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사 583

기도

오른손과 왼손을 밀착시킨다. 공기 한 톨 들어갈 수 없게 완전히 밀착시킨다. 손에 쥔 게, 또 쥐려 하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신에게 보여드린다. 욕심 다 버렸음을 확인시켜드린 후, 욕심이 아닌 척하는 욕심 하나를 털어놓는다. 『사람사전』은 ‘기도’를 이렇게 풀었다. 기도는 어떻게 해달라고 비는 행위다. 세 글자로 표현하면 ‘주세요’가 기도다. 합격하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이 땅에 사랑과 평화를 주세요. 즉, 아주 경건한 표정으로 한껏 욕심을 부리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행위가 기도다. 신은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준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도나도 성경 옆구리에 끼고 예배당을 찾는 거겠지. 그러나 아무리 너그러운 신도 모든 욕심을 다 들어주지는 않겠지. 쩨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에게..

좋은 기사 2020.08.27

올여름 최고의 피서는

어디론가 멀리 가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하니 기다렸다는 듯 너도나도 공감의 반응을 보인다. 마음 맞는 이들과 미지의 곳으로 가보자는 모의는 공염불이라도 즐겁다. 올해는 여러 이유로 피서에 대한 열기가 실종되었지만 그래도 여름은 떠나야 제맛인 계절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 멀리 한번 다녀와 보면 어떨까. 저기 멀리 우주라면. 좁은 의미의 우주는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 밖 지상 118㎞ 높이 이상의 공간이다. 멀리는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와 이웃한, 빛의 속도로 250만 년이 걸리는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가늠해볼 수 있으나 우주에는 1천억 개가 넘는 별을 가진 은하가 1천억 개도 넘게 있으니 넓은 의미에서 우주는 헤아릴 수 없다. 지상 400㎞ 높이는 어떨까. 그곳에는 시속 2만8천㎞의 속도로 90분마다..

좋은 기사 2020.08.12

'명예'를 생각할 시간

고인이 된 서울 시장과 백 장군 명예에 관한 화두 남기고 떠나 악다구니·정쟁 잠시 접어두고 명예와 품격 학습기회 삼아야 껌뻑이던 전구가 켜진 느낌이었다. 사람에겐 결국 이름만 남는다는 것. 죽음까지 함께 가는 것은 ‘명예’뿐이라는, 이렇게나 간명하고도 당연한 이치가 새삼 머릿속을 밝혔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고 백선엽 장군. 두 거물급 인사의 부고를 동시에 접하고서다. 한 사람은 인권변호사에서 서울시장이 된 정치인으로, 또 한 사람은 6·25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그들. 살았을 때 영예로웠고, 현대사에 남긴 족적도 확실한 인물들이다. 하나 지난 주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전해진 두 분의 부고 앞에서 우리 사회는 또 한 번 쫙 갈라졌다. 사연이야 많지만 결국은 ‘명예’ 논란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좋은 기사 2020.07.19

맑은 복을 생각하며

물건들에 휩싸인 삶 돌아보게 돼 영혼을 받쳐주는 것은 무엇일까 맑은 가난과 신성한 삶이 아닐지 “제가 산중에서 혼자 지내면서도 기가 죽지 않고 나날이 새로워지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뒤에서 내 자신을 받쳐주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가.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출출하거나 무료해지려고 할 때 마시는 차가 있습니다. 딱딱하고 굳어지려는 삶에 탄력을 주는 음악이 있습니다. 내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이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삶을 녹슬지 않게 받쳐주고 있는, 맑은 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법정 스님이 생전에 하신 법문이다. 요즘 나는 이 말씀을 틈나는 대로 거듭해서 들으면서 내가 가진 맑은 복에 대해 생..

좋은 기사 2020.07.15

대상화

성(性) 관련 사건에는 ‘대상화’(對象化)라는 용어가 자주 따라붙는다. ‘성적’(性的)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성적 대상화’라는 용어가 익숙한 이유다. 이는 대상화 가운데 큰 비중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대상화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다음 두 설명이 나온다. ‘어떠한 사물을 일정한 의미를 가진 인식의 대상이 되게 함’, 또 ‘자기의 주관 안에 있는 것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하여 밖에 있는 것으로 다룸’이다. 풀이가 모호해 머릿속 개념마저 뭉개지는 느낌이다. 대상화를 설명할 때 많이 인용되는 게 미국 시카고대 교수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73)이 1995년 계간지 ‘철학과 사회 문제’(Philosophy & Public Affairs) 가을호에 기고한 논문이다. 제목까지 ‘대상화’(Objectificati..

좋은 기사 2020.07.07

`글 잘쓰는 법, 그딴 건 없지만` 문장으로 읽는 책

누군가가 말했다. 글을 쓰는 일은 인간 최후의 직업이라고. 사형수도 옥중에서 글을 써 책을 낸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독과 마주하기 위한 ‘도박’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삶의 방식의 문제다. 자신을 위해 쓰면 된다. 읽고 싶은 글을 쓰면 된다. 다나카 히로노부 『글 잘 쓰는 법, 그딴 건 없지만』 퀜틴 타란티노 감독도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타인의 평가나 인정 욕구, 혹은 유명해지기 위해 하는 창작이란 백전백패라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작가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사람을 자주 보는데, 긴 글을 쓰는 것은 노력에 비해 수지가 맞지 않는다. … 자신이 쓴 글을 읽고 기뻐하는 사람은 우선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카피라이..

좋은 기사 2020.06.16

불편 / 불평 / 불행

불편: 견딜 수 있는 것. 불평: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불행: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이 견뎌야 하는 것. 『사람사전』은 ‘불편, 불평, 불행’ 세 단어를 이렇게 풀었다. 불편이 불행으로 번지는 과정을 이렇게 추적했다.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면 결국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 마스크는 불편하다. 춤과 노래로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는 불금도 불편하다. 예배당 밖에서 기도해야 하는 주말도 불편하다. 선생님이 모니터 속으로 들어간 풍경도 불편하고, 학생들이 주먹으로 악수하는 모습도 불편하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이런 낯선 불편을 강요했다. 우리는 견뎠다.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며 잘 견뎠다. 불편이 곧 끝날 것처럼 보였다. 하루라도 더 빨리 불편에서 빠..

좋은 기사 2020.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