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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虛)의 여유

문으로 들어온 것은 집안의 보배라 생각지 말라"는 말이있다. 바깥 소리에 팔리다 보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바깥의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면 인간 그 자체가 시들어 간다. 오늘 우리들은 어디서나 과밀 속에서 과식하고 있다. 생활의 여백이 없다. 실(實)로써 가득 채우려만 하지, 허(虛)의 여유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삶은 놀라움이요, 신비이다. 인생만이 삶이 아니라 새와 꽃들, 나무와 강물, 별과 바람, 흙과 돌, 이 모두가 삶이다. 우주 전체의 조화가 곧 삶이요. 생명의 신비이다. 삶은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 누가 이런 삶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제도가 이 생명의 신비를 억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루해가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넘어가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시와 수필 2023.12.30

정말 부드럽다는 건

토마토를 구워보면 구울수록 더 부드러워져서는 눈물이 많아져요 구운 토마토를 당신에게 주고 싶어요 이후의 모습들은 저렇게 무른 모습이 좋겠어요 생각들이 뜨거워지고 제 소리를 제가 알지 못하고 당신은 가방을 메고 종일 먼 곳을 헤매니 구운 토마토를 먹으면 눈가가 붉어져서는 문득 오래전 잊고 있던 내용을 돌아다볼 듯해요 제 안의 독소를 빼내주시니 우리, 단단함에 대해 적을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무너지도록 힘쓸 일이 없도록 아침엔 토마토를 구워요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ㅡ 이규리 * '당신을 당신 바깥으로 놓아보아요' 이렇게 부드러운 문장이 또 있을까. 삶의 한계라면 언제나 내 안에서만 사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 아주 잠깐 나를 잊는 시간을 경험할 때 대자유를 경험한다. 그건 대상에 대한 몰입이기도 하..

시와 수필 2023.12.22

안개의 나라

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갯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김광규·시인, 1941-) 피어라 안개 밤마다 뒤척이는 잠의 머리맡에 그대 있어 두물머리에 섰다 남과 북 갈래를 버리고 하나 된 강에 하얗게 물안개 핀다 피어라 안개 뭍과 물 산과 강 경계를 지우고 남과 여 너와 나 분별도 버리고 피어라 피어라 안개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이기도 한 안개의 다른 이름은 스밈 안개가 겹으로 겹으로 피었다 그대에게 ..

시와 수필 2023.12.10

눈온 아침!

거창에 첫눈이 왔나 보다 하늘에서 온 건지 구름에서 온 건지 여하튼 온 거다 어젯밤 눈이 올 때 보내온 사진과 이 아침풍경이 예술이다. 이불홑청은 그대로이고 아침은 이렇게 풍요롭다. 풀 먹인 홑청인지 그대로 둔 마음도 여유겠다. 이런 날 먼 데서 사람이 온다면 문득 정현종의 '방문객'이란 시가 생각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눈이 올 때도 되었고 고향 마을 어제와 다른 풍경이리라. 어릴 적 긴긴 겨울밤, 동무집에 모여 놀다보..

사람향기 2023.11.18

사랑으로 ㅡ With Choir 합창단

어떤 주제든 토론할 때 죽이 잘 맞는 친구가 있다. 그녀가 속한 합창단 창단식이 구미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지난 토요일 저녁 6시에 있었다. 단원이 30대부터 80대까지 폭이 넓다는 단장의 소개가 있었고 첫 곡은 '사랑으로'였다. 내가 아는 이는 친구뿐이어서 그랬는지 내도록 친구만 보였다. 그 먼 데서도 입을 크게 벌리는 모습까지 어쩜 이럴 수 있나 싶게 한 사람만 보였다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어마 어마한 차이다. 안다고 반드시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대로 보려면 알고 볼일이다. 감동으로 왔던 첫곡이 앙코르를 받고 지휘자의 제안으로 객석도 함께 불렀다. 소년 합창단 공연도 있었다. 초등학생 특유의 굵기도 크기도 자유로운 성장기 모습 그 자체로 좋았다. 얼마나 크게 자랄지 알 수 없는 나무..

사람향기 2023.11.13

해거리

그해 가을이 다숩게 익어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 다녀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란 당가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걸이 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발아래를 쳐다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 대지 않았다 땅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 내라 나무야 심 내라 땅심이 들어라 땅심이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어머님은 가을걷이를 마치신 후 감나무 주위를 파고 퇴비를 묻어주며 성호를 그으셨다 꽃과 ..

시와 수필 2023.11.03

고백

좋은 것만 보면 무어든 네 생각이 나고 어여쁜 경치 앞에서도 네 얼굴이 떠올라 어떻게든 너에게 선물하고 싶지만 번번이 그럴 수는 없어 안달하다가 무너져 내리다가 절벽이 되고 산이 되고 끝내는 화닥화닥 불길로 타오르는 꽃나무 이것이 요즘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란다 ㅡ나태주 * 마당을 거닐다가 감나무를 보다가 개망초를 보다가 꽃에 찾아든 벌을 보다가 잠시 꽃이었다가 벌이었다가 밤이 깊었나 보다 옛 달처럼 고향의 밤은 무심하게도 흐르고 풀벌레의 기척은 너인가 싶다가 나인가 싶다가 그렇게 달이 그때처럼 함께였다

시와 수필 2023.10.02

사랑의 다른 이름

**23년 5월에 나온 이규리 시인의 산문집이다. 뵐 때마다 강조하셨던 시학이기에 익숙하지만 경구처럼 새록새록한 문장들이다. '불편의 시학'을 통해 내가 시에 가지게 된 가치관은 내 삶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고정관념에 관한 자각, 삶의 인식의 전환, 불편, 불안, 불리에 대한 인식 등 여기 불편의 시학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손안에 두고 수시로 보기 위해 블로그에 올려본다. 즐감하시길....., '불편'을 이야기할 때면 자꾸 머뭇거리는 마음이 되곤 한다. 불편, 불안, 부족, 이런 단어들은 되도록 기피해야 한다는 오랜 이익주의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글은 그 단어들이 내포한 기운을 간과할 수 없고 숨은 뜻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으로 쓰게 되었다. 통상 누구나 불편보다는 편안을, 부족보다는 만족..

책향기 2023.09.26

택시

내가 행복했던 곳으로 가 주세요 ㅡ박지웅 * 택시를 탄다면 어디로 가고 싶을까!? 부모님 아래서 부모님 영향으로 크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만 살았던 때가 있었고, 경제적 독립으로 홀로서기가 되었다고 생각되었던 때도 있었다. 출가를 하고 30대였던가 아이들을 키우고 그 아이들이 장성해서 대학가로 분가하고 군입대 하고 그때도 그랬다. 이제는 아들들까지 홀로서기한 것 같은 때가 되었건만 그래도 나는 가끔 흔들린다 홀로 흔들린다 꽃에 흔들리고 바람에도 돌아보면 모든 시간은 행복하지 않기도 했고 행복하기도 했다 살아 있었으므로 매 순간 흔들렸다 택시를 탄다면 치아바타 샌드위치가 맛있는 그 카페에 가고 싶다 입이 터지도록 행복한 시간이 될 것 같다 다만 지금은.....,

시와 수필 2023.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