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
그 아이는 꽃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잿빛 냇물 흐르던 광산마을 모래펄은
은빛으로 눈이 부셨다
강구벌레가 지은 오목한 모래 뻐꾸기 집
파 내려가면 뻐꾸기가 뻐꾹, 하며 나올 것 같다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놀았다
엄마는 안 오고
등에 업힌 어린것이 자꾸 보챘다
후딱, 일어서려는데 아기 허리가 뒤로 젖혀져
넘어갈 뻔하였다
' 이놈의 지지배'
밤부터 아기는 신열이 끓고 아팠다
아기가 뒷산에 동그마니 묻힐 때까지
그 일은 비밀이었다
봄날, 몰래 가 본 무덤에 생겨난 보라 제비꽃
아기는 가냘퍼서 제비꽃이 되었나 보다
자꾸만 납작해지는 기억을 꺼내 들고
엄마를 찾아갔던 날
"아기 수명은 거기까진 게야, 니 탓이 아녀'
엄마는 밤바다처럼 말했다
외로울 때면, 마음 저편에 웅크려 앉은
작은 아이가 보인다
비밀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안 잊히는 일이다
ㅡP18 ~19
* 뻐꾸기는 밤낮없이 저 울고 싶을 때면 운다. 잠이 없는 건지 잠을 못 이루는 겐지. 이른 새벽, 이 시를 읽는 중인데 창밖 산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맏이여서 열살남짓인데도 학교만 다녀오면 엄마는 동생을 내 등에 업혔다. 등에 혹하나 달고는 동무들 따라 산으로 시내로 갈 수도 없었던 내 유년기!
시속 화자와 내 유년이 오버랩되어 왔다.
집뻐꾸기도 울었다.
'비밀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안 잊히는 일이다'
마지막 연에서 위로가 되었다.
엄마가 밤바다처럼 건네준 말,
'아기 수명은 거기까진 게야? 니 탓이 아녀 '
제비꽃 보러 갔던 날,
어리고 여린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는 시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 같은 게 여기에 있다. 상처를 보고, 쓰다듬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일, 시인이 이 블로그를 보거나 구미에 올일이 있다면, 수제비라도 함께 먹고 싶다. 따뜻한 기억 하나 만들고 싶다.
생인손
무명지에 손톱 반달 선명하다
사춘기 시절
열 손가락에 꽃물 들였다
찧은 백반 넣고 잎으로 싸매
한 밤 자고 나니
바알갛게 꽃물 들었다
무명지 하나가 퉁퉁 부었다
몇 날 며칠 앓다가
겨우 잠들었던 밤,
생인손 손톱의 고름이 강물 속으로
시원하게 빠져나가는 꿈을 꾸었다
단잠을 자고 난 아침
할배의 서늘한 눈빛이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개안나, 인제 안 아프제'
손톱이 빠지고 새로 차오르는 동안
작은 손톱 속에도 달이 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지금은 멀쩡해진 무명지 손톱
반쪽, 그 안 보이는 손톱달 그늘 속에
고름 빨아내 주던 극진한 할배가
여전히 살아 계신다
- P28 ~ 29
* 손톱달 그늘 속에 새겨진 할배!
생인손을 할배로 육화시킨 정서에 경의를 표할뿐이다.
작은 위로
마늘 캐러 올라간 옥상 텃밭에
채송화 두어 포기 뿌리 뽑혀 드러누웠다
마늘밭 채송화는 천덕꾸러기
가녀린 목숨 데려와
살피화단에 옮겨 심었다
한 번 시들었던 생이 다시 살아나기엔
또 다른 사랑의 손이 필요해지는 것
물 주고 기다려본다
백세를 넘긴 이산 할매 치매 병상을
농사짓는 칠순 아들 내외가
오며 가며 지켜드렸다
지치고 힘들어 요양원에 모셔두었는데
밤사이 덜컥, 먼 길 떠나가시고
아무도 배웅하지 못했다
조의 문자가 도착한 아침,
꽃분홍 채송화 활짝 피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대단할 것도 없지만
채송화, 너의 마지막 가는 길은
내가 지켜봐 주마
ㅡ P 60 ~61
*시집 제호로 선택된 작품이다
작년 대구문학에 등단된 작품이기도 하다.
도다리 쑥국 먹던 날
봄날, 도다리 쑥국을 먹었다
뽀얀 국물 속에 보드레한 애쑥이 한가득이다
도톰 쫄깃한 도다리 살 떠먹으며
맛있네 시원하네 말 섞는다
바다에서만 놀던 도다리와
산기슭 어디쯤 살던 쑥이 만나
서로 살리는 맛을 내기도 한다
한 대접 도다리쑥국만도 못한 세상
산이 자꾸 불 지른다
ㅡP 88
* 도다리쑥국을 우려낸 시선, 맛나다.
개인적으로 해안가 어디쯤 나는 쑥도 아니고 봄이면 쑥이 지천인데 왜 그 계절이면 도다리쑥국이 회자되는지 그런 생각은 했었다. 미식가들이 찾아낸 기막힌 시절인연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마도 둘의 인연은 제철이라는 타이밍아닐런지.
인연이 만났으니 어우러질밖에.....
* 시인만의 시선으로 풀어낸 시들
이 시집에는 60여 편의 시가 실려있다.
어릴 적 옛집 울밑에 채송화 봉숭아 보듯 함께 노닐어 본 느낌이다.
"엄마보다 연배이신데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
시집을 선물받은 아들의 소회와 함께 시가 내게로 왔다.
작년에 '대구문학' 등단하셨을 때도 출품 작 5편과 육필 편지를 아들 편으로 보내주시더니, 근 1년 만에 시집이 나왔다. 봄날 새싹 못잖은 에너지를 갖고 계신 게 아닌지.
이런 시절인연이 있는 것도 복이다
건필하시고 건강하시길 두 손 모읍니다.
'책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소회 (0) | 2024.10.12 |
---|---|
사랑의 다른 이름 (0) | 2023.09.26 |
체호프 단편선 / 내기 (0) | 2023.02.18 |
마음혁명 / 김형효 (0) | 2023.01.28 |
최진석 - 북토크에 다녀오다 (1) | 2023.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