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or 여행 에세이

굼뜰에 다녀오다 2 -경남 거창 웅양

구름뜰 2009. 8. 7. 14:18

고향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곳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고향을 떠나와 본 사람은 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추억과 함께 잠자다가 어느날 문득  추억과 함께 떠오르는

언제라도 가보고 싶은 곳,  열번 백번 가도 정겨운 곳, 고향은 그런 곳이다.

가고 싶은 데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래서 향수병이란 것도  생긴 것일게다. 

 

 

오촌 당숙께서 암투병 하신지가 오래 되었는데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예상하고 있던 터라 그리 놀랄일도 아닌데다

상가집 가는 길이 내겐 고향가는 길 인지라 고인에겐 죄스런 일이지만 내심 반가운 나들이였다.  

 

 

하루를 상가집 나들이로 쓸 생각을 하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어제부터 휴가인 동생네는 거창 시숙댁에서 벌써 1박을 한 터라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가는 길에 그동안 한번도 들러 보지 못했던 모교 웅양중학교를 꼭 들러 볼 요량을 하고

카메라부터 챙겼다. 

상가집 나들이가 이리 반갑고 흥겨워서야 .원..

 

웅양면에 도착해서 대충 짐작으로 학교 들어가는 길이겠거니 하고

우회해서 들어갔는데 잘 못 들어 노현리 가는 길이었다. 

이왕 잘못 든 김에 차를 세워두고 학교 뒷편이지만 운동장이 그대로 들어와서 한 장 찍었다.

 

 

다시 차를 돌려 아래 블럭으로 들어서니 새로 생긴 웅양중학교라는 교문이 반긴다.

예전엔 이쪽 방향이 논 이었던 것 같은데 마을 풍경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교문엘 들어서니 방학이라 학교에는 인적이 없다. 

건물은 30여년 전엔 2층 이었는데 한 층 더 올라 3층 이었다. 

저 건물 2층에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수업을 받았다.

1층엔 교무실이 있었고 그리고 남자애들은 좌측에 건물이 한 동 더 있어

여자애들과 분리해서 반 편성을 했던 기억이 났다.

1반은 남학생 3반은 여학생 2반은 약간 남는 여학생 7-8명 넣어서

합반을 만들었던 것 같다. 나는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3반이었다.

 

 

시골학교라서 그런지 운동장이 역시나 운동장 답게 넓어 좋았다.

 

 

요 사진 좌측 저 하얀 기둥이 그 당시 웅양중학교 정문이었다.

그리고 우측으로 배구장이 있었다. 남자애들이 (아마도 배구부였을 것이다) 방과후에

항상 배구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전부다 키가 큰 장신 들이었다. 

그리고 가끔 선생님이 배구하는 남자애들한데 물 떠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혼자 들기도 힘든 커다란 물 주전자를 들고 물을 떠다 주었던 적이 몇번 있다. 

그 땐 왜  그리 부끄럼이 많았었는지. 

이성에 눈뜨기 시작 하던 사춘기 시절.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이곳이 옛날  교문이다.

전학가던 날 대구로 먼저 이사를 가 있던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었다.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운동장을 걸어 여기 교문까지 나오는데  

운동장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그 때 아마도 미지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감 같은 마음을 함께 가지고 걸어 나왔던 것 같다.

여기를 떠난 다는 아쉬움보다 '대구'라는 시골에서만 살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  

대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친구들이 잘 가라며 창밖으로 손 흔들어 주던 기억도 났다. 

그 때 친했던 친구들 현숙이, 윤희, 영란이, 인숙이, 등 마을친구도 있지만 

정옥이와 정희 그 둘이 먼저 생각이 난다. 

떠나와서도 한참 편지를 주고 받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등교를 하면서 이 교문을 올려다 보면 경사가 꾀 높게 느껴졌었다. 

지형이 변한건지 막상 보니 경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얕다.

저기 교문 왼쪽에 선도부 머스마들이 완장 같은 것을 차고 서서는

두발이나 복장 불량,  명찰 등을 제대로 착용했는지 검사한다고 서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덩치큰 녀석들의 위상 때문에 교문이 더 높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ㅎㅎ

추억속에 앨범사진 처럼 생생히 남아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옛 교문쪽에서 본 현재 교문이다. 

 

 

그리운 곳이었는데 역시 아름다운 풍경이다.

 

 

지금 정문에서 본 양각산 풍경이다.

 

.

 

 웅양면 소재지 풍경이다. 객지에 살면 이런 모습도 그립다.

 

 

동호마을 입구 풍경이다.

유독 노송들이 많았던 기억과 친구 정옥이네 집이 있는 마을이다.

 

 

저 아래 마을이 내 고향마을이다. 우측이 초등학교 교문이다.

이곳까지 걸어서 등교를 했는데 겨울이면 신작로 길이 얼마나 추웠는지..

 

 

 

모교인 웅양초등학교 정문이다.

여기 교문에 얽힌 추억은 운동회와 더불어 많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건 졸업식 날이다.

그날이 오면 교문까지 졸업하는 선배들을 배웅해주는 길을 후배들이 만들어 주었다.

그때 졸업 꽃다발은 목에 거는 둥근 목걸이형 종이꽃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있으면 언니 오빠가 있는 집이나 없는 집이나 겨울저녁에 모여서

종이꽃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통같은 거였다.

목걸이 뼈대는 사철 푸른 사철나무로 둥글게 만들었으며 겨울이어도 사철나무 잎 덕분에

종이꽃만 붙이면 훌륭한 꽃 다발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정성 가득한 꽃 다발을 어릴적부터 졸업을 앞두면 만드는 것을 봐왔고 참여해 만들기도 했었다. 

 

 

고향 마을 초입이다. 오른쪽으로 방앗간이 있다,

지금은 아스콘포장으로 입구가 넓었지만 3-40년 전에는 흙길이었고

마을입구쪽으로 작게 물이 흐르고 있어서 이곳 마을로 들어서는 곳에시멘트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초등학교 1 ~2 학년 때 두살 아래인 동생이 이곳까지 나를 마중 나와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시절에는 학교에서 빵 급식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포장도 되지 않은 빵을  박스채로 가져와서

지금의 옥수수 빵모양처럼 생긴 빵을 한 조각씩 뚝뚝 떼어 급식으로 나눠주었다.

아마도 한 달에 260원 인가 얼마를 내고 받아 먹은 기억이 난다. 

그 빵을 먹지 않고 나는 마을 어귀 이곳까지 나와있는 동생을 생각해 가방에 넣어 왔었다..

그러고 이곳에 마중나와 있는 동생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게 보여드리고 나눠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시절 먹거리 추억중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다!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서 먹기도 했지만, 동생 생각에 참을 줄 알았던..

어린나이에도 그 아름다운 심성은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다. 

아마도 엄마가 "그걸 안 먹고 가져 왔구나?" 라며 칭찬해주는 그 말한마디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말이 이젠 먹어도 된다는 말처럼 반가웠으니까. 

 

 

 

거창으로 바로 갈까 하다가 차를 몰아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어릴적 걸어다니던 그 길은 여전히 그대로 인데, 

이렇게 짧은 거리였나 싶을 정도로 마을길이 좁고 또 짧게 느껴졌다.

마을 어르신들도 한 분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을 돌아 나오는데  1-2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쉬웠다. 

큰집이 있지만 큰 엄마가 편찮으셔서 서울에 가 계셔 빈 집이었다.

 

 

거창 병원 상가집 앞에서 만난 초등학교때 은사님!

한번도 담임을 한 적이 없는데 초등학교 앨범에서 본 기억이 나 인사를 드렸더니 반가워 하셨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아버지께서 인사하라고 국민학교때 단짝이었다고 했다. 

시골사람들 인연은 알고 보면 이런 경우가 많다. 

친구의 동생이거나 형이거나 아재이거나 삼촌이거나  등등 

성함은 모르지만 인상이 워낙 강하신 분이라 기억했는데 아버지 단짝이셨다니,

이제라도 알게 되어 아버지 기억에 남겨두기 위해서라도 한 장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께서 그러셨다.

"국어시간에  송강 정철 시조를 다 외웠어도

이 친구랑 나랑은 부끄러워서 둘 다 손들지를 못 했어, 쑥맥이었지.. "

 

 

그 외에도 마을에 사시는 아버지 친구분들도 많이 만났다. 

맏이여서 그런지 이럴 때 편리한 점은, 외관(외모)과는 상관없이 이름만 대면

세월을 초월하고 단박에 알아보신다는 거다. 맏이로서 누리는 특혜다.

 

내게 초등학교 은사는 돌아 가신 오촌 당숙의 동생인 역시 당숙이시다. 

초등학교 5-6학년 2년동안 담임을 하셨는데. 이렇게 집안 대소사에선 항상 만난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 내가 어른이 되어가는 만큼 선생님은 늙어가신다는 거다. 

퇴직하신지도 벌써 꾀 된다.

이번에도 얼마나 반가워 하시는 지 볼을 꼬집고 쓰다듬으며 이뻐해 주셨다.

그 외에 대구 작은아버지도 "이쁜것'하며 칠순을 앞 두신 분이 볼을 꼬집어 주셨다.

내가 이뻐서 이쁘다고 하시는 건지,  당신들 보다 젊어서 이쁘다고 하는 지는 모르지만

어른들에게 이쁨 받는건 엄청 기분 좋은 일이다. ㅎㅎ

초등학교 추억은 특히 은사에 대한 추억은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오촌당숙이다 보니  지금까지도 만 날 수 있어 참 좋다!

 

  

 

요즘은 대소사라도 있어야 만나는 것이 친 인척 인것 같다. 

육촌 언니 오빠들 몇 몇은 금새 알아볼 수 있었지만, 어떤 언니는 영 알아볼 수 없게 변해있기도 했다. 

아들데리고 온 결혼식 때 보고 처음보는 6촌 오빠,  그리고 잘생긴 동생,

설날 신 새벽이면 엄마가 떡국을 끓여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러 갈 즈음

6촌 언니 오빠 동생이 우리집으로 와서는  "누구야?" 부르며 우리의 선잠을 깨웠었다.

 

그러면 동생과 나는 부시시 눈 비비며 일어나  간밤 머리맡에 가지런히 챙겨두었던 

설빔을 입고 세배다녔다. 어둠이 뿌옇게 남아 있는 그런 새벽길을...

그 시절 세뱃돈은 10원 아니면 20원 이었다.

구에서 객지 생활하다 설 쇠러 오셨던 작은 아버지는 50원을 주신 적도 있었다. 

그 시절  50원은 큰 돈이었다. 100원 짜리는 지폐뿐이었을 때다. 

 

아련한 기억들,,.추억의 보따리를 푸는 시간이었다. 

<축제>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장례문화를 모티브로 장례가 돌아가신 분을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산 사람들에겐 축제 문화여도 되는 뭐 그런 영화였던 것 같다. 

내겐 축제같은 그리운 만남의 자리였다. 

 

 

고향 마을 입구의 아름다운 노을이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산 밑은 이렇게 어둡다.

 

 

 

거창에서 동생과 헤어진 뒤 상가집에서 두어시간 더 놀다가 구미로 출발 했다. 

혼자서 돌아오는 길,

고향마을 앞을 지나는데 노을이 막 서산에 넘어가고 있는 데다

아까 거창갈 때 순식간에 돌아 나온 것이 아쉬워 마을 초입에다 차를 세우고

사진을 몇 컷 더 찍고 있었다.

 

이 때!  내가 온 걸 알고 마중 나온 듯 서는 차 가 있었으니, 

두시간 전에  먼저 떠난 동생이었다.

동생의 시댁은 고향마을이다. 

어릴적 눈맞은 갑돌이 갑순이 처럼 그렇게 한 집 건너 옆집 갑돌이랑 동생은 결혼에 골인했다.

그래서 명절이나 휴가철이면 고향에 가는 동생이 나는 엄청 부러웠던 건 사실이다.

 

 

온김에 시댁에 들러 혼자계신 시어머님과 삼겹살 구워 먹으려고 고기 사오는 길이란다.

안그래도 붙 잡는 이 없나 하던 터라.  이런 반가울데가.. 저녁 같이 먹고 같이 출발하잔다.

이렇게 좋을수가.. 복도 많지.. 

큰엄마가 안계서도 큰 집 옆집에 사돈집이 있었음을 잊고 있었다.ㅎㅎ

 

동생부부는 성공한 갑돌이 갑순이 케이스라  아직도 깨가 넘친다.

들어가다 갑자기 차를 세우고 밭으로 들어가 깻잎 따는 두사람..

당연 시댁 밭인줄 알았는데 .. 서리 하는 중이라고ㅎㅎ

"언니, 먼저 먹고 나중에 하니가 말하면 돼. .." 누구 밭인지도 모른다면서 서리하는 저 잰 몸놀림..

동생이 저렇게 순발력 있을 줄이야..

고향의 인심은 변하지 않았고 옛 정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고향친구 집이다.

뒤에 대숲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다!

 

내친 김에 제니(조카)손을 잡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제니도 할머니 집에 오면 참 좋단다. 

제 할머니 집이 엄마와 이모의 고향인줄은 오늘에 사 안 것 같다.

 

 

 

 

담쟁이가 이쁜 친구집.

이 골목길을 지나면 오촌당숙집이 두 곳이나 있고 친구네 집도 두 곳 있다.

이번 상가집에서 엄마에게 들은 얘기..

이길을 지나야 엄마가 일하는 논이 있어 항상  이길을 지나다녀야 했다고,

한데 요 이쁜 담쟁이 집 막내아들이 나를 많이 괴롭혔다고 한다. 

엄마한데 가다보면 골목대장처럼  집 앞을 지키고 있다가 

내 귀를 잡아 당기거나 볼을 꼬집어서 매번 애를 먹였고,  눈물을 글썽이며 논으로 왔다고 한다.  

하루는 엄마가 이 집에 들어가 막내 아들 녀석 혼좀 내주라고 했더니, 

그 어머니께서 '허허' 웃고 말더라는 얘기까지..

나도 기억못하는 이야기를 엄마가 재밌게 보는 듯이 해 주셨다.

정말 그랬느냐고 아주 괴씸한! 녀석이었구나 하고 ㅎㅎ 얘기꽃을 피웠다.

짐작도 못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아무 기억도 없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정겨운 집도 있고 새로 증축 개축한 집들도 있었다.

그자리 그대로 지켜진 집은 그래도 누구 집인지 알겠는데

옛 집터를 놔 두고 새 터에 신축한 집들은 누구네 집인지 전혀 알수가 없었다.

 

또 다른 당숙 집이다. 

아들이 하나 뿐인데 갓난아이 때문에 며느리가 집에 와 있었다.

여기 사시는 당숙모님은 차분하고 조용한 성품이시라

볼 때마다 마음으로 정이 느껴지는 어른이시다!

 

그 뒤에 있는 친구 선자네 집에도 갔었다. 선자는 막내인데다 위로 오빠만 있어서

엄마가 얼마나 이뻐하며 키웠는지 모른다. 오빠들이 많아(힘센 오빠들이라 뒷배경이 좋았음)

아무도 선자를 건드리는 동네 사내녀석이 없었던 덕분에  언제나 거침없고 밝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 친구가 나는 참 좋았다.  선자네 집 앞에 차가 있어 혹시나 왔나 하고 갔더니

큰 오빠가 와 있었다. 그 오빠도 반가웠다. 

덕분에 오랫만에 친구랑도 통화하고 친구어머니랑 어릴적 추억도 떠올려 보았다. 

뒷집 현순이 엄마도 만났다.

 

역시나 집성촌이라 동성동본이 많고 알고 보면 촌수와 항렬만 다를 뿐 친척들이 많다.  

지금의 내 나이였을 적의 어머니들 모습만 기억에 남아 있던 터라

칠순이 넘은 지금은 완전히 노인이 되어 계셔서 마음이 짠 했다.

하기사 나도 주름살이 늘어가는데 ㅎㅎ 세월 앞에 장사 있을까..

그래도 너무 너무 반가웠다.

고향사람들이고 어릴적 추억속의 친구어머님들이라서..  

 

 

 

이렇게 많이 변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여기가 고향마을 도랑가 빨래터인데.. 전혀 흔적을 찾을 수도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오른쪽을 소를 키우는 우사가 있어서 냄새도 있었다.

 

 

 

 

 

 

 

 

동생의 시댁 석화네 집이다. 어르신이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감나무 아래 평상에서 그것도 고향마을에서 삼겹살 하나만 해도 내겐 만찬인데

손(손님)이 왔다고 기어코 된장찌게 끓이러 들어가셨다.

나는 삼겹살 맛보다 된장찌게 맛보다 내 추억의 맛을 더듬느라

이미 미각은 잃어버린 터 인줄을 어르신은 모르실 것이다!

내가 어릴때 보았던 아저씨 한분과

우리가 이사가고 나서 우리집에 와서 살게된 몸이 건강해 보이지 않은 청년 한분이 합석했다. 

 

 

 

대숲너머 고향마을의 노을이 이렇게 아름다웠다.

내 고향 운평은 구름雲에 평야平자( 블로그 이름이 구름뜰인건 고향마을 이름이다)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지 어른들은 운평의 한자를 풀어서 "구름뜰 구름뜰" 하다가

<굼뜰>이라는 지명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0년 전 쯤에 돌아가신 큰 아버지께 들어서 알게된 사실이다. 

굼뜰이라는 이름이 무슨뜻인지 몰라서 물어보고서야 안 사실이다. 

그 전에는 운평과 굼뜰은 아무 상관이 없는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굼뜰' 이 '구름뜰'에서 연유한 아름다운 이름 인줄은 생각도 못했다. 

선조때부터 내려오던 아름다운 것들,  뿌리같기도 한 이런 이야기들,

알아두면 좋은 것들을 우리가 많이 놓치고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인터넷에 굼뜰을 검색해보면 <굼뜰대다> 외에는 굼뜰이 그 어떤 용도로도 쓰이지 않는다.

지명으로는 고유명사인 셈이다.

 

내 고향 굼뜰!

그리운 고향, 이름도 독특해서 더욱 좋은 굼뜰!

나는 아마도 굼뜰을 너무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같다!

 

 

고향집 감나무가 있던 자리인데 감나무는 베어지고 없었다.

대문도 있었는데 없어졌고 이렇게 초록색 담쟁이 덩굴이 담장위로 뻗어가고 있었다.

저 당쟁이 아래쪽에 꽃은 지고 홀씨까지 다 날려 보낸 노란 민들레 대공이 몇 포기 있었다.

어릴적에 이곳 감나무 밑에 공기돌 무덤을 만들어 두고, 친구들이 놀러가자고 오면,

우리 집에서 놀자며 감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공기놀이 하던 내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마당에 앉아 놀때면 항상 감나무가 있는 이곳에서  놀았다. 

 

아쉬운 마음에 감나무를 왜 베어냈을까  물었더니,.

잎이 무성해 낙엽쓸기가 힘들어 베어 버렸다고 살고 계시는 주인어르신이 말씀해 주셨다.

30년 전 우리가족이 고향을 떠날 때 우리집으로 이사온 분 들이라 익숙한 분들은 아니지만

동생과는 잘 통했다. 시댁과 친척인 듯 했다. 

 

 

마을회관 옥상에서 본 정자나무 그늘이다. 그 때는 2층 건물이 마을에 하나도 없었다.

유일하게 건물위로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놀 수  있는 공간이 콘크리트 건물인

마을회관 옥상 이곳이었다.

방학 때 시골 다니러 가면 오늘처럼 이런 밤에 올라와서 마을 사람들이 아래로 지나는 것을

숨죽이며 몰래 훔쳐보듯이 내려다본 기억도 몇 번 있는 장소다.

 

저녁 9시 쯤이었는데 다들 들어가셨는지 어르신들이 한 분도 없었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했다.

달 밝은 밤이면 가로등이 없어도 달빛만으로도 밤늦게 까지 놀았던 기억.

이런 달빛이 가려진 밤에도 시골 사람들은 몸짓만 보고도 누가 누구인지를 잘 알아보신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고향 큰집에 다니러 왔다가 여름밤에 마실나와 있었는데

나를 알아보는 동네 어르신을 보고 놀란적이 있다. .

나는 그 분을 못 알아봤고 그 분은 나를  당근 알아보시고 "너 누구누구 딸 아니냐?" 고

해서 뒤늦게 인사를 했는데.. 그 때 깨달은 것이 시골에서는 달이 밝거나 어둡거나 상관없이

어른을 만나면 무조건 인사부터 해야 한다는 걸.. 

 

가까이에 고향마을이 있는 건 복이다. 

어른들이 그 곳에 살고 계시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을 내 고향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추억만들기가 된다.  

동생덕분에 들어간 고향마을..너무 좋았다.

 

고향은  리 같은 곳이며 

삶의 위안을 주는 마음의 고향도 된다.

그리움을 품게하는 유일한 곳, 

언제나 그리운 곳이 고향이며

고향사람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