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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고인쇄박물관 나들이

구름뜰 2011. 1. 4. 10:59

청주하면 생각나는 것이 고인쇄 박물관이다.

갈때마다 한번 들러야지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난 12월 31일 청주에 갈 일이 생겼다.

오랫만에 가기도 했거니와 공사중인 도로 때문에 네비가 안내하는 길로 들다가

우연히 신호대기중에 고인쇄박물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웬 떡인가' 싶어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큰아이와 느긋이 박물관 관람을 했다.

 

 

고인쇄박물관 입구다.

영어와 한자로 직지라는 조형물이 예쁘게 새겨져있고,

뒷편으로 둥근 반형의 지붕이 고인쇄박물관이다.

 

 

 

 

우리처럼 길 잘 못 든 아이들은 아닌것 같은 학생들이

마당을  모아놓은 눈 위로 올라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주변이 한산했고 관람객들도 없어 조용한 시간이었다.

 

 

직지直指(직지인심견성성불)의 뜻은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즉, 직지는 직접 다스린다. 바른 마음 직접 가리킨다.

정확하게 가리킨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직지의 본래 제목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며

부처님과 큰 스님들의 말씀을 간추려 상, 하 두 권으로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서기 1377년(단기 3710년, 고려 우왕 3년)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으로,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 1책 만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하권은 표지를 제외하고 39장인데 첫째 장은 사라지고

매 장 11줄씩 각 줄마다 18~20자씩 인쇄되어 있다.

마지막 장에 인쇄시기 인쇄장소 인쇄방법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프랑스에 가 있을까?

19세기 말 프랑스 대리공사로 조선에 근무했던 꼴랭 드 뿔랑시가 수집하여 프랑스로 가져갔고,

1911년 그의 물품 경매 때에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으며

그후 앙리 베베르의 유언에 의해 195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발견 되었을까?

1900년 프랑스 파리 세계만국박람회에 전시되었고,

1901년 모리스 꾸랑이 쓴 <조선서지>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한국 인쇄본임이 소개되었다고 한다.

 

보관상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귀중본으로 분류되어 단독 금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일반인들은 쉽게 볼 수 없다고 한다..

속지는 나무의 진이 묻어 얼룩이져 있으나,

표지는 나중에 새로 만들어 깨끗한 편이다.

표지를 다시 만들면서 아래, 위를 잘라내어 크기가 줄었으며,

흐린 글씨는 붓으로 덧칠한 흔적도 있다고 한다.

 

직지는 지금까지 전하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가장 오랙된 책이다.

우리나라는 1200년대 초 고려시대때 이미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한 기록이 있고,

14세기 후반에는 지방의 사찰에서까지 금속활자로 책을 찍었을 만큼 발전된 인쇄기술을 갖고 있었다.

 

독일은 1455년경 구텐베르크가 42행 성서를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이 처음이고,

중국은 1490년 경 명나라에서 금속활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일본은 16세기 말 임진왜란이후 조선의 금속활자인쇄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위사진은 1985년 흥덕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금구와 청동불발등

유물이 출토되어 이곳이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임을 확이해주는 유물들이다.

 

 

박물관에는 금속활자를 만드는 과정들이 쭈욱 조형물로 소개되어 있다.

어린 학생들이 견학하기에 좋도록 잘 꾸며져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인형이 움직이면서 무슨일을 하고 있으며 어떤 과정인지를  설명해준다.

밀납을 가마솥에 녹이는 장면이다.

 

 

 

 

 

 

 

 

 

 

 

 

 

 

 

인형들이 승려인건 고려시대 

사찰에서 경전을 전파하기 위해서 한 작업들이라

당연 승려들이 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의 인쇄술 발전이 우리보다 늦었다는 사실

우리의 인쇄술이 아직은 세계최초라는 사실까지

우리가 알아낸 것이 아니고

서양인들이 알아내고 발견해 낸 것이라 씁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놀라운 것이다

만들기는 했어도 그 값어치를 모른다면 소용이 없는 일 같다.

쓰임도 그렇고,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을까. 

 

여기서 잠깐, 서양의 인쇄술 발전과 관련한 이야기.

작년에  본 세계사 이야기 중 일부 기억나는 것들 올려봅니다.

 

유럽 카톨릭교회의 종교개혁이라는

로운 눈뜸의 역사 역시 인쇄술의 발전과 더불어 가능한 사건이라고 한다...

초기 교회는 성경이 교황청의 전유물이었고, 그 외의 사람들은 교황의 말씀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할 때였으므로 성경말씀을 가진 교황이 황제의 영역까지 넘볼 정도로 세력이 확장되어 갔다고 한다.

교회가 세속과 결탁하면서 많은 부작용이 생겨나기 시작 교회는 타락해 갔고,

그것에서 파생된 것이 종교개혁이라고 한다.

 

면죄부라는 것을 판매했던 16세기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차용했던 막대한 부채를 갚지 못했던 데 기인해서

채권자인 아우크스부르크에게 면죄부 판매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면죄부는 탐욕스런 르네상스 교회의 수입증대 방편이 되면서

무지한 민중들에게 천당에 갈 수 있는 허가장으로 허위 선전되고 판매되었고,

성서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통하여 성경과 잘못된 부분들을 종목종목 꼬집어서

면죄부 판매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고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무력했던 한 지식인의 주장은 곧 정치적인 차원으로 확산 독일 연방군주들의 지지를 받고.

인쇄술의 발전은 루터의 개혁을 급속 확산시켰다고 한다. 

원래 라틴어로 씌어졌던 <95개조 반박문>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수천 장씩 인쇄되었으며 이후

성경까지 대중에게 보급되었다.

이를 통해 종교개혁은 보다 광법위하게 기반을 확보, 교황권의 쇠퇴와 교회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교황청과 황제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이 심했던 중세 카톨릭 교회의 역사가 

끝없는 종교 분쟁에서 자리를 잡은 것도 인쇄술 발달로 인한 무지한 백성들의 깨어남 덕분인 것이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든 것도  백성들이 쉽게 글을 배우게 하고자 한 마음이었듯이

인류문명은 역사는 인쇄술로 인해 오늘날의 발전에 이른 것인 셈이다.

 

 

글이 있기전 사람들은 무언가 알려주고 싶었지만 벽화 밖에 없었다.

암각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울산 반구대 암각화라는 얘길 들은적이 있다.

 

금속활자, 그 위대한 발명

지난 천년 동안에 일어난 가장 위대한 사건, 

박물관입구에서 뽑아든 작은 안내장에 이런 글귀가 실려있다.

그리보면 인쇄술의 발달이야 말로 오늘날 문명의 토대인 것이다.

 

고인쇄 박물관을 가게 될 줄 모르고 나선 길이지만

이런 저런 인쇄와 관련한 생각들을 떠올려 보게 되었다.

인류문화발달에 가장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글자이고

인쇄술임을 다시 상기해 본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 서게 될 때가 있다.

이곳이 아닌데 내가 원한 곳도 아닌데 싶은 곳,

그렇지만 살아야 하고 머물러야 할 곳도 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고 인류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을 알려주고자 했던 선대의 사랑, 곧 부모님의

내리사랑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것인데 소중한 줄 몰랐고 지킬 줄 몰랐던 것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역사 일수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교훈 삼아서 후대인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내리사랑을 받은 자손으로서 선대를 위한  도리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