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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속 한 꺼풀 벗기면, 모든 사랑은 드라마

구름뜰 2009. 8. 20. 08:46

제9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⑧ [중앙일보]

2009.08.20 01:01 입력 / 2009.08.20 01:07 수정

통속 한 꺼풀 벗기면, 모든 사랑은 드라마
시 - 이영광 ‘사랑의 미안’ 외 16편

 
 

울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이 들어가서 태우는 몸

네 사랑이 너를 탈출하지 못하는 첨단의 눈시울이

돌연 젖는다, 나는 벽처럼 어두워져

아, 불은 저렇게 우는구나, 생각한다.

따로 앉은 사랑 앞에서 죄인을 면할 길이 있으랴만,

얼굴을 감싸 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나는 그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함께 벌 받을 자격이 없다.

원인이기는 하되 해결을 모르는 불구로서

그 진흙 몸의 充血(충혈) 껴안지 못했던 것

네 울음을 없어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요돌이치는 불길에 몸 적실 의향이 있지만

(중략)

-현대문학 2009년 1월호-


익숙한 풍경이다. 한 여인이 울고 있다. 비겁한 사내, 그 앞에서 참담해 하면서도 사랑을 부정한다. 하지만 시인의 ‘광각 렌즈’를 통해 들여다 보니 사내 역시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속이 탄다. 겉으론 통속적으로 보여도 사랑의 안쪽에서는 이런 드라마가 펼쳐진다. 비유와 상징이 빼어난 이영광 시인의 시편은 대개 “낭만적 우수와 현실 감각이라는 이중 장치에 의해 씌어진다”는 평을 받는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이씨는 “미학적 설계나 계획 같은 건 없다. 무기력하게 기다리다가 집중력이 높아지고 한편으로는 멍한, 시적인 상태나 기분이 되면 자연스럽게 시가 나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시에 영매(靈媒)처럼 몸을 빌려주는 일. 이런 시작법은 다른 시인들도 얘기하는, 새로울 것 없는 노하우다. 이씨는 “시 1년 쓴 사람과 20년 쓴 사람은 다를 것”이라며 “빈틈 없이 언어를 운용할 수 있도록 문장을 단련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사랑의 미안’은 이런 단련을 거친 시다.

신준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