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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편지

40여 년 전 내 글씨는 그 시절 내가 받았던 동무 글씨체와 닮아있있다편지를 기다리고답장을 보내고 또 기다리고그때 우리가 나눈 건 기다림의 시간뿐이었는지도모른다동무네 집이 새집으로 바뀐 지도 오래이 편지는 어디에 두었다가 입주를 한 건지그 남자네 집은길로 접한 담이 길고 높아서담구멍이 눈높이로 들 때서야꽃이 많은 집인걸 알 수 있었는데사람으로 나기 어렵고 불법 인연 만나기 어렵다는데바뀌지 않을 것 같지만물길이 바뀌는 계기도 있다서방정토 극락세계는미래의 공간 아니라 오늘을 사는 일체유심조의 개념 아닐까고향이 동향인건 인연이리라어머니의 어머니같이

사람향기 2024.07.24

복숭아 두박스

"폭삭 망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 친정에 복숭아 따러간다던 요가원 막내가 전해준 과수원 안부 하늘은 마음이 있기는 한지 작년엔 1000박스를 수확했다는데 폭염에 수시로 호우특보가 내리고 200년 만이라는 강수기록도 있다 약을 치면 비가 오고 또 치면 또 씻어 내리고 탄저균은 전염병처럼 걸리면 초토화시킨다고 옆 과수원도 함께 약을 쳐야 한다고 과수원이 모래성도 아니고 에멜무지로 하는 일도 아닌데 "아버지께서 그냥 먹으래요" 이게 다라는데 그냥이 안되는데 그냥 아니면 되가져갈 거라는 막내 복숭아가 복숭아가 아니고 먹는 일이 먹는 일만은 아니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봄에 꽃 따러 가고 열매 추슬러갔던 밭 꽃송이 송이마다 눈길 손길 안간 곳이 없는데 이틀만에 폭삭할수도 있다는 걸 상상으로도 가능한 ..

사람향기 2024.07.17

금오산 아침풍경

구미에도 밤새 비가 많이 내렸다 장맛비가 야행성 인지 밤마다 산은 몸서리를 친다 비가 다녀간 흔적은 유리창마다 수채화를 남기고 금오산 아침풍경은 마지막 인사처럼 운무가 걷히고 있다 상쾌하다 외로움이나 고독같은 건 지그시 지구력 있게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과목이다 사진은 되새기고 싶은 그리움이기도 하고 지녀낸 고독을 격려이기도 하다 혼자서도 족한 날들에 습기(習氣)가 든 것 같다 아침이면 지난밤은 추억이 되고 지나온 시간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 아니었기에 공기까지 샤워한 것 같은 지금이 가능하리라 호흡처럼 상큼하게 만들어볼 오늘이다

사람향기 2024.07.10

작은 위로 / 권미자

경자 그 아이는 꽃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잿빛 냇물 흐르던 광산마을 모래펄은 은빛으로 눈이 부셨다 강구벌레가 지은 오목한 모래 뻐꾸기 집 파 내려가면 뻐꾸기가 뻐꾹, 하며 나올 것 같다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놀았다 엄마는 안 오고 등에 업힌 어린것이 자꾸 보챘다 후딱, 일어서려는데 아기 허리가 뒤로 젖혀져 넘어갈 뻔하였다 ' 이놈의 지지배' 밤부터 아기는 신열이 끓고 아팠다 아기가 뒷산에 동그마니 묻힐 때까지 그 일은 비밀이었다 봄날, 몰래 가 본 무덤에 생겨난 보라 제비꽃 아기는 가냘퍼서 제비꽃이 되었나 보다 자꾸만 납작해지는 기억을 꺼내 들고 엄마를 찾아갔던 날 "아기 수명은 거기까진 게야, 니 탓이 아녀' 엄마는 밤바다처럼 말했다 외로울 때면, 마음 저편에 웅크려 앉은 작은 아이가 보인다 비밀은..

책향기 2024.06.07

오늘의 약속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나간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ㅡ나태주

시와 수필 2024.03.12

홍매화 겨울나기

그해 겨울 유배 가던 당신이 잠시 바라본 홍매화 흙 있다고 물 있다고 아무 데나 막 피는 게 아니라 전라도 구례 땅 화엄사 마당에만 핀다고 하는데 대웅전 비로자나불 봐야 뿌리를 내린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 데나 막 몸을 부린 것 같아 그때 당신이 한겨울 홍매화 가지 어루만지며 뭐라고 하셨는지 따뜻한 햇살 내린다고 단비 적신다고 아무 데나 제 속내 보이지 않는다는데 꽃만 피었다 갈 뿐 열매 같은 것은 맺을 생각도 않는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 데나 내 알몸 다 보여주고 온 것 같아 매화 한 떨기가 알아 버린 육체의 경지를 나 이렇게 오래 더러워졌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같아 수많은 잎 매달고 언제까지 무성해지려는 나, 열매 맺지 않으려고 잎 나기도 전에 꽃부터 피워 올리는 홍매화 겨울나기를 따라잡을 수 없..

시와 수필 2024.02.29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 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고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

시와 수필 2024.01.03

그런 사람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은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의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직한 사람 좋아하는 것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어느 길을 가든 자신 안으로도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 내어 주는 사람 아직 그래 본 적 없지만 새알을 품을 수 있는 사람 하나의 얼굴 찾아서 지상에 많은 발자국 낸 사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자신에게 너무 작다는 걸 아는 사람 어디에 있든 자신 안의 고요 잃지 않는..

시와 수필 2024.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