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라틴어 수업

구름뜰 2019. 4. 8. 20:02

 

'라틴어 수업'은 2010년부터 6년간 서강대 초급 중급 '라틴어 수업'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저자 (한동일)는 로마에서 10년간 공부했으며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이다. 로타 로마나가 설립된 이래, 700년 역사상 930번째로 선서한 변호인이다. 2001년 로마 유학길에 올라 교황청립 가테라노 대학교에서 2003년 교회법학 석사학위를 최우등으로 수료했으며, 2004년 동대학원에서 교회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과 로마를 오가며 이탈리아 법무법인에서 일했었고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 강의를 맡아 진행했다. 그의 라틴어 강의는 타 학교 학생과 교수들, 일반인들까지 청강하러 찾아오는 등 최고의 명강의로 평가받은 바 있다.




독서회 3월 지정도서였고 4월 첫째주에 토론한 책이다. 

라틴어라면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까르페 디엠" 정도 밖에 몰랐는데.

이 책을 통해 라틴어에 대한 이해와 로마의 역사 종교(저자는 신부)에

대한 이해까지 더하게 되었다.

저자는 언어 수업이 목적이 될 수 없으며

공부는 평범한 두되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시키고

사고체계를 넓혀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


Prima scbola alba est

'데 메아 비타'를 A4 한장 분량으로 적어내는 것이 과제인 '데 메아 비타'는 '나의 인생에 대하여'라는 뜻이다.


첫 강의에서 내주는 중간고사 과제다

공부를 통해서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으로 끌어주는 공부방식이 여기서 부터 보인다.

그리고 교수님은 운동장으로 나가라고 한다.

거기에서 아지랑이를 보라고.....대재의 불꽃을 통해서

내 마음의 불꽃을 찾아보라는 메세지다..



봄 기운에 흩날리는 아지랑이를 보는 겁니다. 봄날의 아지랑이는 강한 햇살을 받은 지면으로부터 투명한 불꽃처럼 아른아른 피어오르기 때문에 웬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 마음속에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기운을 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지랑이'는 단어가 억겁의 시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쉽게 포기하지 말고 시시때때로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자, 이제 이 봄날의 아지랑이를 보러 운동장으로 나가십시오. 공부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입니다.


-지금 여러분 마음의 운동장에는 어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습니까? P35




라틴어의 고상함

Magna puerilitas quae est in me


라틴어는 유럽의 모어라고 한다.


라틴어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 언어다. 하지만 우리의 생할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유비쿼터스, 비전, 아우디, 에쿠스, 아쿠아, 스텔라 등과 같이 익숙한 말들 모두 라틴어이거나 라틴어에서 온 말들입니다.



라틴어가 공용어였던 로마 제국에서 조차 이 언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모르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나 편견은 그때에도 있었다는 사실...

문법이 복잡하다. ..... 등등등  하지만 라틴어 공부는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시키고 사고 체계를 넓혀 준다.



서구 중심 언어로 언제나 공고할 것만 같은 라틴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마르틴 루터에 앞서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면서부터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찾아서 읽어 보았다.

그가 독일어로 라틴어 구약을 번역하여 성경이 그들만의 권위로 자리하던 때

인쇄술의 발달과 맞불려 성경이 전 세계로 번역되는 데 일조 한 그의 일화는 실화인가 싶을 정도다

그는 신부이면서 면죄부에 대한 판매가 온당치 않음을

성경 구절 구석구석을 들어서 반박문을 발표했고

이것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다.


이어 칼뱅까지 그런 사람들에 의해 프로텐스탄티즘이라는 개신교의 효시 되었다는 것

하지만 그들이 원한 건 타락한 가톨릭을 넘어

초기 교회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는 것까지.

지적 욕구 종교적 욕구까지 채워준 가지를 뻗어나가는 문장들이 많았다.



-라틴어에 정통한 이탈리아의 저술가 이자 교육가인 라우렌티우스 발라(19407~1457)는 라틴어의 쇠퇴는 정확한 라틴어 지식이 결여에서 시작된다고 믿었다. 또한 유럽 사회의 신. 구교 간의 논쟁도 같은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다른 것을 생각하는 소통의 문제 때문이라고 여겼다. P44


라틴어는 기본적으로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내려다보지 않습니다. 수평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죠. 과거 로마가 스페인을 정복하고 북아프리카를 정복해 식민지로 삼았지만 스페인이나 북아프리카 사람들은 로마에 지배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 중 우수한 인재들을 사회 전반에 기용했고, 이들은 로마 제국의 경영, 경제. 군사 분야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는 사고의 틀입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수평성을 가지고 있는 라틴어가 로마인들의 사고와 태도의 근간이 되었을 겁니다.P45


-몇 마디 단어로도 소통할 줄 아는 어린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P46


유럽쪽이 빨리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열린 사고에서 였을 것이다.

사고의 틀인 언어..

그것이 수평성을 가져서 일조했음을 알수 있다.

동시대 우리 언어는 어땠는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돌아보려면 우리 언어의 수직성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

Non scgolae sed discimus


"공부해서 남주나"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위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공부한 사람의 포부는 좀 더 크고 넓은 차원의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기보다 더 많은 사람, 더 넓은 세계의 행복을 위해 자기 능력이 쓰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 한 차원 높은 가치를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워서 남주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 P57



지식인이 아니라 지성인!을 말하고 있다

학교 다닐 때 된사람 든사람 난사람 생각이 난다.

된사람은 인격과 덕을 갖춘사람

든사람은 지식이 풍부한 사람

난사람은 재능이 이름이 난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궁극에 닿아야 할 것은 된사람이다.


지식인이라고 반드시 된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아는게 적어도 된사람은 가능하다

다만 든사람이 그 앎을 타인을 위해 쓸때 이상 사회가 가능하지 않을까.

공부한 사람들이 공부한 값을 하는 사회 런 사회는 요원한 일일까.






 


단점과 장점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 한다


본래 장점이었던 것도 단점이 되어 짐이 되었다면 과감히 버려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어려움이 닥치고 나서야 한때의 장점이 거꾸로 저를 옭아매는 단점이 되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것은 내 장점이다 단점이다" 라고 규정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하고, 또 환경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강을 건너서도 강가에 두고 오지 못한 배를 나는 왜 계속 지고 가는걸까요? 삶이란 끊임없이 내 안의 메리툼(장점)과 테팩투스(단점)을 묻고 선택하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P67



우리는 수시로 메인다.

좋은 갓에 싫은 것에

나를 신경쓰게 하는 것에

나와 전혀 다른 것에

그래서 무시하고 외면하다가도 한번씩 또 올라오기도 한다.

그런 만큼 그때 그때 상황에 반응한다.


단점이나 장점도 수시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내 상황이나 내 마음도 수시로 바뀐다.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고정되지 않는 실체로 살아야 한다.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각자 자기를 위한 '숨마 쿰 라우데'(최우등)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세상의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다보면 초라해지기 쉬워요. 하지만 어떤 상황에 처하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일으켜세울 수 있습니. 그리고 훗날에는 그런 사람이 한 번도 초라해져본 적 없는 사람보다 타인에게 더 공감하고 진심으로 그를 위로할 수 있는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P77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중세의 교육에서 주목할 것은 젊은 세대가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하고, 그 과정에서 각자 자기 목표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의 정체성이 여기에 있다고 봐요.

자기 삶을 사랑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육의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중세교육이 이러했으니 유럽이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해방후 우리의 교육은 미국의 공교육이었다.


미국에는 사교육과 공교육이 있었는데

사교육은 리더를 위한 교육이었고

공교육은 산업사회 근로자를 위한 교육이었다고 한다.


즉 시키는 것만 잘하는 교육, 굳이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없는 교육

그것이 주입식 교육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아픈 역사 슬픈 역사가 아닐수 없다.

유전자까지 스며든 공교육의 폐혜

 이제는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으리라




-봄철의 아지랑이가 무심히 길을 걸을 때는 보이지 않고 멈춰 서서 유심히 관찰해야 보이듯이.

내 마음속의 아지랑이도 스스로를 유심히 들여다봐야 볼 수 있는 것이죠. p83





 

캐사르의 것은 캐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유럽 역사와 그 역사를 기록한 라틴어는 로마 문명 외에도 그리스도교를 언급하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제국의 언어였던 라틴어, 로마 제국이 패망한 뒤에 카톨릭 교회가 그 라틴어를 교외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틴어어는 로마 제국이 패망한 뒤에도 근대 이후까지 교회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유럽의 주요 언어로 남게 되고, 그것이 사회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 종교와 사상을 망라한 것으로 서구 문화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단초와 같습니다.p93


그리스도교는 스토아 학파와 키케로 등 로마의 법 사상가들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이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다만 스토아 학파가 인간이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하여 도덕적 평등을 주장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에 근거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귀족과 평민을 차별하지 않는 고대 유대법과 유대인과 이방인이 권리를 동일하게 본다고 규정한 유대교 전통을 그리스도교가 계승한 겁니다. 이는 바오로의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 모두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3:28 p97


인간은 평등하다는 남자도 여자도 종교도 그 어떤것도...

이것이 중세에 가능했으니.. 그저 부러울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신국론'에서 이 세상 왕국과는 다른 왕국, 세속의 통치권과는 구별되는 통치권, 세상의 것과는 다른 권위와 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지상도시와 천상도시라는 두 개의 시에 속한 시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 정치 권력의 명령과 종교의 계율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수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치와 종교 사이의 합의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세속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가 훨씬 막강해집니다.



- 중세시대 처음 천년 동안 교회의 권위가 정점에 달하게 됩니다. 그 영향으로 교회법이 일반 시민법보다 더 상위에 자리하게 되었고요. 그러면서 성경이 법률적 차원의 공동 유산이자 공통규범이 되어 점점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성경이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신앙으로 가진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인류 역사상 종교와 신앙의 가치가 최고조에 이른 중세 시대에서조차 성경의 가치만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성경의 가치는 유념하되, 세속의 학문과 연계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합리적인 인식인가.

머물러 있었다면 절대로 얻지 못했을

 가르쳐 주는 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절대로 가닿지

못했을 인식들이 빛나고 있다.

서양사의 아름다운 인식을 엿볼 수 있다.




-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중세 시대에는 하나의 교와 신조만을 강요했다는 것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유연하고탄력적으로 사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오로를 통해(로마서) 어떤 공동체에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능했던 것이 또 다른 공동체에서는 그것을 얻기 위해 엄청난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학과 법학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는 저도 똑같이 희망해봅니다. 신학과 법학이란 학문이 그리고 종교가, 경직되고 닫힌 사고의 실타래를 좀 더 유연하게 풀어갈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말입니다. 그때 캐사르의 것은 캐사르에게 돌리고 신의 것은 신에게 돌려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p101



왕의 것은 왕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를 구분할 줄 아는 인식....



 


만일 신이 없더라도


이슬람교에서 인권은 자유로운 이슬랍교도 성인에게만 온전히 존재합니다. 비이슬람교도와 노예는 부분적인 보호만 받거나 어떤한 법적 능력도 갖지 못합니다. 이슬람교도가 이슬람교 원칙에 반대하여 활동하거나 이슬람교 신앙을 포기하면 이슬람 국가의 국적을 잃을 수도 있어요. 배우자와 자신의 종교를 변경하는 일은 그 자체로 혼인 해소, 상속의 포기와 시민권 상실을 가져올 수도 있고요. 이슬람교는 모든 종교의 개종 권유를 거부하면서도 자신들은 타인에게 이슬람교도의 개종을 열렬히 권유합니다. p107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은 유엔 정부기구를 통해 세계 인권선언 제 18조와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 18조 1항에 있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선언의 내용은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는 종교 또는 신념을 변경할 자유와, 단독으로 또는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그리고 공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선고, 신앙실천, 예배 및 의식에 따라서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표명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라고 규정합니다. p108


어찌 보면 성경도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이해한 것을 제자의 제자에게, 또 그 제자에게 전달하여 기록된 학생들의 수업 노트였을 겁니다.



-성경에 예수의 가르침이 기록되지 않았거나, 예수의 본 의도가 온전히 담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서구의 역사는 그에 대한 반전으로 끊임없이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라는 가정 하에 인간 이성으로 인간과 법, 철학과 윤리를 찾아갔는지도 모릅니다. 이를 유럽에서는 세속주의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그 여정은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자연법을 통해 인간에게 통용될 수 있는 합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통용될 수 있는 '합리'라는 실타래를 좀 더 유연하게 해석하는 능력을 신이 인간에게 맡겼을지도 모릅니다.

p111



그 무엇이든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무엇이 신의 진의일까.

질문하는 과정이 필요한지도...





 


네가 주기 때문에 내가 준다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을 때 우리가 얻고자 하는 바를 위해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갖출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고요.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추는 것, 그것이 결국 힘이 되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길일 겁니다.

어쩌면 삶이란 자기 자신의 자아실현만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준비 속에서 좀 더 완성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서 자아실현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요?

p122


독서회를 통해서 어떤 책을 읽고서든 토론하다 보면 잘 사는 게 무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이 자동으로 따라 붙는다

거기서 늘 가까운 답이 이 문장이다.

이타행이 사람을 완성시키는 것 다.

자아실현은 덤으로 온다는 말이 매력적이고 또한 사실이다.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 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놓치고 말았다는 허무함을 느낀다는 겁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개인적, 사회적인 자아가 실현되지 않으면, 인간은 고독하고 외롭고 소외된 실존과 마주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외되고 고독한 인간, 특히 윤리적 인간이 비윤리적 사회에서 고통받고 방황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영적인 동물로서 이성적 인간이자 종교적 인간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원하고 목표하던 사회적 지위나 명망을 위한 뒤 느끼는 감정은 만족이 아니라 우울함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달려본 사람만이 압니다. 또 그게 내가 꿈꾸거나 상상했던 것처럼 대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만큼 불필요한 집착이나 아집을 버릴 수도 있어요. 그만큼 내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겁니다.p137




 


로마인의 나이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 -토마스 아 켐피스 (1380~1471) 독일의 수도자이자 종교사상가



로마인의 음식


지식층의 경우 저녁 연회에서 책을 읽어주는 노예가 철학 문구나 문학책을 읽어주기도 했는데요. 이 전통은 로마 가톨릭 교회이 수도원에 전수되어 수도원의 저녁식사 때 회원들 가운데 한 명이 나와 성서나 자기가 몸담고 있는 수도회의 규칙을 읽어주는 습관으로 정착됩니다.




 



아는 만큼 본다


알고 본 것에서 더 나아가 성찰하는 사람..


사람마다 자기 삶을 흔드는 모멘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힘은 다양한 데서 오는데 그게 한 권의 책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일 수도 있고, 한 장의 그림일 수도 있고, 한 곡의 음악일 수도 있습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깨어 있고 바깥을 향해서도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책 한 권을 읽어도 가벼이 읽게 되지 않고 음악 한곡을 들어도 흘려듣지 않게 될 겁니다. 누군가와의 만남도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아니라 의미 있는 만남이 될 겁니다. 한순간 스치는 바람이나 어제와 오늘의 다른 꽃망울에도 우리는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p216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일을 하다가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숲을 걸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저는 제 마음 안에 고이는 생각들을 바라봅니다.


인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를 현실과 연결시켜 더 풍요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가상의 연결이 축적되어 언어가 탄생하고, 그 가상을 통해 예술과 여러 다채로운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행복이라는 겁니다. 만질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이 가상에 우리는 모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p223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위해 달릴 때 존재의 만족감을 느끼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나를 충만하게 하는 욕망이 필요한 때입니다.p224






 


진리에 복종하라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일까요? 저는 종교란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정원과 같다고 생각해요. 여기에는 모든 종교를 통틀어 '종교'라는 아주 큰 정원과 각각의 종교라 할 수 있는 작은 정원이 있어요. 그리고 그 안에는 종과 수가 다른 식물들이 어떤 제한된 범위내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죠. 취향과 생각이 제각각인 식물은 동일한 정원에 뿌리를 내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각각의 작은 정원에는 같은 생각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식물들만이 공존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각자 자기가 뿌리 내리고 있는 그 정원만 옳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는 더 큰 정원, 나아가 자연이라는 더 큰 세상 속에 살고 있기도 합니다. 정원 안에서 정원 밖을 굼꾸며 살기도 하고요.


정원과 달리 자연에는 잡풀과 잡목이 따로 없습니다. 다 제각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구성원이죠. 정원 안에서는 각각의 생각과 가치관에 어울리지 않는 식물들은 뽑아내야 할 잡초에 불과하지만 더 넓은 자연에서는 그 어느 것도 잡풀, 잡목인 것이 없습니다. 제각각의 정원들이 자기들의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더 넓은 자연안에서는 '틀렸다' 가 아니라 '다르다'라는 것, '틀린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습니다. 그런 자연 같은 분위기가 조성 될 때에야 비로소 진리는 진리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요? 그래야 그 자체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오보에디레 베리타티"를 말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리에 복종하라 이 말을 생각하면  "지금 나는 어느 정원에 있는가?"하고 묻게 돼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어디에 서 있나요? 그곳에서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p251



종교에 대해서 이렇게 잘 풀어놓은 문장을 나는 이적지 본적이 없다.

가톨릭 신부로서 이렇게 자유로울 수있는 인식

어쩌면 우리가 성직자라고 하는 이들의 인식이 이쯤은 되어야

그를 따르는 종교인들의 자세도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종국에는 죽는다


그가 과연 나에게 상처를 주었나?

제 마음을 한 겹 한 겹 벗겨보니 그가 제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제 안의 약함과 부족함을 확인했기 때문에 제가 아팠던 거예요. 다시 말해 저는 상처받은 게 아니라 제 안에 감추고 싶은 어떤 것이 타인에 의해 확인될 때마다 상처 받았다고 여겼던 것이죠. 그때부터 저는 상처를 달리 생각하게 됐습니다. 대부분 스스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다가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p258


상처는 나의 약점이나 단점을 확인시켜주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니까요. 마음의 분별, 마음의 선로 전환기,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무작정 상처받았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p259


주옥같은 문장들이다

수도사로서 정제된 인식들이 고스란히 문장속에서 빛나고 있다

우리가 상처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외부에서 온 것이고

그것에 대한 가해자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며 살게된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그게 순전히 상대의 탓이 아리라는 걸 알고 이해하는 시점도 온다.

나이 어가면서 좋아지는 것이 이런 인식들인데

여기서 저자는 내 상처는 나의 약점이나 단점을 확인시켜주고 그것을 통해서

더 자신을 잘 읽게 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상처받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상처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야말로

나를 이해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인것이다.

감사할 것은 내 난의 열등감 상처 단점,, 그런 것들 뿐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나약하므로..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사막 한가운데 섰을 때 인간의 시선이나 생각을 가로막는 인위적인 장애물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막에서 인간의 명상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인간은 절대적인 나약함 속에서 절대 자연의 무한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만 듭니다. p263


좋은 기억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결국 제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 지금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해서 나쁜 기억을 품고  가기보다 차라리 그냥 하고 싶은 것을 충실히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p266



하고 싶은 걸 하게 되는 나이도 있다.

그때는 몰랐던 것을 알게되는 순간도 있다.

모든 게 다 때가 있는건지

아니면 내 인식이 거기에 가 닿아서 가능한 건지

여러 복합적인 상황이 어울려서 일어나는 일들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살아있다는 건 희망이고

희망은 꿈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감정이다.


저자는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내일로 미룰 겁니다.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는 문제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힘들어하고 또 힘들어합니다.


한 사람의 책꽂이에 꽂힌 책은 그 사람을 말해주는 단서라고들 합니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 관심이 가고 읽고 싶어서 고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식처럼 책을 꽂아둔 게 아닌 한 그 사람이 읽은 책은 그 사람을 말해주는 아주 좋은 도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것이 있어요. 바로 그 사람의 기본적인 표정입니다. 링컨은 "나이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그 사람의 기본적인 성정과 감정들이 쌓여서 마흔이 되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뜻이에요. 화가 많고 부정적인 사람의 인상과 평소에 잘 웃고 삶이 긍정적인 사람들의 얼굴은 달라요.



"부처님 말씀에 본래 얻고 잃는 것은 없고 잠시 머물뿐" 이라는 했습니다. 불가에서 완전이란 없어요. 진정한 완전이란 완전의 상태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웃고 울 일들이 일어나고 또 지나가고 그렇게 반복해가는 것일 겁니다. "완전이란 이미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 시시가각 새로운 창조다"라는 말은 그래서 생각해볼 만합니다. p275



종결판처럼 부처님 말씀을 가져오셨다.

완전이란 이미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 시시가각 새로운 창조다... 기막힌 해설이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영원으로부터 와서 유한을 살다 영원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영원이 신의 시간이라면 유한은 인간의 시간일 겁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하고, 우리 앞에 놓인 빈 공간을 채워갈 뿐입니다.


그래서 제 희망은 삶이 죽음이라는 선택을 강요할 때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게 저의 최고의 희망입니다.

'희망' 그 자체로 저를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제가 죽음을 마주했울 때 얻은 깨달음입니다. p284




 


책이 있는 구석방만한 곳이 없다는 문장이 생각난다.

잘 읽었다

로마역사 교회의 역사 신.구교의역사

막연했던 것들에 대한 이해 기분이 좋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우리가 소통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가 그 쪽 사람이라는 느낌이나 거부감을 갖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가한다.


여기 저자에 대한 안내가 없었다면 그가 신부인지 바티칸 변호사인지 짐작이 안될 만큼

그의 사고는 유연하다.

성직자라는 신분에 걸 맞는 성정을 갖춘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신부든 승려든 의 인식이 물처럼 유연해서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면 충분히 성직자라는 직함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서회를 통해서 좋은 책을 일고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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