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문득 체호프 단편 '내기'가 생각났다. 12년 전에 읽고 서재에 꽂아둔 이 책이 왜 보고 싶어 졌는지는 모르겠다. 니체를 보다가 생각하다가..... 읽어 본 단편 중 임팩이 가장 컸던 책.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에 좋은 책,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체호프 단편선에는 열 편이 실려 있다 '내기'는 그중 여덟 번째 이야기다.
도입부 시점은 늙은 은행가가 십오 년 전 그날을 회상하며 들어간다. 십오 년 전 그는 젊었고 부자였다. 자신이 주재한 파티장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오갔다. 사형과 종신형에 관한 열띤 토론이었는데 은행가는 당당하게 자신의 주관을 밝혔다.
"사형이 종신형보다 더 윤리적이고 인간적이라고 봅니다. 사형은 단번에 죽이지만 종신형은 천천히 죽이는 거죠"
파티장소에 있던 스물다섯 살 젊은 변호사가 반론을 제기했다
"사형도 종신형도 비윤리적이지만 저는 후자가 낫다고 봅니다. 어찌 됐던 사는 게 아예 없어지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요."
은행가는 변호사의 반론에 화가 났다.
"당신이 독방에 오 년 동안 들어갈 수 있다면 이백만 루블을 주겠소"
" 그게 만약 진담이라면 오 년 아니라 십오 년을 조건으로 내기에 응하겠소"
은행가와 변호사의 황당한 내기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 젊은이에겐 돈이 필요했겠고 은행가는 아마도 돈이 주는 권태와 오만에 익숙해져 있었으리라.
은행가의 집 정원 바깥채에 변호사는 감금되었다. 십오 년 동안 문턱을 넘어서도 사람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편지나 신문을 받아 볼 권리도 박탈하는 조건이었다.
가능한 건 술 담배 악기나 책뿐이었다. 외부세게로 통하는 작은 창문이 있었고 그곳은 대화가 아니라 메모지로 필요한 걸 요구하는 창구일 뿐이었다.
변호사는 1870년 12월 24일부터 1885년 12월 24일 12시까지 감금, 변호사가 기한을 마지막 1분이라도 못 채우면 은행가는 돈을 지불할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증서를 남겼다.
감금 첫해 변호사는 간간히 음악을 들었고 연애소설 탐정소설 코미디물 공상과학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두 번째 해부터는 음악도 듣지 않고 고전 서적이 필요하다는 요구사항이 있었다
오 년째 되던 해는 음악 소리가 다시 들리고 마시지 않던 술을 부탁했다. 가끔 신경질적이며 혼잣말도 했다. 이따금 글을 쓰기도 했지만 날이 새면 찢고 책은 읽지 않았다고 한다.
육 년 반이 되었을 때, 외국어와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너무도 탐욕스럽게 공부해서 은행가는 책을 대주기가 벅찰 정도였다. 사 년 동안 요구한 책이 육백 여 권에 달했다.
어느 날 은행가는 편지를 받았다.
<친애하는 간수님! 당신에게 이 문장을 여섯 개의 언어로 쓰겠습니다. 이것을 전문가들에게 보여주고 읽어보라고 하세요. 만약에 그들이 틀린 곳을 한 군데도 찾아내지 못할 경우에는 간청하건대 사람을 시켜 정원에서 총을 한발 쏘도록 해주세요. 그 총소리는 나의 노력이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나에게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온 세상의 천재들이 수천 년에 걸쳐서 다양한 언어로 진리를 말했지만 그들 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 내가 이들을 이해할 수 있음으로써 내 영혼이 누리는 천사의 행복을 당신이 알기나 할까요?>
수인의 요구는 이루어졌고 은행가는 두 번이나 총을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십 년이 되던 해는 복음서만 읽었다. 두껍지도 않은 복음서를 읽는데 그는 일 년을 허비했다.
그 뒤로는 종교와 신학서적들이었다. 유폐 후 마지막 이년 동안은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의 독서열은 바다 위에 널린 난파선의 잔해들에 매달리듯이 아무것에나 매달리는 한 인간을 연상시켰다.
그렇게 십오 년이 흘렀다. 현재 시점이다. 내일 낮 열두 시면 변호사는 자유를 얻는다. 약속대로 이백만 루블을 주어야 하지만 늙은 은행가는 그 돈을 주면 파산한다.
십오 년 전만 해도 부자였는데 주식과 도박이나 다름없는 투기에 열정이 식지 않았던 탓에 지금은 은행금리에도 부들부들 떠는 이류 은행가가 되어 있었다.
'망할 놈의 내기야!'
<은행가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부도와 파산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흔이 된 저 인간이 죽어주는 것뿐인데...>
새벽 세시 모두 잠든 밤. 십오 년 동안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문의 열쇠를 금고에서 꺼내 들고 그는 바깥채로 갔다.
방 안에는 촛불이 어슴프레 타고 있었다. 수인은 꼼짝하지 않았다. 좁은 감금생활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은행가는 문에서 봉인을 뜯어내고 열쇠를 집어넣었다. 녹슨 자물쇠 소리는 쉰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앞에는 살가죽을 입혀 놓은 여자처럼 치렁한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벌써 새치가 드문드문했다 마흔 살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았다. 그는 앉은 채 자고 있었다.
고개 숙인 그 앞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고 무언가 씌어 있었다.
<이 산송장을 침대에 던져 놓고 베개로 가볍게 덮어서 누르면 되는 거야. 천하의 전문가라도 피살 흔적을 찾아내지는 못할걸. 하지만 우선 이자가 여기에 뭐라고 썼나 읽어볼까>
<나는 내일 열두 시에 자유를 얻고 사람들과 교류할 권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방을 떠나 태양을 보기에 앞서 나는 그대들에게 몇 마디 해줄 필요를 느낀다. 순수한 양심에 따라,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신 앞에 맹세코 나는 자유와 생명과 건강을, 그리고 그대들의 책 속에서 지상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을 경멸한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중략
그대들의 책 속에서 나는 바닥모를 심연에 몸을 던지기도 했으며, 기적을 창조하고, 살인을 하고, 도시를 불태우고, 새로운 종교를 설파하고 완전한 왕국을 정복하기도 했다......
그대들의 책은 나에게 지혜를 가져다주었다.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사고 능력으로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해 낸 모든 것들이 나의 두개골 속에서 작은 언덕으로 쌓였다. 내가 그대들 누구보다도 현명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또한 나는 그대들의 모든 책을 경멸한다. 이 세상의 모든 행복과 지혜를 경멸한다. 그 모두가 시시하고 무상하며, 신기루처럼 공허하고 기만적인 것이다. 그대들이 아무리 오만하고 현명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죽음은 그대들을 마루밑의 쥐새끼들처럼 지상에서 쓸어버릴 것이다.
그대들은 분별을 잃고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만약에 사과나무나 오렌지나무에 무슨 일이 생겨 열매 대신에 개구리나 도마뱀이 열리게 된다면, 혹은 장미꽃이 말의 땀 냄새를 풍기게 된다면, 그대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하늘을 땅으로 바꾸어버린 그대들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대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한때 천국을 꿈꾸듯 갈망했으나 이제는 하찮게 보이는 이백만 루블을 거부하겠다. 그 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당하기 위해 나는 약속한 기한이 다 되기 다섯 시간 전에
여기에서 나갈 것이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계약을 위반하는 바이다......>
(**이 책의 주제가 담긴 문장이다.
삶의 방식에 경멸을 표하기 위해 한 때는 욕망의 전부였으나 지금은 하찮아진 것을 스스로 거부하는 용기...
이 부분에서 나는 이 글을 쓰며 내가 왜 니체를 읽다가 이 책을 뽑아 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날마다 오늘의 나를 극복해 가는, 어제의 내가 아닌 향상성으로 나아가는... 초인을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편지를 다 읽은 은행가는 책상 위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 기인의 머리에 입 맞춘 뒤에 눈물을 떨구며 바깥채를 나섰다.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괴감을, 심지어 주식투기에서 거액의 돈을 날렸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극심한 자기혐오를 그는 느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지만 흥분과 눈물 때문에 오래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경비원이 와서 보고했다. 남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고. 은행가는 죄수가 탈옥했음을 확인했고, 불필요한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책상 위에서 포기의 의사를 담은 종이를 자기 방으로 가져와 금고 속에 넣고 문을 잠갔다.
** 늙은 은행가는 초인에 대비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니체는 욕망에만 만족하는 사람을 말인 이라고 했다. '노예'는 자기 생각이 없고 남의 생각과 같아지는 게 목표다. 즉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 가 중요한 사람을 이른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두 발로 우뚝 서는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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