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비슷한 것은 가짜다 - 정민

구름뜰 2011. 9. 15. 10:39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비슷한 것은 가짜다>- 정민

 

오늘에도 여전히 살아 숨쉬는 생취. 현상의 저편을 투시하는 형형한 눈빛,,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바래기는커녕 늘 새로운 힘으로 그 정신의 광휘를 드리우고 있는

어떤 위대한 정신과의 만남을 주선해 보려..

연암의 글을 꼼꼼히 읽어 나가는 동안,

나는 불분명하던 나의 사고들이 명확하게 그 방향을 얻고 추동력을 얻어나가는 느낌을 갖곤 하였다.

300년 전의 지성이 이미 死文化(사문화)된 한자의 숲을 두벅뚜벅 걸어나와

타성에 젖은 내 뒤통수를 죽비로 내려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책에 실린 한 편 한 편의 글은 연암과 만나 나눈 대화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연암은 그의 글에서 '商友千古(상우천고)'란 현재에 벗이 없어 답답해서 하는 넋두리라고 한 바 있지만,

반대로 연암과의 대화는 내게 이런 맛난 만남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연암은 가도 가도 난공불락이다.

나는 그 성 밑 자락을 공연히 낡은 사다리 하나 들고서 이리저리 기웃거려본 것일 뿐이다

이 글은 시 전문지 <현대시학>에 1997년 9월부터 1999년 7월까지 '讀燕放筆(독연방필)'이란

제목 아래 2년간 연재한 글에 두 편의 글을 더하여 한 자리에 묶은 것이다.

새천년 첫봄 행당동산에서 정 민

- 책머리에 중에서 

 

 

이 책은 함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함시사)에서 선정된 도서다.

연암의 열하일기는 고미숙씨가 안내한 책을 읽은 적이  몇 년 전 있지만,

그 때는 그렇게 좋은지는 잘 모를만큼 어려워서 반도 이해를 못하고 넘어 갔었다.

이번에 정민 선생님 책의소개로 다시 접하게  되면서 

열하일기 원문(한자)에 한글해설과 다시 선생님의 해석이 붙어 있는 방식이라서 

무엇보다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어서 좋다.

 

그래 '이런 견해가 맞아 그런 생각이 드는 부분에선,

저자의 말처럼 죽비로 뒤통수 한대 얻어 맞는 기분이 된다.

그 맛이 일품이다. ㅎㅎ

그 맛!

블로그 손님들도 맛 보시라고 올려봅니다.

 

 

 

1

하늘의 섭리는 없다. 고정불변의 이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물은 제각금 살아 숨쉰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

내가 알지 못한다 해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지 말아라.

지금 내 눈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저 코끼리야말로 그 살아 있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천지만물의 주재자라고 믿는 하늘을 두고도 우리는 필요에 따라

천(天). 건(乾) . 제 (帝) . 신 (神)등의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가?

 

연암은 예외를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를 수긍하려 들지 않는다.

사실, 하늘의 이치란 것도 하늘의 법칙이란 것도 인간이 지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사물들은 살아 있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으로 가둘 수가 없다.

하늘의 이름이 부르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지듯이.

사물의 질서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하나의 기호는 하나의 진실만을 담고 있지 않다.

나는 그 기호를 통해 세상과 만난다.

기호와 기호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

기호는 살아 있다. 코끼리는 살아있다.

 

살펴본 대로 연암의 상기象記는 획일화된 가치 척도로 세계를 규졍코자 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의 뜻을 담아내고 있다.

우연히 열하 행궁에서 만난 코끼리를 앞에 두고,

인간의 사변적 지식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만고불변의 진리란 것이 어째서 이토록 허망한가를 그는 생각하고 있다.

 

물상의 셰게는 햇볕에 비친 까마귀의 날갯빛과도 같이 잡아 가두려고 하면 금새 달아나버린다.

이미지는 살아 있다.

내 솥끝이나 눈길이 닿을 때마다 그것들은 경련한다.

살아있는 이미지들 속에서만이 삶의 정신은 빛을 발한다.

화석화된 이비지는 더 이상 이미지일 수가 없다.

이것이 코끼리를 앞에 세워 놓고 연암이 21세기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 첫번째 이야기  이미지는 살아있다. 코끼리의 기호학 중에서..

 

 

2

달사와 속인의 차이를 어디에서 찾을까?

처음 보는 어떤 물건이나 경험해보지 않았던 어떤 일을 그 앞에 두어 보면 금세 구별할 수가 있다.

달사는 이미 익숙히 알았던 일이기라도 한 듯이 침착하게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속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졍을 짓는다.

그들은 도대체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을 받아들일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처음 보기는 둘 다 마찬가진데 한쪽은 속수무책으로 당황하여 화를 내고,

다른 한쪽은 태연자약 능수능란하게 처리해 버린다.

왜 그럴까?

 

달사란 어떤 사람인가?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를 들으면 이미 그의 눈 앞에는 그와 관련된 열 가지 형상이 떠오른다.

그가 들은 것은 하나인데 그는 벌써 열 가지를 알아버린다.

열을 보면 마음 속에서는 이미 백 가지 일이 펼쳐진다.

세상의 그 많은 신기하고 괴이하고 알 수 없는 일들도 그의 귀와 눈을 거쳐 가면

어느새 평범하고 익숙한 사물로 변해 버린다.

그는 자신의 이목만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사물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

그의 귀와 눈, 그의 마음은 단지 이 사물과 저 사물을 연결지어 주는 매개자의 역할만을 기쁘게 감당한다.

그러기에 어떤 난처한 상황도 그는 당황스럽지가 않고, 어떤 복잡한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런 그를 나는 달사 즉 통달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울세라.

청강에 조히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검은 까마귀가 무슨 잘못이 있던가?

외다리로 고고히 서 있는 해오라비. 그 청순한 고결을 사람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정작 그는 지금 주린 제 뱃속을 채우려고 물 속의 고기를 한껏 노리고 있는 중이다.

늙은 제 어미를 위해 먹이를 토해내는그 갸륵한 마음도 같이 욕을 해야 할까?

까마귀는 검은 날갯빛을 하고도 제 삶의 불편함 없이 잘 살아간다.

그것을 보고 불편한 것은 정작 까마귀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을 보고 행복한 것은 사실 해오라비가 아니라 사람이다.

 

왜 까마귀를 더럽다 하는가? 해오라비가 고고할 것은 또 무엇인가?

왜 내가 알고 있는 사실, 내가 믿고 있는 가치만을 고집하는가?

왜 그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욕하는가?

 

그리고 나서 연암은 비로소 본론을 꺼낸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색(色) 과  광(光),  형)形)과 태(態)의 관계이다.

색깔 속에는 스펙트럼이 빛어내는 다양한 광채가 있다.

하나의 꼴 속에는 수없이 많은 태가 깃들어 있다.

속인과 달사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속인은 색과 형만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

그러나 달사는  그 속에 깃든 광과 태를 읽을 수가 있다.

그래서

이편에서 괴이쩍은 일이 저 쪽에서는 달영한 것이 되고,

이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저쪽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 된다.

 

내 속에 있는 수많은 나,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좀 전과 지금이 같지 않은 나,

그 많은 나들을 나는 나라고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속인은 싸늘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 속에서 진정한 단 하나의 나, 

나다운 나, 완성된 나를 찾아야만 할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해오라비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가지고 학을 위태롭게 여기는 자들은

이를 하찮게 여겨 분노하고 성낼 테지만

나는 그의 자줏빛 까마귀와 비췻빛 까마귀를 사랑한다.

 

언제나 세상은 곧 내일 망할 것 같은 말세였다.

젊은이들은 항상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연암의 그때도 그랬고, 지금의 여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아직 세상은 망하는 법 없이 젊은이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건강하게 성장해 간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색만 보고 광은 외면하고,

형만 볼 뿐 태는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데 있다.

-두 번째 이야기 까마귀의 날갯빛 중에서..

 

 

 

3

참 되고 바른 견해는 진실로 옳다 하고 그르다 하는 그 가운데에 있다.

 

말똥구리는 더러운 말똥을 사랑스런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정성스레 굴린다.

말똥구리에게는 말똥이 여룡이 물고 있는 여의주보다 더 소중하다.

여롱이 여의주와 바꾸자 한들 거들떠볼 까닭이 없다.

말똥구리에게 여의주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룡에게는 여의주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

여의주가 있기에 온갖 조화와 신통력이 거기서 나온다.

그렇지만 말똥구리가 여의주를 부러워 않듯, 여룡은 제 여의주를 뻐기지 않은다.

각자 그저 그렇게 제 삶에 편안하게 살아간다.

 

여룡의 여의주는 천하에 귀한 물건이 되지만,

말똥구리의 말똥은 천하에 천해 빠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별지는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그들은 앞에서도 보았듯 까마귀는 검으니 더럽고 음흉하며, 해오라비는 희니 깨끗하고 고결하다고 믿는다.

믿기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한 인식을 강요한다.

그들은 어느 하나만을 보고는 전체라고 속단하며, 한 가지 척도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든다.

 

"나는 장차 재와 불재,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사이에 처하려네.

재와 불재 사이란 옳은 듯하면서도 그른 것이니 폐단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댜.

만약 대저 도덕을 타고 떠다닌다면 그렇지가 않겠지.

기림도 없고 헐뜸음도 없으며 한 번은 용이 되고 한 번은 뱀이 되어

때와 더불어 함께 변화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만 하기를 즐기지 않을 것이요.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가서 조화로움을 법도로 삼아

만물의 근원에서 떠다니며 노닐어, 사물로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부림을 받지 않을 너이니 어찌 폐단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신농(神農)과 황제(黃帝)의 법칙일세

 

대저 만물의 정(情)이나 인륜(人倫)의 전함 같은 것은 그렇지가 않다네.

합하면 떨어지게 마련이고, 이루고 나면 무너지며, 모가 나면 깍이고,

높으면 구설이 있게 되며, 유위하면 공격을 받고, 어질면 도모함을 받으며,

못나면 속임을 당하고 마니. 어찌 폐단 면하기를 기필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너희들은 이를 기억해 두어라! 그것은 오직 도덕의 고장에서만 가능한 일임을 말이다."

 

글이란 뜻을 나타내면 그만일 뿐이다.

글을 하는 자는 다만 그 참됨을 추구할 뿐이다.

연암은 이명, 즉 귀울음과 코골기의 비유를 들고 나온다.

내가 마음에 차는 것은 남들이 헐뜯고, 내가 마음에 차지 않은 것을 또 남들은 좋다고 칭찬한다.

내 마음에 차는 것이 남의 눈에도 차 보이면 좀 좋을까?

그러나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이 같지 않게 마련이니 우리의 판단은 항상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의 득실일까? 아니면 남의 훼예일까? 나의 득실이 우선 중요하지만 그 판단이 잘못될 수 있기에

문제이고, 남의 훼예를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것에 글러 다닐 수만은 없기에 또 문제가 된다.

 

 

이명은 나는 듣지만 다른 사람은 결코 들을 수가 없다.

코골기는 다른 사람은 다 들어도 정작 나는 듣지 못한다.

그럴진대 이명이 밤길에 비단옷이요.

코골기는 장님의 비단옷이다.

내 귀에서 나는 이명을 남들이 듣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하는 이는

밤길에 비단옷을 입고 가며, 그 옷입은 자랑을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다.

나의 코고는 소리를 남이 먼저 알았다고 해서 (자신이 코골이 소리를 자신은 낸줄도 모르고 남이 코를 골았다고 지적해주면 코를 골지 않았다고 )화를 발칵 내는 사람은 비단옷 입은 장님쯤이 될 터이다.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좋다고 여기는데. 남들이 여기에 동의해 주질 않으니 나는 화가 난다..

내 판단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고려해 두지 않는다.

반대로 남들이 내게 이것이 잘못되었다 하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화가 난다.

지적이 정말 옳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는다.

 

우리의 진정지견은 내 이명에 현혹되지 아니하고,

내 코골기를 직시하는 데서 마련될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참은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내가 서 있을 곳은 어디인가?

이명과 코골기의 '사이'이것과 저것의 '중간'지점일 뿐이다.

- 세번째 이야기 중간은 어디인가 중에서

 

 

4

보이지 않으면 위태로움은 없다.

들리지 않으면 두려움도 없다.

위태로움과 두려움은 보고 듣는데서 생겨난다.

앞 못보는 장님에게는 조금의 두려움도 위태로움도 없다.

 

 

서화담 선생이야기다.

어느날 밖에 나갔다가 울고 있는 자를 만났는데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저는 세 살에 눈이 멀어 지금에 사십 년이올시다.

전일에 길을 갈 때는 발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소리를 듣고서 누구인지를 분갈할 때는 귀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냄새를맡고서 무슨 물건인가를 살필때는 코에다 보는 것을 부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으되, 저에게는 손과, 발과 코와 귀가 눈 아님이 없었습니다.

--- 중략,

그랬는데. 길가는 중에 두 눈이 갑자기 맑아지고 백태가 끼었던 것이 저절로 열리고 보니,

천지는 드넓고 산천은 뒤섞이어 만물이 눈을 가리고 온갖 의심이 마음을 막아서

손과 발, 코와 귀가 뒤죽박죽이 되어 착각을 일으켜 온통 예전의 일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드막히 집을 잃어 스스로 돌아갈 길이 없는지라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바로 거기에 네 집이 있으리라. "

 

 

 

사연을 들은 서화담의 처방은 뜻밖에 간단하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눈으로 보려 들지 말아라.

항상성을 회복하는 길. 정체성을 되찾는 길은 네눈에 있지 않다.

오히려 네 손과 발, 네 코와 귀를 믿어라.

네 눈에 현혹되지 말고 네 지팡이를 믿어라. 불편함이 없던 세계.

아무 걸림이 없던 세계로 돌아가라.

네 마음의 평형을 깨뜨리는 의심의 덩어리를 놓아 버려라.

 

장님이 눈을 도로 감는 것은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애기다.

좋은 문장을 쓰려면 눈을 감아라, 훌륭한 시를 쓰고 싶거든 눈을 감이라.

문장이나 시만이 아니다 인간 세상 온갖 일이 다 그렇다.

이때 눈을 감는다는 것은 명심의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현혹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본래자리.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촉수가 싱싱히 살아있던 그 지점을 돌아가라는 뜻이다.

 

사십 년간 장님으로 살아오던 그에게 개안은 과연 천지개벽과도 같은 놀라움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자신을 잃고 만다면, 개안의 기쁨은 잠깐일 뿐 그에게는 더 큰 불행을 가져다 줄 따름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면 어떤 눈뜸도 기쁨이기는 커녕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세계.

내것이 아닌 바깥 세상만을 기웃거리다가는 오히려 나 자신을 잃게 될 뿐이다

 

시류만을 쫒아 이리저리 몰려다니지 말아라.

남의 흉내를 내다가는 결국 제 목소리를 잃고 만다.

돌아가야 할 제 집마저 찾지 못하게 되낟.

길에서 울게 된다. 눈을 믿지 마라. 부릅뜨고 볼 수록 더 현혹된다.

도로 눈을 감아라. 마음으로 보아라.

- 네번째 이야기 눈뜬 장님  중에서

 

 

 

이 책에는 스물다섯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분량도 많고 버릴것이  없어 야금야금 씹어 먹는 기분으로 진도를 나가고 있다. 

 책을  잡은지 3주지만 한주에 두가지 이야기씩 나가다보니 여섯번째 이야기까지 나갔다.

 

한가지 주제로 토론을 해보면 그  분위기가 성찬이 아닐수 없다.

앞으로 다 뗄려면 두어달 더 걸리는 재료인데(뗀다고 떼어질까 마는)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운 내용들만 발췌해서 블로그에 올려볼 작정이다.

 

연암에 대해  궁금했던 분들이나, 처음인 분들에겐 좋은가교역할을 하는 책이다.

아쉬운 것은 내가 원문(한문)의 맛을 하나도 모르는 눈뜬 장님이라는 것과,ㅎㅎ

그래도 정민선생님 덕분에 해석이 함께 있어서 그 것을 읽는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제사 접한 것이 아쉬울 정도다.

곱씹어 읽고 또 읽어도 부족함 없는 글 

삶의 지표가 막연했던 분들이라면 이런 고전 한번 접해보면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까.

'눈뜬 장님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영혼의 양식이라면 이런 글들 아닐까.

좋은 맛 앞으로 진도 나가면서 함께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은 네번째 이야기까지로 끝냅니다.

 

"주여! 며칠만 남국의 햇볕을 달라"고 했던 릴케의 시처럼

마지막 곡식들이 영글어가는 가는 때입니다.

얼마나 뜨거운지요!!

머지 않아 가을 그 쳥명한 날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늘의 더위는 여름과 가을사이의 미학으로 

너와 내가 영글어 가는  날들로 즐겨봄이 어떨런지요.. 

좋은 날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