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풍은 서쪽으로 부는 바람 아니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하니
그냥 다 서풍만 같다
이파리 뒤에 숨은 열매가 말라가고 있을 때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너는 물었다
마른 덩굴은 끝내 팔을 풀지 않고 생을 마쳤는데
그 안은 비어 있었고
어느 쪽으로도 갈 곳이 있지 않았다
거미는 거미를 사랑하고
벌새는 벌새를 부르고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말라가던 열매가 빨갰는지 어땠는지 너는 다시 물었지만
그 말도 비어 있었다
떠나는 일이야 말로 서쪽이었는데
그토록 아프다 하면서 세계는 변하지 않는 것이지
꽉 낀 팔을 풀어주고
어느 쪽으로 가는지
어느 쪽에서 왔는지
꼭 다문 입술 어두워지는 문밖으로
다만 서풍이라 싶은 것이다
ㅡ이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