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미에서 침묵은 - 특히 명상의 침묵은 - 현재, 과거, 미래를 하나로 만든다.
피카르트의 모든 명상적인 활동은 일종의 '존재의 전체성'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전체성은 오늘날 기술의 진보뿐만 아니라
기술을 맹목적인 도구로만 삼는 사람들의 힘의 의지에 의해서도 위협받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찬양하는 침묵은 '일체의 지성을 초월하는 평화'
바로 그것이다.
- 가브리엘 마르셀
위문장은 저자 피카르트의 '침묵'에 대하여 마르셀이 쓴 문장의 일부다.
독서회에서 읽고 토론한 책이다.
저자는 1888년 독일 태생으로 의사였고
만년에 문필활동을 하다가 1965년에 영면했다.
어려운 책을 취하는 방법은
내게 읽히는 문장들만 읽는 것이다.
그러면 스트레스도 덜 받고 끝까지 읽을 수 있다.
저자의 견해가 나와 다르거나 어렵다면
아하 내가 아직 못 미쳐서 그렇구나 생각하면 편하다..
빛났던 문장들 올려본다.
.
말과 침묵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말은 침묵에 관하여 알고 있고
마찬가지로 침묵은 말에 관해 알고 있다.
법정 스님 생전 수도없이 강조했던 '말과 침묵'이 생각나는 문장이다.
내가 사회초년생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접한 것이 '무소유'였고
그 책은 스님의 다른 책 '말과 침묵'으로 이어졌고,
이어 스님의 신간이 나오 때마다 책을 사보게 되었다.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고
스님의 문장은 생애 지침같이 차곡차곡 나를 채워주었다.
세상에 현명하고 지혜로운 이가 많은 건
살맛나는 일이라는 걸 그 시절 책을 통해 알았다.
풍요로운 사고의 영역을 들여다 보는 기쁨
책이 주는 기쁨이기도 하다.
침묵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침묵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완전하게 현존하며 자신이 나타나는 공간을 언제나 완전하게 가득 채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침묵
관계에서도 그런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바라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
바라고 주기도 하고, 바라지 않고 주기도 한다.
바라지 않고 주다가, 다시 바라기도 한다.
그것이 선의에 의해서였더라도
은연중 내안에 기대감이 싹 트는걸 보게 된다
그러면 기막히게도 곧바로 채워지지 않는 기대감은 서운함으로 바뀐다.
어떤 서운함은 어떤 기대감과 같은 것이다.
그건 내 마음의 문제이지 상대의 문제가 아니다.
.
그럴 때 마다 그 기대감이 변신한 그 서운함이라는 싹을 뽑을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고 행복해지는 비결이라는 걸 잊지말아야 한다.
침묵은 시간 속에서 발전하거나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침묵 속에서 성장한다.
마치 시간이라는 씨앗이 침묵 속에 뿌려져 침묵 속에서 싹들 튀우는 것 같다.
침묵은 시간이 성숙하게 될 토양이다.
침묵하는 시간이 싹을 튀우고.
성숙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든다는 문장
우리가 침묵할 수 있다면
침묵할 수 있는 데까지 침묵할 수 있다면
성숙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말이 나를 가로막고
나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침묵만 못한 것임에 틀림없으므로.
침묵으로부터 발생하는 말은 그 이전에 선행한 침묵을 통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정신이지만,
침묵이 말에 선행했다는 것이 바로 정신이 창조적인 작용을 한다는 표시이다.
즉 말을 배태한 침묵으로부터 정신이 끌어오는 것이다.
말을 배태한 침묵, 침묵은 말에 선행되지만
말을 통해 드러나므로 말 이전에는 의미가 없겠다.
.
음악은 영혼이 불안감 없이 있을 수 있는 어떤 넓이를 영혼에게 가져다 준다.
근래에 읽은 문장중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같다.
영혼의 지평이 넓어진다고 하면 이상한 표현이 될까.
불안감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음악의 위대함이라니.
법정스님은
"음과 음 사이에 침묵이 없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스님도 이 책을 생전에 읽었으리라는 짐작이 가는 문장이다.
침묵은 말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게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침묵이 언어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침묵, 즉 말없는 침묵의 세계란 다만 창조 이전의 것일 뿐이다.
창조 이전의 침묵이란
본래 본바닥,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것이 가능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우주가 우주로 존재하는 상태
인간은 생명을 부여받고 사는 동안 잠시 잊는 세상.
자기만의 세상을 사느라,
그래서 여기서 창조이전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인간을 기준한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바다의 부피가 육지의 부피보다 더 큰 것처럼.
침묵의 부피가 언어의 부피보다 더 크다.
그러나 육지가 바다보다 더 큰 존재의 힘을 가지고 있듯이.
바다보다 더 큰 존재성을 가지고 있듯이,
언어는 침묵보다 더 강하다.
언어는 어떤 더 센 존재의 강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말이전 침묵은 말로 인해 생명을 부여받는 셈이다.
언어는 침묵보다 강하다...
언어가 되어버린 침묵(언어와 언어사이의 침묵) 언어보다 강할 때가 많다.
말은 침묵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말을 통해서 진리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말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짧다.
그것은 다만 침묵 속의 한틈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침묵 속에도 미가 있다. 미는 일차적으로 침묵 속에 존재한다.
침묵에 미가 없다고 한다면. 침묵은 자신의 무게로 인해서 다시 가라앉아버릴 것이며,
마땅히 지상이 밝음 속에 있어야할 많은 것들을 끌고서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미는 침묵을 느슨하고 유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침묵 또한 지상의 밝음의 일부가 된다.
미는 침묵에서 지하적인 요소들을 빼앗고,
미는 침묵을 지상의 빛 속으로, 인간에게로 끌어올린다.
침묵 위에 누워 있는 미의 광휘는 진리의 말에 깃들어 있는 광휘의 전조이다.
침묵은 말에게는 자연이며 휴식이며 황야이다.
말은 침묵에게서 활기를 얻고, 말 자신으로 인해서 생긴 황폐를 침묵으로 정화시킨다.
침묵 속에서 말은 숨을 죽이고 자신을 다시금 원초성으로 가득 채운다.
소리 내어 말해지는 모든 것들이 이미 이전에 언젠가 침묵 속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보인다.
말로 인해서 생긴 황폐를 침묵으로 정화시킨다는 말이 공감간다.
침묵이 필요할 때 말을 쏟아내고 나면
그뒤에 오는 헛헛함이란. .
침묵으로 채웠어야 옳았다는 생각이 뒤 따라 올 때
그때 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입을 다물 일이다.
인간은 자신이 나왔던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들어갈
또 하나의 침묵의 세계 - 죽음의 세계 - 사이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언어 또한 이 두 침묵의 세게 사이에서 살고 있고,
이 두 세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죽음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를 동격으로 이야기하는 이 문장은
우주의 상태를 애기하는 것 같다.
인간은 잠시 다녀가는 이 세상에서
말과 침묵과 함께 살다가
언젠가 침묵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삶이 말보다 침묵과 함께 할 때
더 자신의 본바닥에서 멀어지지 않고 사는 방법아닐까
.
그렇지만 언어의 위대함이라니. 인류에게 언어가 없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시인들의 언어 속에서만은 이따금씩 침묵과 연결되어 있는 진정한 말이 나타난다.
시의 아름다움은 그러한 말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져버리는 어두운 구름이다,
시인의 언어가 침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침묵을 배경한 언어라야 느껴질 것이다.
.
자신의 내부에 침묵하는 실체가 아직 존재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내부를 살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의지의 도움으로 정돈할 필요가 없다.
서로 대립되는 것을 가라앉히는 침묵하는 실체의 힘에 의해서 많은 것들이 저절로 정돈된다.
그러한 인간은 서로 맞지 않는 여러 가지 특성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위기에 이르지 않을 수 있다.
침묵하는 실체 속에는 서로 대립되는 것들을 위한 충분한 공간이 있는 것이다.
'침묵하는 실체'
침묵의 세계 이책을 읽으며 가장 공감갔던 부분이다.
내 안에 침묵하는 실체가 있다면
내가 살고 있는 내 모습과
내가 드러내지 않지만 분명한 내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드러내는 자신과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을 가지고 산다.
여기서 말하는 '침묵하는 실체'는 침묵에 관점을 둔 문장이다.
그 실체가 없는 이와 있는 이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문장은 잘 표현해내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 나와 대립되는 상황이 생겼을 때
그것을 중재하는 것이 내 안의 침묵하는 실체가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 실체를 늘 인식하고 사는 이는 그렇지 못한 이보다
어떤 이분법적 논리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중재역할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말이 더 이상 침묵과의 연관을 가지지 못하게 되면,
이전에 침묵이 있던 자리에는 공허와 심연이 있게 된다.
말들은 이전에 침묵 속에서 그러했듯이 이제는 그 공허속에서 사라져버린다.
옛 성자들이 고독 속으로 들어가서 마주쳤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침묵의 객관적인 고독이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의 내적 고독은 객관적인 고독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의 현존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날카로운 양자택일 속에서가 아니라
그 중재 속에서 움직인다.
침묵하는 실체가 서로 대립되는 것들 중간에 존재하면서,
그것들이 서로에게 공격적이지 않도록 작용한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 닿으려면 그 드넓고 유화적인 침묵의 평면을 넘어가야만 한다.
그렇게 서로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서 침묵하는 실체가 중재를 한다.
침묵하는 실체는 한 인간의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 변화의 원인은 정신이겠지만, 침묵이 없다면 변화는 실현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변화할 때 인간이 자신의 모든 과거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지나간 것과 새로운것 사이에 침묵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
작은 돌하나가 돌탑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아래 있었다면 눈에도 잘 띄지 않았을 것
그냥 어디 구석에 있던 돌이 꼭대기로 올려졌다
누군가의 손길이 가고
그 돌은 이제 그자리에서 존재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사이도
저 돌탑 위에 올려 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삶이란 도 얼마나 풍요로울까.
모든 당신들!
우주 속의 작은 돌맹이 일지도 모른다
정신의 폭과 침묵의 폭은 서로 속해 있다.
-침묵의 세계(막스 카프르트 )
이 책이 지금도 출판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 서재에서 가장 오래된 책.
책벌레도 살고 있어서 책을 펼칠 때마다 벌레들이 쏟아져 나올것도 같은데
주옥같은 스님의 육성을 듣는 듯한 기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말은 침묵을 배경삼고, 말끝에 오는 침묵은 새로운 뜻을 잉태한다는 문장과
불교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참 잘 씌여져 있어서 불자가 아니어도 지침서로도 알맞은 책이다.
젊은 시절 좋은 양서 한권이 주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좋은 책은
좋은 사람 하나 가까이 두고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은 외로울 여가가 없다.
삶이 팍팍하거나 무언가 찾고 싶다면 책을 보는 것도 좋다.
또한 명상도 좋다.
말문을 잠시 닫아둬보라
그 마음이 얼마나 말로부터 자유로워지는지를 경험할 수 있다.
말뒤에 오는 침묵을 위해서라도
말 이전에 침묵에 조금더 집중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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