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철학을 만나면 즐겁다

구름뜰 2011. 9. 23. 10:54

 

 

 

이책은 철학과목 수강시간에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책이다.

'한국철학사연구회'에서 펴낸 책이고,

다양한 문학작품 (고전포함)을 어떻게 읽고 이해야햐 할지.

의문제시와 함께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되도록 합리적인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얻어낼수 있는 답들을

제시하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소설같은 경우,

메세지가 있는 좋은 책인데도 별 생각없이 읽고 덮어두면

줄거리외엔 큰 의미도 남지 않는 것들을

철학적 사고를 요하는 주제를 뽐아낸 셈이다.

 

330페이지 정도인데 생각보다 술술 잘넘어가는 책이다.

잘넘어 간다고 덮어둘 것이 아니라,  두번 세번 읽어서

체화되었다 싶게 읽는것이 가장 잘 읽는 방법일 것 같다.

 

일주일 전 쯤 책 받자마자 하루만에 읽고 덮어 두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카프카의 변신 부분이 더욱 깊이있게 와 닿았다.

책 볼 시간 없으신 분들에게 맛배기라도 보시라고 올려봅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ㅎㅎ이런 수고,

저처럼 좋은 맛도 부디 느껴보시길..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나는 다만 나일 뿐이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내가 나를 괴롭힌다.

외면할수록 더욱 강해지는 괴물, 나는 누구인가?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진 사람은 없다. 갖고 싶은 거 다 가지려고 욕심 부리다 보면

지구를 가져도 직성이 안 풀린다.  그런데 지구를 가질 방법이 있나?

어차피 내 눈앞에 보고 보관할 수 없다면 그냥 나 혼자 지구가 내 거려니 생각해도 되겠지 싶다.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게 이거다.

도대체 갖고 싶은 건 많은데 그걸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거.

물건도 그렇고, 사람 마음도 그렇고, 세상에는 가지고 싶은 것들 뿐인데  그 중 내 것은 별로 없다.

 

쾌락을 얻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만족하는 게 아니라

자꾸 더 큰 쾌락을 얻고 싶어져서 계속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놓인다.

-욕심이 없으면 괴로울 일이 없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마음이다.

-탐욕의 끝은 어디인가. 중에서

 

 

 

과연 나는 나를 온전히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가?

나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내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내용은 섬뜩하다.

이 작품은 우리가 차마 표현할 수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 마음속의 비밀을 그럴싸하게 그렸다.

 

하이드로 변신해 나쁜 짓을 하고 돌아오면 지킬 박사는

자기의 분신이 저지른 부도덕한 행위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일에 기쁨을 느끼는 하이드!

지킬 박사의 양심이 전혀 작동할 수 없는 하이드! 악마가 탄생한 것이다.

'죄는 하이드가 저지른 것이야' 라고 스스로 위안하는 지킬 박사

문제는 하이드가 지킬 박사로 돌아오지 않는 데에 있었다.

하이드가 지킬 박사의 마음을 다 차지하여 지킬 박사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인간은 천사나 악마 어느 한 쪽도 아니다.

천사이자 동시에 악마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오로지 천사의 얼굴만을 권하고,

악마의 얼굴을 영원히 추방하려고 한다. 두 본성을 칼로 날카롭게 자를 수 있을까?

 

예술가들을 보라! 그들의 무한한 창작력을 차가운 머리로 계산하려고 해도 소용없다.

그들의 원초적인 충동과 본능을 창조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킨 것이 예술 작품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이 푸른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젓소들처럼 평화롭지는 않을 것이다.

 

고흐를 보라 평생을 자신의 광기와 싸우면서 예술혼을 불태웠다.

- 지킬 박사의 참을 수 없는 욕망과 쾌락의 탈출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회가 인간의 쾌락을 풀어 줄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마련했다면? 아마 하이드의 파괴 본능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마 스스로 발설할 수는 없지만, 지킬 박사의 기묘한 행동에 우리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를 표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 안에는 누가 있는가. 중에서

 

 

플라톤은 우리가 보고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이 세계,

감각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이 세계는 "참으로 있는"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다만 '진정한 것'인 세계인 이데아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감각적인 것을 통해서는 참되게 있는 이데아를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불멸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플라톤은 말합니다.

죽고 나서 불멸하는 생을 얻을 수 있다고요?

그것은 살아 있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불멸한다니요?

 

우리는  이 알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를 가지고 삽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가정하고 그 가정에 근거해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요?

 

에피쿠로스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쾌락을 추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물론 쾌락을 추구한다고 해서 문란한 삶을 즐기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는 쾌락을 과하게 추구할 때 인간은 오히려 불행해지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식이 몸에 해로운것처럼,

그가 생각하는 쾌락은 최고의 지적인 사유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었죠.

정신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뜻이 맞는 친구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있는

공동체를 꾸리며 사는 것,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염원한 가장 행복한 삶이었답니다.

 

풀라톤은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비로소 탈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쁜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그것을 알 수도 없으니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합니다.

두사람의 생각은 다르지만 죽음이란 삶의 마지막에

누구나 딱 한 번 경험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생각이 같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이라는 불안에 용기 있게 맞설 수 있을 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비로소 숭고한 변하는 삶을 경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죽는다는 사실은 오히려 축복이었습니다.

 

저마다 죽음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도 연관됩니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고 어떻게 살아야 잘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함께 물어봐야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 어떻게 만나야 할까? 중에서

 

 

 

어느 누구나 타인에게 귀한 존재이고 싶다.

벌레(카프가소설 변신)가 되었지만 그는 가족이 자신을 귀하게 여겨 주지 않는다면

가족과 함께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설사 자신이 벌레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인간으로 살고 싶은 것이고,

자신을 인간으로 대해 주지 않은 가족과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짐을 짊어지어야 하고 강요당하면서

자신이 원하지 않은 모습으로 존재해야 할 때 삶의 비애를 느낀다.

 

무엇을 주어야 그레고르(벌레로 변신한 주인공)마음에 들지

이제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누이 동생은 아침과 점심 때 가게로 달려가기 전,

황급히 발로 아무 음식이든지 되는대로 그레고르의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가 저녁이면,

음식을 어쩌면 맛이라도 보았는지 아니면- 아주 번번히 그랬다.

- 영 손대 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무고나심하게 빗자루를 휙돌려 쓸어냈다.

이제는 늘 저녁에 하는 방 치우기도 그보다 더 빠를 수는 없었다.

-카프카 '변신' 원문 중에서

 

가족을 위해 성실하게 일해 오던 그레고르는

더 이상 가족 내에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자 이러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중요한 존재이기를 바라고,

단순히 기능으로 취급받고 싶지 않다.

누구나 자신이 목적이기를 바라지 수단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목적일 때,

그때 나는 행복하다.

 

몇 년 전 작은아이가 보던 책, 카프카의 '변신' 보았을때

너무 생뚱 맞아서 깊이 있게 접근하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근자에 <카프카와의 대화>를 읽으면서 그 분의 말속에서

드러나는 정신세계에 매료되었었다.

참으로 흠모할 만하다는.

 

그리고  이 책에서 변신의 한 문장을 접하면서

아하,, 하는 .문장에 숨은 은유적이며 비유적인 표현이  좋았다.. 

 

아들이 벌레로 변한것을 동생도 그 벌레가 오빠인줄 알지만

자신을 역할(돈을 벌어오는 일)을 못하자 

가족에게서 서서히 소외받는 그레고르,

카프카는 벌레라는 외양으로 강하게 어필시켰지만,

 수단이 먼저인 가족간의 단절을 얘기하고 있다.

 

 

 

카프카는

"이 닳도록 일하고 지쳐빠진 식구들 중에서 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으로

그레고르를 걱정해 줄 시간이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먹고 살기 빠쁜, 각자의 역할을 하다가 집에 들어오면 말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은 가족들 사이에서 정을 나누기는 어려운 일이다.

효율성이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 버린 효율성 강박증 사회에서

개인은 집단이나 기업의 이익을 창출하는 도구가 된다.

이럴 때 인간다움이라는 말은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사랑이 감격스러운 것은

상대방이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 나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취향, 나의 개성, 나의 입맛, 나의 몸짓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주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든 자신이 누구에게 대체 가능한 존재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만 찾아야지 나 아니면 그 누구라도 좋다는 식이면 시큰둥해진다.

어느 누구도 아닌 나여아먄 한다고 할 때 비로소 나의 존재가 의미가 살아난다.

"꼭 너여야 해!"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정이 가기 마련이고

'너 아니라도 누구든 괜찮아'라는 말에서는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라는 시구에서

'그대'는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인칭의 너이다.

삼인칭의 그 사람이 판치는 세상에서 누군가가 나를 이인칭으로 대해 준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누구나 대체 가능한 존재가 아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설사 가족일지라도 타인을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 처한 준엄한 현실이다. 아무도 타인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으며

타인을 자신보다 소중하게 여길 수도 없다. 그것은 가족도 마찬가지다.

 

뼈아픈 것은 나의 소외가 힘겨우면서도 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소외를 일으키는 장본인이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소외는 뼈아프게 여기면서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소외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다.

 

변신은 가족간에도 소외를 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슴 아픈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우리는 소외받는 현실로 인해 우울해지기보다는,

'불가피한 소외와 단절'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파악하고,

그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지니는 의의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왜 너를 소외하는가?

 

 

수단(기능이나 과정 )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

아니 만나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이 강퍅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이런 만남들 때문에 더 그럴때도 있을 것이다.

또 내가 이미 그런사람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소외감을 느낀다면, 내가 어떻게 했길래

생각해 보아야 할지 않을까..

 

 

'부자연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럽다'눈 정서는 사람들이 많이 공유하면 자연스러운 것이고

공유하지 않으면 부자연스러운 것이된다..

이런 의미라면 왼손잡이도, 희귀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우리에게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개념이 도덕과 연결되어 자연스러운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느 레즈비언은 "그 사람이 여자라서 사랑한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보니 여자였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성애나 동성애나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남자라서 혹은 여자라서 사랑하는 것이아닙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 가슴에 꽂혔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죠.

 

동성애에 대한 기록으로 우리에게 전해 오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철학자 플라톤(BC428~347?)의 글이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을 펼친 플라톤의 글들은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을 살작이나마 보여줍니다.

 

플라톤은 책에서,

고대 그리스 희극 시인인 아리스토파네스의 주장을 빌어'동성애는 타고나는 것'이라고 햇습니다.

인간은 본래 세가지 성을 기지고 있는데,

남성, 여성,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있는 남녀성이  있다고 합니다.

동성애가 옳든 그르든 그 주체가 인간이라면, 그 인간은 하늘에서준 천부인권을 가진 존재입니다.

동성애를 한다고 해서 그로 인해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죠,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동성애, 인류의 죄악인가 중에서

 

 

 

<군주론.에 보면 "군주는 여우와 사자의 기질을 모방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함정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여우가, 그리고 늑대를 혼내 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사자의 힘에만 의지하는 자는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지도자는 사자같이 힘도 필요하고, 남을 속이기도 하고 속이는 걸 알아채는

여우같은 능력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우의 기질을 가장 잘 모방한 자들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우다운 기질은 잘 위장하여 숨겨야 한다.

인간은 능숙한 기만자이며 위장자여야 한다.'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 중

-리더는 무엇을 말하는가? 중에서

 

유토피아는 지금 여기에 없지만 현실의 프리즘으로 존재합니다.

이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유토피아는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상상력은 이성이나 감정에 배해 규명하기 힘든 마음의 능력입니다.

 

철학자 칸트(1724~1804)에 따르면, 상상력이란

"눈에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없을 때 그 대상을 생각해 내는 능력"입니다.

유토피아 문학이나 예술 작품은 대부분 눈앞에 없을뿐더러 본 적도 없는 대상을 그려 내는 작업입니다.

학문은 증명이 필요한 이성적인 작업입니다.. 하지만 문학이나 예술 작품은 행위자 개인이

자신의 감성을 통해 시대의 고통을 즉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는 자신을 강제하는 집단의 질서나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것을 말하기가 수월합니다.

서태지가 가수가 아니라 음악 교사였다면 <교실 이데다>와 같은 곡을 쓰기는 어려웟을 것입니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에 맞게 방향이 미리 설정된 닫혀 있는 체계가 아닙니다.

인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열린 체계입니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에만 봉사하도록 미리 짜여진 유토피아는 진정한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그것은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디스토피아에 불과합니다.

상상력은 현실에 비추어 미래를 여는 힙입니다.

그리고 상상이 중단되지 않는 한 유토피아를 향한 꿈도 계속될 것입니다.

-유토피아, 정말 가능할까? 중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삶과 그런 삶이 가능한 새로운사회 문화를 형성하기를 그들 역시 바랍니다.

아니 그들이 더더욱 절실하게 희망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삶이 특이할지라도 그들에게

세기의 예술가 또는 천재적인 예술가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당혹스럽거나 혐오스럽던 그들의 작품 또는 작품 황동에 찬사를 보내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솔제니친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민감하다.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도 얼마나 흉포할 수도 있는지를 증명해 준다.

예술가의 인생은 창조와 모험과 스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고독하며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단지 그만의 세계로 끝나는 비극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인 예술적 천재가 만든 작품은 새로운 창조와 모범으로서,

그것을 통해 기존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새로운 세계의 진입 가능성을 열어 준다.

'자유로운 예술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악마적 성격의 소유자인

예술가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 얻어진다.

-서머셋 모옴,

 

남과 차별화된 개성을 가지려는 희망과 자유롭고 싶다는 욕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을 찾게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은 물론 자신의 성향까지도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말입니다.

예술가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철학자 아도르노(1904~1969)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예술가의 거부 반응을 혐오증 내지 특이 체질로 보았습니다.

부조리한 사회를 보고 혐오증을 일으키는 예민하고 특이한 체질의 사람만이

진정한 예술가라는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를 하지면 예술가는 태어나면서부터 반골이라는 거죠.

 

여기서 핵심 내용은, 예술가는 개인적 이익이나 이데올로기를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예술은 꿈의 실현, 현실 도피라는 역할 외에도

우울이나 소외 등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각종 어려움과 부조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합니다.

그렇기에 자유로운 예술이 기존 현실 셰계의 부조리한 모습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예술은 무엇을 꿈꾸는가 중에서

 

 

 

 

칸트는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너도 나도 모두 할 때 나쁘지 않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 이하고 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싶고, 도둑질을 하고 싶어도 그 행동을 모두 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칸트는 이것을 '이성'이라고 했다.

이성은 자기가 따를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힘이 있다.

이를 '자율성'이라고 말한다.

자율성이란 자기가 따를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모습이다.

칸트는 인간의 인간다운 면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가상공간은 과연 존재하는가?

 

 

 

 

'역지사지' 이야기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절대로 시키지 말라'는

정말 하고 싶다면 입장바꿔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만

그 또한 인간이라 어디 잘되기만 하던가.

그래도 그래야 함이 기본을 지키는 길이고.

그래서 우리 삶은 기본지키기가 가장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거창 할 것도 없다. 도덕적 운운할것도,

그냥 '기본만 지키며 사는 것'도 쉽지 않으니..

 

욕심!! 날때마다 기본 때문에 허덕인다!!

욕심이란 놈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때.

내가 끈끈이로 욕심을 꽉 붙들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성이라는 것도 시시각각 제멋대로다.

'인간이니까' 라고 자위해 보지만

 그럴때도 참 어줍잖은 모습이다.

내가 나를 속일 수 없는 것처럼,,, 

 

이성으로 자율성이 온전히 유지되는 사람,

그야말로 '성인'이 아닐까.

 

 

 

서로에 대한 인정은 우리들의 차이를 풍부함과 성숙의 원천으로 생각할 때만 가능합니다.

너와 나, 우리와 다른 우리의 차이가 공동체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는 새로움의 원천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싹틀 때만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헤겔은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할 때 나는 비로소 나에 대한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확신시키는 토대가 된다고 생가한 것입니다.

호네트(1949~)는 이를 발전시켜 다른 사람들의 존재와 그들의 인정을 통해

나는 나의 정체성을 발전시켜 간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만날 공간은 어디인가? 중에서..

 

 

 

글자가 많아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나요,

 이쯤 읽고나면 좀 막연 했던 주제들이 

 명료한 주제로 와 닿는 것들 있지요.

그런 맛 새록새록 맛보다 보면

여기선 어떤 맛이 날까,, 찾게 되지요.

그리고 정말 맛있는 것들 세상에 이런맛이 있었나 싶은 것들도 있습니다.

한국에셔 안나는 열대과일 같은.. ㅎㅎㅎㅎ

그런 맛 맛보게도 되지요.

그러다 중독되기도 하고.

 

그래서 옛 고사 중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아난다'는 말 있지요. 

책읽기의 중요성을 논하는 얘기이기도 하면서

 독설을 경계하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장 맑은 정신상태에서 가장 좋은 것만을 전해주고자 한 저자들의 정신은

책마다 들어 있어서 그를 접하는 동안은 저절로 닮아가고 맑아져 가기 때문에

가시돋는 말은 할 수가 없는 게재요.

에고,, 또 사설이 길었습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