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앤소니 드 멜로의 생전 강연, 목회활동에서 한 말씀들로 엮어진 책이다.
예수회 신부로서 인도 푸나에 있는 사다나 사목 상담 연구소장으로
18년 동안 피정 지도, 기도 연수, 영성 치료 프로그램 등에 중점을 두고 일했다고 한다.
그의 매력은 종교인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은 글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틀에 박힌 사고와 행위에서 벗어나 실상을 직시하고 과감히 참된 자기가 되도록
지침이 되는 글들이 많다. 완전한 진실을 향해 신명나는
자유의 비상을 감행하도록 도전하던 삶이었고 독자를 충분히 그쪽으로 이끌어 주는 힘이 있다.
뉴욕 브롱크스 포담 대학 드 멜로 영성 연구소 (프랜시스 스트라우드)에서 펴낸 책이다.
87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셨기에. 살아있는 말들의 혼을 유지한 채로,
적응성을 보존한 채로 활자화를 하는 일이 토니의 사후에 내가 직면한 소임이라고
한 프팬시스 스트라우스의 머리말이 인상적이다.
읽다보면 미사든 강연이든 그의 말씀을 듣는 느낌이 든다..
종교와 상관없이 영적 안내자로 좋은 벗이 되기에 손색없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원하냐?
"너는 나의 행복이다. 만일 내가 너를 가지지 못한다면 나는 행복해지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단서가 붙지 않은 행복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조건 없이 행복해지기를 상상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한 조건들에다가 우리의 행복을 걸도록 길들여져 있는 겁니다.
그러나 깨어나기를 원한다면 첫째로 그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자유를 원한다면 기쁨과 평화와 영성을 원한다면 말입니다.
나는 영성을 깨어남이라고 정의해 왔습니다.
심리학 이야기를?
사람들은 한 관계에서 충분히 고통을 겪은 나머지 모든 관계에서
환상을 깨트리게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정신 병동에 갇히지 않은 단 한가지 이유는 우리 같은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모든 위대한 생각의 출발은 신에 대한 불경"이다 - 버트란드 러셀
자비와 허상
자비란 실상 이타주의의 탈으 쓴 자기 관심입니다.
선생을 하노라는 자각이 전혀 없는 선행만큼 좋은 선행은 없는 겁니다.
자기 관찰
자기 관찰 그것이 무엇일까요.
자기 내면이나 주위에서 되도록 모든 걸 살펴보되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살펴보는 걸 말합니다.
"나는 우울하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건 틀린말입니다.
내가 우울한 게 아닙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지금 우울을 체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매사를 평가하지 않는 깨달음
판단하지 마십시오, 비판하지 마십시오, 태도를 취하지 마십시오
바꿔 놓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연구하고 살피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것을 여러분이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바꾸려고 갈망하면
이미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나"를 벗겨라
우리는 자기 것이든 남의 것이든 딱지들에 반응하느라 우리의 삶을 너무 많이 허송합니다.
딱지들을 "나"와 동일시하는 겁니다. 카톨릭과 개신교는 흔한 딲지들이죠.
딱지들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와 관련된 의미에서 이 딱지들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나"는 우리가 집착하는 딱지들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딱지는 "내 것"에 속합니다. "내 것"은 항상 변하죠.
"나"가 변한 적 있습니까? 관찰자가 변한 적 있습니까?
사실은 어떤 딱지들을 (아마 인간은 제외하고)생각하든 그것들은 "내 것"에 적용되어야죠.
"나"는 이런 것들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와 "내 것"을 관찰할 때는 "내 것"과 동일화하지 않습니다.
"내 것"에는 고통이 있고, 그래서 "나"를 "내 것"과 동일시할 때 고통이 시작되는 겁니다.
돈, 이름, 국적, 인물, 친구 등등과 동일화하지 않을때 "나"는 결코 그럴 우려가 없습니다.
매우 활기 있어질 수는 있지만 위협당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고통이나 염려나 불안의 원인이 되었거나 되고 있는 것을 무엇이든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그러한 고통 저변의 갈망을 포착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는 여러분이 매우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 갈망은 무엇일까요?
둘째, 그것은 단순한 갈망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동일시가 있습니다.
모든 고통은 무언가를 그것이 내 안에 있든 내 밖에 있든, 나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서 야기됩니다.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
소유하려 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던 것을 상실할 때는 비탄을 느끼지 않습니다.
비탄이란 내가 나의 행복을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에게 적어도 어느정도로 의지했다는 표지인 겁니다.
내 말이 무자비하게 들릴 지경으로 우리는 이와 반대되는 말을 듣기에 습관이
되어 있는게 아닙니까?
의존
다른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는 것-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는 것
-그것은 무얼 의미할까요? 그것은 내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행복에 기여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단게는 두려움일 테죠..
상실의 두려움, 소외의 두려움 거부의 두려움, 상호 견제,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요구가 없고, 기대가 없으면 의존이 없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 행복이 너에게 있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떠나려 해도 나 때문에 슬퍼하지 않은 겁니다.
너와 함께 있기를 한없이 즐기지만 너에게 달라붙지는 않는 겁니다.
내가 집착이 없는 바탕 위에서 그것을 즐기는 겁니다.
--
네가 나에게 매달리고 나를 나대로 놓아두지 않는데도?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나를 나대로 놓아두지 않는데도? 너의 행복을 위해 내가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필요하다면서도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성서, 모든 종교, 모든 신비가들의 보편적인 가르침에서 정면으로 벗어나는 것입니다.
-고독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써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과 접촉함으로써 치유 됩니다.
행복은 어디서 오나?
누구도 없이 홀로된다는 것. 누구나를 자유롭게 떠나보내고 스스로 자유로워지는것,
아무도 편애하지 않고 누구나를 사랑한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를 이해한 겁니다.
그것은 선인과 악인을 똑같이 비추고
성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비가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장미가 "착한 사람들에게는 향기를 풍기겠지만 나쁜 놈들에게는 안 그러겠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전등이 "이 방의 착한 사람들에게는 빛을 비추겠지만 나쁜 놈들에게는 안 그러겠다고 할수 있어요?
혹은 나무가 "내 아래에서 쉬는 착한 사람들에게는 그늘을 주겠지만 나쁜 놈들에게는 안 그러겠다."
말할 수 있어요? 이런 것이 사랑의 모습입니다.
두려움 - 공격성의 뿌리
무지와 두려움 두려움의 원인이 된 무지 거기서 모든 악이 나옵니다. 거기서 공격성이 나옵니다.
참으로 비공격적인 사람, 공격을 할 수 없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두려울 때 화를 냅니다. 여러분이 최근에 냈던 화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요.
그대로 돌아가 보세요. 가장 최근에 화낸 일을 생각하고 그 뒤의 두려움을 탐색해 보십시오.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무엇을 앗길까 봐 두려웠습니까?
거기서 화가 난 겁니다. -실재로 정말 두렵지 않다면 화내지 않을 겁니다.
좋은 종교 - 깨닫지 못함의 정반대
하느님은 여러분의 경배를 받기보다 여러분이 변화되는 걸 훨씬 더 좋아하실 겁니다.
여러분의 숭배보다 여러분의 사랑을 훨씬 더 기뻐하실 겁니다."
"주여, 주여"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걸 훨씬 더 기뻐하실 겁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깨달아 알고 있으면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개달아 알고 있지 못하면
그것이 사람을 마음대로 합니다. 깨닫지 못한 것에 노예가 되기 마련입니다.
무엇을 깨달을 때 그것에서 해방됩니다.
그것은 여전히 거기 있지만 그 영향은 받지 않습니다.
조종되지 않죠. 속박되지 않죠. 그게 다른 겁니다.
깨달음, 깨달음, 깨달음, 때달음, 그 과정에서 우리가 훈련받는 것은 참여적 관찰자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딱지들
진리를 찾지 마라 너의 견해들을 제거하라 -일본인 선사들의 말.
고통을 겪고 있다면 잠들어 있는 것이다. -고통은 진리와의 접촉을 벗어나 있다는 증거이다.
지혜에 이르는 네가지
"내가 우울하다"고 말하지 마십이오. "그것이 우울이다"고 말한다면 그건 좋습니다.
우울이 저기 있다. 침울함이 저기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좋아요
그러나 내가 침울하다고 말하는 건 안 됩니다. 그건 그 감정에 맞춰서 자신을 정의 내리는 겁니다.
그건 환상입니다. 착오 입니다. 바로 지금 저기 우울이 있고 바로 지금 저기 상처받은 감정이 있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요. 홀로 놓아두십시요.
지나가고 말 겁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모든 것이. 우울한 기분들과 짜릿한 감동들은 행복과 무관합니다.
-심지어 사랑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사랑받아야 한다고 누가 그랬습니까?
필요한 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옳기 때문에 내가 기분이 좋다"고 고집들을 부리고 있습니다. 틀렸습니다.
내가 기분이 좋기 때문에 세상이 옳은 겁니다.
변화된 사람
"나"와의 동일시를 점점 덜함에 따라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과의 관계가 더 쉬워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상처받거나 사랑받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누구에게 인상적일 필요가 없게 되 때의 안심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오, 얼마나 홀가분한지. 마침내 행복이죠! 무얼 설명할 필요나 강박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겁니다.
만사 오케이, 설명할 게 뭐 있어요? 또 사과할 필요나 강박도 느끼지 않게 되는 겁니다.
나라면 "미안하오"보다는 "난 깨어났소"가 훨씬 듣기 좋겠습니다.
초연함
"내가 행복하기 위해 정말 네가 필요하지 않아.
네가 없으면 내가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신념으로 내가 나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야.
실은 내 행복을 위해 네가 필요치 않아. 너 없이도 나는 행복할 수 있어.
네가 나의 행복은 아니야. 네가 나의 기쁨은 아니야.?"
애착의 대상이 사람이면 이 말이 썩 기분 좋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말하십시요.
마음속으로 음밀히 말할 수도 있겠죠.
어느 경우든 여러분은 진실과 접촉하고 있을 것입니다.
환상을 깨트리고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환상이 없는, 환상을 떨쳐 버린 상태입니다.
-
정서적으로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은 다는 건 얼마나 홀가분한 일입니까?
단 일 초만이라도 그런 체험을 얻을 수 있다면 그때는 감옥을 부수고 문득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어쩌면 날기까지 할 것입니다.
두려운 일이었지만 나는 하느님께 말씀드렸는데.
나는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의 첫 반응인즉,
"이건 어느 모로 보나 내가 자라나며 배운 것과는 아주 반대되는 건데"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애착만은 예외로 삼고 싶어합니다.
"하느님이 만일 내가 그분은 당연히 그런 분이라고 생각하는 그 하느님이라면
내가 그분에 대한 앷가을 버릴 때 좋아하시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이 "하느님"이란 진짜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은 겁니다.
꿈꾸는 상태를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개념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때로는 "하느님"을 버려야 합니다.
수많은 신비가들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애착이 없는 바탕 위에서 내가 자네를 좋아하고 있을 때
자네와 함께 있다는 게 기쁜일이지. "자네는 자유야 나도 그렇고."
-애착은 사랑의 능력을 파괴합니다.
무엇이 사랑입니까? 사랑은 감수성입니다. 깨어 있는 의식입니다.
무저항
원수와 함께 흐른다면 원수를 극복합니다.
악에 어떻게 대처할까요?
악과 싸울 게 아니라 악을 이해할 일입니다
이해 속에서 악은 사라집니다.
어둠에 어떻게 대처할까요?
불을 켜야죠.
- 무엇을 포기할 때 그것에 매입니다.
그러나 포기하는 대신 관찰하십시오.
위험한 것들
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상을 보자마자 끝장납니다.
어떤 현실도 이데올로기와는 맞지 않습니다
삶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합니다.
사람들이 항상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의미는 의미를 초월할 때만 발견됩니다. 삶은 신비로 지각될 때만 의미가 있고
개념화하는 지성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외로움은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홀로 있음은 자신을 즐기는 것입니다.
조지 버나드 쇼의 꼬집는 익살을 상기하십시오.
들을 말이라곤 없는 어느 답답한 칵테일파티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즐기고 있느냐고 묻자그는 대답했죠
"그게 내가 여기서 즐기고 있는 유일한 것이오."
나의 죽음
비극을 체험하지 않고 충분히 인간다울 수 있을까요?
세상의 유일한 비극은 무지 입니다.
모든 악이 거기서 나옵니다.
세상의 유일한 비극은 깨어나지 못함과 깨닫지 못합입니다.
밀어붙이지 말라
문제는 예수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같은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깨닫는, 자기 안에 일어나는 것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자기 변화를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그 밖의 모든 방법은 자동차를 미는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표상들
"자연처럼 잔인한 것은 없습니다. 온 우주 안에 자연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러나 헤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 자신의 마음이다."
삶에 귀 기울이라
좋은 책을 즐길 때 좋은 독서가 됩니다.
토론이나 사색도 즐길 때 놀랄 만큼 좋은 것들입니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미쳐 버렸고, 삶의 사랑스런 것들을 즐길 줄 몰라서 점점 더 중독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세계
정서적으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그래서 아무도 자기를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할 힘이 없어진 그런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특정인을 필요로 하거나 특별히 대하거나 자기편으로 삼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공중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들도 굴이 있건만 자기 인생 여로에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마다하는 겁니다. 이 말은 두려움이나 욕망으로 가려지지 않은 밝는 눈으로 본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사랑의 세게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아픔을 거쳐야 합니다.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에 죽는 것이고
전적으로 홀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접할 때 혹은 사랑하는 일에 몰두할 때 어떤 느김이 옵니까?
혹은 매달림이 없이 터놓고 친밀하게 함께 있기가 즐거운 그런 사람과 진정으로 대화 중일 때는?
그런 때는 어떤 느김이 있습니까?
그런 때의 느낌들을 다른 때의 느낌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논쟁에서 이길 때 혹은 유명해질때 인기를 얻을 때, 등등등
나는 후자를 세상의 느낌들 전자를 영혼의 느낌들이라 부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얻고 영혼은 잃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없는 공허한 삶을 삽니다.
인기, 인정, 칭찬, 나도 오케이 너도 오케이를 음식삼기 때문입니다.
날 봐 다오, 날 좀 보소, 날 지지해 다오, 권력 잡기, 경주에 이기기를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걸 먹고 삽니까?
그렇다면 죽은 겁니다. 영혼을 잃은 겁니다.
다른 더 좋은 영양을 섭취하십시오.
그러면 변화를 보실 겁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삶을 위한 온전한 설계를 제시해 드린 게 아닙니까?
"사람이 무언가를 깨달아 알고 있으면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깨달아 알고 있지 못하면 그것이 사람을 마음대로 합니다"본문 중에서..
관성적으로 살아가는 나날들,
세상의 딱지들에 메여 사는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우리들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것들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들여다 보기 할 수 있도록 안내 하는 책이다.
마치 개미관찰자가 개미를 관찰하듯이...
올리지 못한 다양한 얘기들까지 충분히 영적 멘토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무엇에든 메이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평가하지 말라는 것,
있는 그대로 봐 줄줄 알고, 이해하라는 것,
어느것에서도 자유로울 것을 강조한 부분이 가슴이 남는다.
"내 것"과 "나"라는 개념도 와 닿았다.
내가 '나'를 지켜본다는 것,.
거리두기 하면서 관찰자적 입장이 되라는 것,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한 걸음도 옮겨 주지 않는다는 문장이 책속에 있다.
그렇지만 이런 영적 지침서들은 우리의 정신영역을 한 단계 성숙하게는 해주고도 남는다.
지인의 추천으로 보게 된 책인데 누구에게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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