도록 하는 것이 교육적 책임일지 모른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모두 깊은 반성에 잠겨야 하겠다.
'과연 나는 꼴지인 어린이에게 상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자신 있는 교육자가 되고 있는가?' 하고.
P171
미국의 초등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문장이다.
선비 정신과 돈
가수나 배우에게는 그 목적에 따라 차별대우를 하면서 교수나 정신적 지도자들에게는 다 같은 대우를 한다. 그분들은 점잖은 분들이니까로 통하면 된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인지 모르겠다. 표리가 다른 생활도 좋지 않으나 선비는 돈에서는 초월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자타가 시정해야 할 것이다.
P189
꿈 이야기
프랑스의 서상가 파스칼은 "그는 강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하는 말을 했다.
갑을 을이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있다. 을이 물었다.
"너는 왜 나를 아무 이유도 없이 때려죽이는가?"
그에 대하여 갑은 대답하는 것이다.
"네가 만일 강 이편에 살고 있었더라면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악이며 살인죄가 된다. 그러나 너는 강 저편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죽이면 나는 용사가 되고 애국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죽이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강이란 무엇인가? 정치가 말하는 정의의 선이다. 옛날에는 그 강은 국경선이었고, 오늘날엔 삼팔선이 하나 더 가해진 것이다.
정의의 표준이 어디에 있는가, 모스코바에 사는가, 워싱턴에 사는가에 있다. 평양에 사는가, 서울에 사는가에 있다.
자연은 아직한 번도 지구에 줄을 그어준 일이 없다. 오히려 인간들이 만든 줄들을 거듭해서 지워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평생토록 줄을 긋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기나 한 듯이.
"이러한 인간의 선들이 없는 곳이 있기 위해서라도 내세는 있어야 해"라고 중얼거리는 내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생사를 알지 못하는 부친의 얼굴이 나타났고, 그렇게 남쪽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죽음의 길을 택해야 했던 동생들의 모습이 눈에 아련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꿈은 아니다.
P208
철학자의 사유가 잘 묻어난 글, 읽고 또 읽었다.
철학자의 사상은 어떤가 궁금했는데
너무도 담백하고 담담한 문장들이 나를 이끌었다.
살아있는 동안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하루하루 날마다 좋은 날로 다 일까
젊음처럼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어떤것도 나이에 따라서 인식이 달라지는 건 맞는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한 일보다 주변을 위한 선의는
지키고 키워가야할 문제라는 생각에 닿는다.
심년이나 이십년 후쯤 성숙기가 기다리고 있다니 겸손할 일이다.
풋내나는 날들일지도 모르므로..
20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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