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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녀 개인전

겨울과 겨울사이"그냥 겨울을 담았다고 보면 될 거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저 '사이'라는 단어가 좋다너와 나 사이나와 나 사이가을과 겨울 사이3시에서 4시 사이사이는 새로운 사이를 더하는 것 같이."멀어서 오라는 건 아니고 보고차원"이라고 했지만 그녀 그림은 무척 궁금하다. 국회라 신분증 필요하다고.장소 국회아트갤러리의원회관 3층25년 2월 17일 ~ 2월 28일

섣달그믐

눈이 많이 내렸다옛날에 이날은 설빔을 머리맡에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설날 신새벽엔 엄마가 떡국을 끓여서 한복을 입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새배를 갔었다육촌오빠였던 지금은 고인이 된 봉이오빠와 철이는 잠도 안잤나 싶게 우리는 아직 이불속인데도 여명처럼 새배를 왔었다 언제나.집성촌이라 우리 할아버지의 형인 큰 할아버지가 계셨고 큰할머니는 두 분이어서 새배 갈 곳이 서열따라 한두 곳이 아니었다 세뱃돈은 백 원이면 족했다.그 시절 최고의 날이었다 명절은핵가족으로 홀쭉해진 섣달그믐날은 차고 바람도 거센데 일없이 옛 생각에 잠긴다. 돌아보니 옛날은 지나은 역 같은 것이어서인지 곳마다 때마다 좋았다.

사람향기 2025.01.28

화살과 노래

나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화살은 땅에 떨어져 간 곳이 없었다.빠르게 날아가는 화살의 자취누가 그 빠름을 따라갈 수 있었으랴.나는 허공을 향해 노래를 불렀으나노래는 땅에 떨어져 간 곳이 없었다.누가 날카롭고도 밝은 눈이 있어날아가는 그 노래 따라갈 수 있었으랴.세월이 흐른 뒤 고향의 뒷동산 참나무그 화살 부러지지 않은 채 꽂혀 있었다.나의 노래 처음부터 마지막 구절까지친구의 가슴속에 숨어 있었다.ㅡ 롱펠로우

시와 수필 2025.01.18

엄동설한이 되어서야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른지 안다’는 말이 있다어려울 때라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게 되는 인간사를 두고 한 비유다고향동무가 건강이 좋지 않다공부를 잘했던 친구 영민했으므로 기억이나 운동신경에 관련된 병에 걸릴 줄은 짐작도 안 되는 일이다어떤 일은 일어난 뒤에야 깨닫는다아무 일 없는 일상이 최선이었구나라고.지금 불행하지 않다면 좋은 때 아닐까!'군자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당파를 이루지 않고소인은 당파를 이루면서.여러 사람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모두 논어 얘기다지혜로운 문장을 보는 반가움은 독서의 즐거움이다해거름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겨울나무들이 선명해지고산의 핏줄들 생기를 찾는듯하다여럿이 어울려도 당파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 즉 군자의 모습에서 삶은 태도나 가치관을 ..

사람향기 2025.01.08

0546 예인회

글쟁이들은 동인지를 내고그림쟁이들은 전시회를 가지는 12월이다열심히 쓰고 그린 이들은 이맘때 뿌듯하고설렁설렁 지내온 이들은 옹색해질 수도 있는 때다.그림도 글도 작가의 한 부분.작품을 통해 거듭나고 깊어지며 또 나아갈 것이다.그리고 또 그렸을 눈길 손길 마음길까지 결결한 색의 향연이다그녀의 수국을 처음 본 건 한 5년 전쯤 일게다수국과 잘 어울리는 그녀오늘도 수국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간 걸음이기도 했다.대작 '수국 2' 우측 화면의 명암은 경이로웠고 황홀경이었다. 여기(구미 새마을테마공원 1층전시실)에 원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대작 태극기아래 그녀의 색들이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수국 앞에서 한참을 머물다 왔다.방명록은 마지막 한 장이 남아있었다.생각나는 대로 순간의 감정을 몇 글자 적..

사람향기 2024.12.14

비 아니고 눈

창틀에 쌓인 눈이 제법 두둑한 찻집산은 다정했고 커피는 넉넉하였다남쪽은 눈 온 흔적도 없는데영등포행 ktx는 설국열차 같았다어떤 일은비라고 해놓고 눈이 오는 일처럼 반갑기도 하다어릴 적 잠에서 깨 여닫이 문을 열었을 때마당도 앞집 지붕도 하얗게 덮여있는 일이란 얼마나 눈부셨던가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눈 내리는 바깥풍경 속에서 자신에게로 오고 있을 나타샤를 기다리며 세상에 지는 건 아니고 더러워서 떠나는 것이라고 객기를 부렸다..눈이 오는 건 자신이 나타샤를 사랑하여서라고눈 쌓인 산을 곁에 둔 일도 명작 같은 커피도 잠깐 멈추다 가는 시간 같기도 하였다.시간이 멈출리야 없지만흐르지 않아도 되는 일같이따뜻한 커피를 탐하는 시간찻집에 유독 사람이 많은 건어쩌면 서로를 흠향하는 일과 닮아있기 ..

사람향기 2024.12.01

김장

겨울 길목 과제는 김장이다. 습관 덕분에 사 먹을 생각은 않고 해 오던 대로 하는 편이다11월 중순을 지나면 김장에 필요한 생강이나 마늘 젓갈들을 짬 날 때마다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는 배추를 눈여겨보게 된다. 맘에 드는 배추를 만나면 바로 김장 돌입이다.배추 때문에 미적거리고 있었는데 그제 첫눈 오던 날, 올해 첫 농사일터인데 사돈네 텃밭 배추가 아파트까지 왔다.농사지은 걸 받아보는 일이란 그동안의 노고를 알기에 마음을 듬뿍 받는 일이다.이런 건 마음 아니면 흉내내기도 불가다.. 바리바리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게다.좋은 배추란 흰 줄기가 두껍지 않고 속이 노랗고 고신맛이 나면 굿이다. 흰 줄기가 두꺼우면 절이는 정도를 측정하기가 애매하다. 적당히 손맛까지 좋은 한마디로 최상급이다. 배추는 절..

사람향기 2024.11.29

그녀의 꽃다발

스포트라이트가 지고 나서도그 순간을 기억하는 건 눈부신 일이다너의 꽃에게"그것 좀 애매하지"라고말해버린 건 내 실수인데실수도 꽃으로 만드는 재주를그녀는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안 한 건지 못한 건지 몰라도어떤 이야기는 오래 묵은 뒤에야꽃 같은 시간이 오기도 한다시간이 가치를 더할 때 침묵은향기로워진다죽이 잘 맞아서1년 전 꽃 한 송이가 부메랑처럼 다발이 되어 내게로 왔다그녀의 꽃이 내게로 왔다

사람향기 2024.11.13

손을 씻는다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의수를 외투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코리아나 호텔 앞 나는 공범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비누로 손을 씻는다 비누가 나를 씻는 것인지 내가 비누를 씻는 것인지 미끌미끌하다. ㅡ황지우

시와 수필 2024.11.03

겨울 ㅡ나무로부터 봄ㅡ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ㅡ황지우

시와 수필 2024.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