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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인의 해학, 흙에서 여인을 느끼다

구름뜰 2009. 8. 22. 08:09

대중문화

제9회 미당·황순원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⑨ [중앙일보]

2009.08.22 00:57 입력 / 2009.08.22 01:55 수정

노시인의 해학, 흙에서 여인을 느끼다
시-정진규 ‘씨를 뿌리다’ 외 33편


어제는 뒷밭에 播種을 했다 씨를 뿌렸다 씨 뿌리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좋은 그림 하나 그려서 옛날 마을 이발소에도 걸려 있고 싶었다 폭신한 흙을 만지는 시간이 뿌리는 시간보다 길었다 황홀한 외도여, 저리는 오금이여, 새 여자의 몸을 탐하는 이 슬픈 속 사정을 한창인 뒷문 밖 살구꽃이 분홍빛으로 더욱 부추기었다 범부채, 개미취, 금계, 채송화, 해바라기, 쪽도리꽃, 아주까리, 상추, 치커리들 무더기로 다 뿌리고 나서도 이 나의 代理播種이 不倫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새싹 돋아 실하게 되면 모종을 집집마다 나누어 드릴 작정이다 入養시킬 작정이다 장하시다고 回春하셨다고 모두 끼끗하다고 칭찬 받을 작정이다 -‘시안’ 2009년 여름호


정진규(70·사진) 시인은 지난해 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경기도 안성의 생가로 내려갔다. 선친의 명에 따라 조상의 묘를 한곳으로 모시고 묘지기 노릇을 하러 간 게다. 시인은 “조상음덕을 받았다”고 했다. 아침마다 묘를 한바퀴 도니 운동이 절로 돼 건강이 좋아졌다. 시는 더 말할 것 없고.

“그동안 자연을 안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겉만 알고 속내는 몰랐던 거요.”

농사 짓고 흙을 만져보니 자연의 ‘당길심’이 대단했다.

“심어놓고 한번 들여다 본 것과 두번 들여다 본 게 달라요. 이파리나 열매로 섬세하고 조밀하게 표현해요. 저를 위해, 지가 잘 살려고 그런다고. 그 전엔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것으로만 알았지….”

‘씨를 뿌리다’는 그런 자연의 당길심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시다. 폭신한 흙은 사랑하는 여인의 살을 만지는 듯한 관능으로 다가와 시인의 노동과 땀방울을 재촉한다. 나비가 꽃을 탐하는 장면을 보듯, 화끈거리진 않아도 발그레해지는 시다.

권혁웅 예심위원은 “귀향 후 더욱 생생하고 깊어진 시편들에서 정진규식 어법의 완성과 변화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고 평했다.

이경희 기자

◆정진규=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말씀의 춤을 위하여』 『몸詩』 『알詩』 『도둑이 다녀가셨다』 『本色』 『껍질』 등. 월탄문학상·공초문학상·불교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