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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신 적자생존

구름뜰 2009. 10. 8. 13:46

[매일춘추] 신 적자생존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적자생존을 비튼 표현이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고 섬세하게 남기기에 좋은 수단이다. 함께 있지 않아도 동시대를 살지 않아도 전할 수 있는 글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유산인지도 모른다. 몇년 전, 멀리 사는 지인을 만난 뒤 반가웠던 감정을 편지로 보낸 적이 있었다. 한데 최근까지 그 편지의 기억을 잊지 않은 걸 보면서 손글씨 편지가 그리운 시절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편지글 중에는 20년 전 안동의 택지개발지구 무덤에서 발견된 원이엄마의 글만한 것이 또 있을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의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병술년 6월 초하루라고 적힌 이 글은, 혼자 남은 애통함과 데려가 달라는 애원, 후반부엔 체념한 듯 꿈에라도 좋으니 와 달라는 부탁까지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글은 400년 만에 시공간을 초월한 사부곡으로 인구에 회자되었으며 원이엄마의 생생한 육성이 되살아난 듯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 서한 외에도 망자의 아버지와 형이 쓴 기록 유물을 통해 그 주검이 31세에 병으로 요절한 이응태의 것임이 밝혀지고 처가와 외가의 족보까지 추적해내는 단서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한글을 썼다는 것과 특히 조선왕조실록에 조선 전기에는 결혼을 하면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 살았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듯, 연애에 빠져 콩깍지가 씌었을 정도여야 가능할 것 같은 직설적인 애정 표현이, 딸을 어여삐 여겨 저들 잘 살기만을 응원한 훼방꾼 없는 처가살이였을 거라는 것까지 유추해냈다. 아들 뺏긴 것 같은 서슬 퍼런 시어머니 슬하는 아니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아무리 절절하고 애가 끊어질 것 같은 사랑이었더라도 묻어두기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황망 중에도 오매불망의 심정을 적었기에 그야말로 원이엄마는 신 적자생존을 한 셈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생은 짧다고 하지만 남길 수 있고 기록할 수 있는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지극히 개인사일 수도 있지만 내 기록이 시대를 넘어 다른 이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어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도 있는 것이다.

 

창작오페라 ‘원이엄마’가 6년의 장고 끝에 안동대 솔뫼문화회관에서 10월 9, 10일 초연된다. 420년의 세월을 넘기고 살아남은 그 불멸의 사랑을 빨리 만나보고 싶다.

이미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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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0월 0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