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이곳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외에도 '바위'나 '깃발', 또는 '행복'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청마 유치환의 생가다.
원 생가는 도로로 편입되는 바람에 청마문학관 위쪽에 이렇게 재현되어 있다.
이곳은 아래쪽 청마문학관에서 위쪽 생가로 오르는 길이다.
저위 좌측 담장이 생가다.
문학관에는 육필 원고외에도 선생님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내눈에 가장 띈 이여인 이영도 시조시인
통영여중 가정 교사였고 청마가 국어교사로 부임하면서 한눈에 반해버린 여성.
영도는 이미 한아이를 둔 미망인 이었고, 청마는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초기시 '깃발'이나 '바위' '생명의 서' 같은 시들은 지사적 면모에 반해
청마 사후에 드러나게 된 이영도에게 보낸 20년 간의 오천 여통의 연서,
이영도에 대한 연서는 완전 다른 면모를 보이는 듯도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깃발이나 바위 같은곳에서
끊임없이 추구한 이상향에 대한 갈망이
이영도라는 여인에게 좀더 구체화된 연서가 아니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책이 아마도 청마 사후에 이영도가 출판사에 내놓은
연서들을 정리하여 편 책,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고 짐작 해 보았다.
해설사가 없어서 내 나름으로 한 짐작이다.
통영항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통영시민문화회관과 그 아래쪽 지형을 이용하여 남망산 조각공원이 있었다.
조망이 얼마나 좋은지. 주중이라 인파도 없고 나들이 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조각공원에서 가장 눈에 띈! 작품이다.
실물크기의 똑같은 남성인데 일렬로 서 있다.
형상이나 모습은 같지만,
맨 앞의 것은 피부가 어디에 잠긴 듯, 완전 짙은 피부색이고,
두번째는 가슴께까지,
세번째는 허벅지까지
네번째는 전라가 밝은 피부로 점차적으로 변한 모습을 보여둔다.
마지막 그남자는 목이 없다!!!
제목은 <허공의 중심> 김영원 1997년 作이다.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의식과 무의식등
이원론적 사고가 지배하는 이 세상의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고귀한 염원을 나타낸 인체조각이라는 설명이 있었고,
극히 사실적인 인체묘사를 통해서 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이
순수한 생명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식후에 간 곳은 "꽃"의 시인 김춘수 유품 전시관이었다.
고인이 된지(2004년) 그리 오래지 않아서 그런지 일행중에
김춘수 시인과 얽힌 일화들도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유치환이 김춘수에게 준 상장같은데
한국시인협회라는 것과 1958년 12월 30일이라는 문구는 있지만,
아마도 공식적인 상장이 아니라
아끼는 마음을 상장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정확한 이력은 모른다.
역시나 해설사가 없었다.
'당신에게' 라고 쓴 명여사에게 쓴 육필 원고다.
아내와 말다툼이 있었고 미국인가로 여행을 떠난 상황에서 이해를 구하는
당신이 마음을 편히 먹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내용의 서한이었다.
님이 쓴 시 한줄이 평생 모은 돈 (1000억재산)보다 못하다고 했던 백석의 여인
자야의 말이 생각났다.
이런 작가들의 친필서한을 받은 이들이 느꼈을 님의 마음은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짐작할 길이 없다.
정신이든, 의지든, 열정이든 글로 전달하는 마음이란,
말과는 완전 다른 것임에 분명하다 하겠다..
두고 두고 남길 수 있는 그 마음을 그 순정한 마음을
말로서도 결코 따르기 쉽지 않은 글의 힘인 것이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이라는 김춘수의 시다.
전시관 바로 앞이 바다였다.
배들이 정박해 있고, 어디서 보나 풍경은 아름다웠다.
전시관쪽에서 본 바다 건너 통영시민문화회관 풍경과 그아래 남망산 조각공원 풍경이다.
저 아래쪽에 벗은 남정네 조각상이 어렴풋 보인다.
가본경우만 찾을 수 있다.ㅎㅎ
충열사 앞으로는 옛 집들, 폭 좁은 골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도심지의 70년대 거리 모습같았는데 폭이 좁아서 당연 차들은 엄두도 못내는 길들을
'역사, 문화 기행코스'로 만들어 놓았다.
박경리 선생님 생가터를 찾아서 쭈욱 오르다 보니 마을 주민인데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이는 대충 저쪽이라고 알려주는 이도 있었다.
미로찾듯 구석구석 끝이 없이 이어진길.
물어 물어 가야했다.
안내판이 얼마나 작은지.
여럿이 찾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였다.
앞선이가 못보고 지나면, 후미에서 "여기 여기다"라고 하면
다시 돌아가기를 보기를 몇번 했다 ㅎㅎ
선생님 생가터에는 연고없는 시민이 살고 있노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통영을 무대로한 '김약국집 딸들'에 나오는
서문고개 이야기가 생가터 골목초입에 있었다.
지대가 높은 쪽이고 계단식이라 들어갈수록 전망도 좋아지는 주택가였다.
선생님의 생가에서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고,
언덕너머 편이 바다를 조망하기엔 좋은 지형이었다.
생가를 지나서 쭈욱 시내쪽으로 내려가면 항남 1번가 김상옥 거리가 있다.
한때 이중섭이 기거햇던 집터는 반대편쪽에 있다.
통영은 넓지도 않은 항구도시에
참으로 굵직굵진 예인들이 많이도 태어나고 머물다 갔던 곳이다.
문화로로 지정된 대부분이 바경리 생가터마을 이에는
상가들로 번창한 곳이었다..
작아서, 그냥 지나치기 쉬운 안내표지판들이 '문화기행코스'에 오는 이들의
눈도장에 들면,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숨은 보물찾기를 해야할 정도고 물어서물어서 골목 누비기 하는 재미랄까..
어울려서 몰려 다니는 재미랄까.
찾는 재미랄까,
그렇게 한시간 남짓 걷기에 좋은 코스였다.
과거 선인들이야 가셧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남아있고,
현재의 생활공간이어서 역시나 후대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곳,
컴지막하게 재현해 놓았다면 기념할만도 했겠지만,
시내를 한바퀴 도는 기분으로 문화로를 산책하는 기분도 좋았다.
어쨌거나 문학기행하기엔 좋은 코스였고 의미있는 길여행,
여행길이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작곡가 윤이상의 사진이 이렇게 붙어 있고,
어떤 버스 정류장에는 청마나 김춘수의 사진도 붙어 있다.
예향의 고장 답달까..
보기 좋았고, 통영만의 특색이 느껴졌다.
여인숙만 눈에 띄었고 놓쳤다가 후미에서 발견! 다시 되돌아가 본 표지판,ㅎㅎ
김상옥거리를 지나 길건너편에는
이중섭이 잠시동안이지만 기거했던 곳이 있고,
그곳도 역시 문화로의 연장선상이었다.
'바닷가의 아이'라는 이중섭의 그림이
인도에 콘크리트 벽돌처럼 박혀 있어서 사람들이 보기도 하고 밟고 지나기도 했다.
또 묻고 물어서 들어가셔야 숨은 그림찾 듯 찾은곳이기도 하다.
비석들이 대체로 이렇게 작다..
옆에는 가라오케 같은 상업지역이 있었고 성업중.
주차해둔 차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야 보일만큼 아담했다.
점심을 맛있게 먹긴 했는데 항구쪽에 400명을 수영한다는 횟집은
거의 광장이었다.
관광버스 기사님의 안내를 받아서 갔는데 아니올시다 였지만,
그래도 즐거운 담소와 적당한 취기로 모두들 추억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사랑의 숟가락'도 있었고,
4년동안 시 한줄 안쓰고도
'비너스의 눈'에 취해 여전히 수강하시는 분도 계시고.
교수님 말씀처럼 '하룻동안 가정을 지킬 생각 하지 않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ㅎㅎ
중앙시장쪽 항구 광장같은 곳이다.
아름다운 조각상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지친 듯한 한 남자가 작품위에 올라가 마치 작품처럼 졸고 있었다.
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이 작품의 예술성은 이 행인의 자세만 봐도
훌륭하다는 생각ㅎㅎ
문학기행이라고
올리다 보니 본것이 많아 할얘기도 많아졌다.
중구난방이지만, 그래도 잊지 못할 일정들이었고 남겨두고 싶어서 욕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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