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히도 우리는 인문학이 부자들을 위한 것으로 여기도록 길들여졌다.
그 결과, 빈민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생각은 매우 터무니없는 것으로,
그래서 죄수의 몽상이나 아리스토파네스의 농담쯤으로 치부해버렸다.
이 책은 <클레멘트 코스>라는 교육 실험에 관한 것이다.
빈민들을 위한 인문고전 독서교육 프로그램인 클레멘트 코스의 창시자 얼 쇼리스는
시카고 대학 출신으로 시카고 플렌(인문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다.
<클레멘트 코스>를 수료한 사람들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자, 결손가정 출신의 사회 부적응자
학교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사람, 노숙자, 전과자 등이었다.
코스 수료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거의 모든 수강생이 정규대학에 진학했거나 취업에 성공했다.
전액장학금을 받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학생회장에 당선된 사람도 있다.
국가든 혹은 어떤 것이든 간에 그 출발과 기원을 고려하는 자는
그것에 대한 가장 명확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아리스토 텔레스, <정치학> 중에서
제호처럼 <희망의 인문학>은 우리가 등한시 하고 있었던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실제 인문학 교육프로그램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어
미술, 음악, 문학, 역사, 철학 정치학 등 각 분야별 교육 코스를 운영하면서
경험한 사례들을 실어 놓은 책이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클레멘트 코스>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인문학과 인간 영혼의 가능성을 본 저자의 관점이
빈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으며,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할수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성찰하는 삶을 살도록 그것이 곧 삶의 희망이라는 이야기다.
사우스 브롱크스 지역에 테니스 코트가 하나 있다.
어느날 수업이 끝난 후에 청소년 가족 서비스 프로그램에서 나온 사회복지사가
한 무리의 아이들을 테니스 코트로 데리고 갔다.
라켓 두 개와 테니스 코트 하나를 나눠 써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각자의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사회복지사는 두 아이에게 라켓을 쥐여 주면서
다른 아이들에게는 줄을 서서 기다리라고 부탁했다.
아디들은 줄을 섰다. 하지만 사회복지사가 테니스 치던 아이들에게
교대시간이 됐다고 말하자마자 기다리던 나머지 아이들은 줄을 벗어나고
그 두아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애원하고, 손을 내밀고, 다그치고, 아첨하면서 자신이 다음 순서에
테니스를 치게 되길 간절이 바랐다.
매번 교대시간이 될 때마다 줄은 흐트러졌고
선생님은 몰려드는 아이들을 정리하고, 라켓을 건네주고,
경기가 진행될 수 있도록 줄을 다시 세워야 했다.
오후 시간 대부분이 한 아이에게서 다음아이에게로 라켓을 건네주는 데 허비됐다.
몇 마일 북쪽에 있는 교외 학교에서도 역시 아이들을 테니스 코트로 데리고 나왔다.
그 아이들도 줄을 서서 네트를 가로질러 공을 치고받을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이 교외 학교의 아이들도 자리를 놓고 경쟁을 했다.
하지만 일단 정열을 마치자 자기 순서를 지켰다.
라켓은 재빨리 넘겨졌고 경기는 코트에서 거의 쉴 새 없이 진행되었다.
교외 아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정치적 삶의 규칙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유와 질서 사이의 중도를 찾았다.
경기를 시작할 무렵엔 수선을 떨면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은 뒤에는 질서를 지켰다.
줄을 설 때 집단이 정한 규칙에 따라서 경기가 진행됐고,
그에 따라 일은 효율적으로 이뤄졌다.
사우스 브롱크스에서 아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제어하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중도를 넘어 자유를 택했다. 자유의 혼돈 속에서는 무력이 지배를 한다.
더 크고, 힘이 세거나 더 공격적인 학생들이 매번 라켓을 차지한다.
그럴 때 사회복지사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어야만 했다.
이 두 테니스 코트의 사례가 국가의 완벽한 축소판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부자와 빈민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정치적이지 않다.
그들은 질서와 자유 사이의 중도를 발견할 수 없다.
대신 그들은 끄집어낼 수만 있다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무력이라도 행사하려고 했다.
테니스 배우기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무력의 무질서 속에서 잃어버렷다.
가난한 아이들은 테니스 코트에 자신들의 상황을 비추어보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에 무관심함 자신들의 행동이 어리석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들은 정치적 규칙보다는 무력의 법칙에 따라 반응한다.
무력이야말로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빈민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세계'다.
타고난 능력에선 부자 아이들과 동등하거나
때론 더 뛰어날 수도 있는 가난한 아이들이지만,
테니스 배우기에선 뒤떨어진다.
현대 사회의 게임에서 이제 그들은 패배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빈민들, 특히 아이들이 패배하는 행동에 대해선 많은 해석들이 있다.
빈민들의 삶이 상처를 입는 데는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인종적 이유들이 있다.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했듯이 이 모든 것들은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최고 의 예술
정치 문제로 수렵된다.
- 정치는 빈민들의 삶에서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 3장 서로를 위해 태어나다 중에서
독서를 통해 종종 이런 사례들을 접할 때,
내가 경험하고 본 것처럼 시공을 초월한 기쁨을 얻는다.
클레멘트 코스의 필요성, 교육의 필요성을 가장 쉽게 요약한 예제다.
부자아이들과 가난한 아이들, 그건 교육의 차이라는 것,
결국 교육만이 인간에게 희망이고, 즉 인문학 교육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가난의 대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일지라도 부자들과 비교해서
인문학 공부할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엘리트주의자들이 그러한 '선험적'주장은 사실
단 한 번도 제대로 검증받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이다.
엘리트주의자들의 '충고'때문에 빈민들은 인문학 공부할 기회를 차단당했고,
그 결과 정치적 삶에 이를 수 있는 하나의 효과적인 길을 봉쇄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살펴보면
참으로 공정하지 못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견해라는 시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노예제도와 그것에 기초한 조직적 업압 상황에서 작동했던 무력의 포위망 속에서도
미국 흑인들은 인문학을 공부할 방법을 찾아냈고, 정치적 삶을 발전시켰으며,
시민권 회복을 위한 숭고한 운동을 통해서 자신들을 속박했던 것들을 타파해나갔다.
인문학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들보다 더 인간다울 수 있었던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살해당하기 전까지 이렇게 고양된 인간다움을
모든 인종의 모든 빈민에게 확대하려고 애썼다.
전국에 퍼져 있던 마틴 루터킹 목사를 추종하는 성직자들이 수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굳어진 습성을 타파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자유의 절정에서 나타나는 인문학이 부자들에게 그랬듯이
빈민들에게도 효과적이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길이 없다.
부든 빈곤이든 그 어느 것도 좀더 인간적인 삶을 누리는 것을 방해할 수 없으며,
학생의 경제적 상황은 인문학 공부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인문학을 공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감성과 지성이다.
빈민들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급진적'인 행동인 것이다.
인문학 학습이 빈민들에게 정치적 삶을 가르치며, '진정한 힘'이 존재하고 있는
공적 세계로 그들을 거의 확실하게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성찰적으로 사고하거나 공적인 삶을 사는 것은 부자들보다 빈민들에게 더 많은 이점을 가져다 둔다.
게임의 승자가 될 때는 물론이고, 게임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기만 해도 '힘'을
쟁취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허친스가 말한 것처럼,
"최고의 학생들을 위한 최고의 교육은 모든 이들을 위한 최고의 교육이다."
-12장 금진적 인문학 중에서
미국에는 사립과 공립학교가 있는데
부자계급은 사립학교를 다니고 빈자들은 공립학교를 다닌다고 한다.
리더의 두뇌를 가진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문고전 중심의 교육이 사립학교 교육이며.
그에 반해 공립학교 교육수준은 그에 한참 못미친다고 한다.
공립에서는 인문고전 독서교육 전통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로 들어온 교육 역시 미국의 사립교육(인문학 중시)이 아니라
공립교육(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를 위한 교육)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일종의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교육과정이
은밀하게 존재했다는 얘기이고,
(미국의 노예계급이나 빈자를 위한, 관습적으로 내려온 인문학이 중시되지 않은 피지배 계급만을 위한.)
오늘날 우리 교육 현장에서 주입식 교육의 원조가 미국 공립교육이라는 얘기다.
"여러분들은 이제껏 속아왔어요. 부자들은 인문학을 배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인문학을 배우지 못했잖아요?
인문학은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서, 제대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외부의 어떤 '무력적인 힘'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쳐올 때
무조건 반응하기보다는 심사숙고해서 잘 대처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할 공부입니다.
저는 인문학이 우리가 '정치적'이 되기 위한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적'이라고 말할 때는 단지 선거에서 투표하는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아테네의 정치가였던 페리클레스는
'정치'를 가족에서 이웃, 더 나아가 지역과 국가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함게 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부자들은 바로 이런 넓은 의미로 정치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협상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잘 살기 위해, 또 힘을 얻기 위해 정치를 이용합니다.
부자는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못됐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 필요한 효과적인 방법을 더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바로 부자들이라는 말씀을 드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류층이나 중산층들은 모두 인문학을 공부햇을까요?
결코 그랬을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들 중에는 분명히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있었고,
그런 공부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 잘 살 수 있도록, 삶을 더 즐길 수 있도록 인문학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인문학이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 줄까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단,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삶이 훨씬 풍요로워진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부자로 말입니다."
부자들은 사립학교나 비싼 학비를 내는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배웁니다.
그것이 모든 단계에서의 정치적 삶을 배우는 한 방법인 셈이지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정말로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하빈다.
여러분이 사람에게서, 그리고 사람들이 소유한 것들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힘,
합법적인 힘을 갖고자 한다면 반드시 정치를 해야 합니다.
인문학이 도와줄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통비도 지불해 드리고, 자녀가 있는 분들의 경우에는
필요한 책이나 다른 모든 교재들도 마련해드릴 것입니다.
대신 여러분이 더 많이 생각하도록,
전보다 훨씬 더 마음쓰는 일에 열중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책을 읽으셔야 할 것이고, 하버드나 예일,
혹은 옥스퍼드에 입학한 신입생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상들에 대해서 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13장 클레멘트 실험이 시작되다 중에서
ㅡ클레멘트 과정의 수강생을 모집하기 위해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 청중들 앞에서 얼 쇼리스가 한 연설이다.
1995년 쯤 부터 시작되었고,
이 출발점에서 한 연설을 보면,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의
저 아프리카 시애틀 추장이 땅을 팔라고 하는 워싱텅 주창에게 보낸
하늘과 공기 자연을 어떻게 팔수 있겟'느냐며
보내는 편지만큼이나 설득력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소크라테스는 우리 학생들에게 진리나 해답은 이미 그들안에 있으며,
다만 대화를 통해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만 남았다고 말했으며,
우리 학생들도 그 뒤부터는 자기 자신을 이전과 같은 방식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인문학은 우리 학생들이 자기 안에 내재된 인간의 존엄성을 바꿔주는
거울이 되었고,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그들 또한 사랑을 통해서 변화되어 갔다.
나중에 아멜 로마스는 이때를 에의 근엄한 문체로
"난생처음으로 누군가가 우리들의 의견에 귀기울여주었다"라고 표현했다.
소크라테스가 좋아하는 은유법을 표현하면, 그들은 새로 태어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할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미리 알려주었고,
그때가 학생들이 소크라테스의 사랑에 빠져드는
시간이었음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철학이 이땅에 가져온 최초의 사람이 소크라테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학생들을 진지함으로 이끌어준 최초의 사람 역시
소크라테스라는 말도 사실일것이다.
한편의 시가 다른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흥미를 끌었다.
베드포드힐드 교도소에서는 니시 워커와
아이시아 엘리어트가 밤마다 그 시를 가지고 토론을 버렷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그 시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 시가 함축하고 있는 여러 의미가지 포함해서 말이다.
시가 여러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자못 흥미롭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신탁의 수수께기 - 소크라테스
나는 오랫동안 신탁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가까스로 그 뜻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알아보리라고 방향을 잡았습니다.
먼저 현자로 이름이 난 사람을 찾아가서...... 그 사람은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여기서 이름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대화를 나눠본즉,
많은 사람들은 그를 현명한 인물로 알고 있었지만, 특히 자신이 그렇게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제게는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그가 현명함을 자처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물론 그와 같이 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저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제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보다야 내가 더 현명하지,
왜냐하면 우린 둘 다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르고 있지만,
이 자는 자기가 모르는데도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사실상 내가 알지 못하기도 하고, 알고 있다는 새악도 하지 않기 때문이지.
어쨌든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 덕분에
내가 그보다 더 현명한 것 같아"라고 말입니다.
그 후 나는 그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사람에게 접근해 보았지만
제가 보기에 결과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얻은 통찰력-인간의 지혜는 우리 자신이
가식과 무지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는-이 바로 신이 모든 인류가 소유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자신이 부여받은 임무는 바로 "그 사실을 모두에게 전하라"는 것으로 믿게 됐다.
--도덕철학 강의 요목 -신탁의 수수께끼 중에서
"그대는 깊이 성찰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진정한 지식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느니라.
그대는 그대가 모르는 경우에는 아는 척하지 않았노라. 이점은 모든 인류가 지녀야할 중요한 통찰력이거늘, 내가 내준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하는 동안에도 그대가 목격했듯이,
그대의 동료인 아테네인들은 그렇지가 않았노라. 사실을 이르노라면,
그것과는 정반대인 것 같았느니라, 그들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못하되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 또한 알지 못하느니, 그대가 이 점을 바로 잡으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지혜의 구도자가 되도록 돕도록 하라.
그대가 그대의 도시를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은 내겐 중요한 일이노라.
도덕철학 강의 요목 -신탁의 수수께기 중에서
프로그램 중에 도덕철학 강의요목 중에 나오는 내용이다.
철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 학생이 어느날.
어떤 난제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쇼어스씨, 나는 내 자신에게 '소크라테스라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물었어요."
클레맨트 코스 때문에 한 사람이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게 된 최초의 사례였다고...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수수께끼를 푼 다음 아테네를 돌아다니며
신의 명령을 따라 아테네 사람들에게 힐문하고 다닌다.
아테네인들이 지혜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는 일에
도울 준비가 되었고 그는 도우고자 열망했다고 한다.
신은 인간들이 소크라테스처럼 지혜와 관련해서는
자신이 진실로 전혀 보잘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한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것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 조차도 모르며 아는 척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고 한 것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기본인 '겸손'만이라도 인간이 가져야할 덕성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ㅎㅎ
뭔지는 잘 모르지만...
신도 소크라테스도
겸손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삶이기를 바란게 아닐까 싶다.
인간이란 불완전하고 시시때때로 변하기에
그것에 유일한 희망은 성찰이며,
한 순간도 자기 자신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진리를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안다'는 얘기로 귀결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에는
인문고전을 읽어야 하는 숱한 이야기들이 설득력 있게 나온다.
그 중에서 <희망의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몇 줄 인상적인 글들을 소개하자면,,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를 진정한 앎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데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로 알고 있는 사람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게 하고
그 탐구 과정을 통해 진리의 세계에 이르도록 한다고 한다.
플라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엇을 안다고 믿은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상대가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에 불과하며
사실 자신이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까지 대화는 계속된다고 한다.
상대방의 무지를 깨우쳐준 뒤,
역시 질문법을 사용해서 상대방을 진정한 앎의 세계로 이끌고,
소크라테스식 질문법은 진리의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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