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마땅해 했던 것들은 내가 던진 부메랑이었다. 자식 키우는 데는 답이 없다더니, 나는 내가 잘하는 건지 이 방법이 맞는지 저 방법이 맞는지 수시로 딜레마에 빠졌었다. ‘어떻게 하면?’을 화두처럼 안고 살았지만 답은 없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아이에 대한 노파심은 커져만 갔다. 그러다 한마디 하면 안 한 것만 못한 것 같은 아이의 반응에서 소통 부재만 실감했고, 질풍노도를 함께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봄, 고2가 되고 학습량이 많아진 아이는 한창 예민했고 내 기대치는 높아만 갈 때였다. 힘든 줄은 알지만 조금 더 잘해주기만을 바라는 욕심에 위로나 공감보다는 다그치며 자극받기만을 바라는 것이 먼저였다. 그것이 더 신경질적으로 만든 것인 줄 알게 된 건 우연한 기회에 경험한 역할 바꾸기에서다.
“야, TV 좀 그만 봐, 그렇게 공부해서 뭐 할래?”
“…….”
맙소사! 그 말이 내가 늘 해온 내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듣자마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구멍까지 욱하고 차오른 감정은 내 아이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웃고 말았다. 그 씁쓰레한 열패감이란. 말 한마디에도 이렇게 상대적인데, 제대로 아이 입장이 되어 준 적 없는 나를 보면서 아이에게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집에만 오면 짜증부터 냈던 것도 성적을 떼어놓고 존재 자체로 저를 신뢰하고 존중해주지 않았으니 얼마나 숨 막혔을지. 제 말만 하는 어미에게서 아이가 느꼈을 그 아득함이란.
그 후 나는 엄마가 먼저 달라지겠노라고 공표를 했다. ‘너도 달라져 주길 바란다’는 말은 삼켰다. 그것은 타성에 젖은 내 습관부터 의식적으로라도 바꾸기 위해 나에게 해두는 확약 같은 것이었다. “피곤해 보이네!” “힘들었지?” 또는 늦잠을 깨울 때도 “7시가 되었네” 등 노파심을 배제한 현 상황만을 읽어 주었다. 내 작은 시도도 아이에겐 기막히게 포착되고 기특하게도 반응해 왔다. 더도 덜도 아닌 내가 변하는 만큼 달라졌다. 그 전엔 “몰라” 혹은 금방 있었던 일도 “생각 안 나” 등 무조건 귀찮아하며 빗장 걸어둔 것처럼 단단하게만 보이던 아이가 저런 모습이 있었나 싶게 부드러워진 것이다. 그건 아이가 내게도 느끼는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들어주지 않으면 듣지 않는다’는 말처럼 아무리 사랑과 관심이 넘치더라도 아이가 부모를 이해해주기란 쉽지 않다. 부모 욕심이 아이에게 무게감만 가중시킨다면 아이나 부모 어느 쪽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나는 제대로 경험했다. 오늘도 나는 세상을 향해 내가 받고 싶은 부메랑을 던진다.
이미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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