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저녁의 문

구름뜰 2022. 2. 7. 23:13

서풍은 서쪽으로 부는 바람 아니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하니

그냥 다 서풍만 같다

이파리 뒤에 숨은 열매가 말라가고 있을 때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너는 물었다

마른 덩굴은 끝내 팔을 풀지 않고 생을 마쳤는데
그 안은 비어 있었고

어느 쪽으로도 갈 곳이 있지 않았다

거미는 거미를 사랑하고
벌새는 벌새를 부르고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말라가던 열매가 빨갰는지 어땠는지 너는 다시 물었지만
그 말도 비어 있었다

떠나는 일이야 말로 서쪽이었는데

그토록 아프다 하면서 세계는 변하지 않는 것이지

꽉 낀 팔을 풀어주고

어느 쪽으로 가는지
어느 쪽에서 왔는지

꼭 다문 입술 어두워지는 문밖으로

다만 서풍이라 싶은 것이다
ㅡ이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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